6)성경적 경제관(Biblical Economic View) 회복과 부흥
(2)부(富, Wealth)
청교도는 돈과 사유재산을 합법적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부를 비록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오는 것으로 인정했지만 종종 축복보다는 유혹으로 보았다. 그래서 플리머스 식민지의 사업들을 관장했던 로버트 쿠쉬맨(Robert Cushman)은 버지니아의 이주자들이 부를 추구하며 얼마나 추악하고 세상적이 되었는지를 말했다.
또한 뉴잉글랜드의 제 1세대 청교도들은 부를 경계했다. 총독 존 윈드롭(John Winthrop)은 맨스필드라는 매사추세츠 이민자가 부유하게 되자 경건함을 잃었다고, 그의 저서 “1930-1649년의 뉴잉글랜드 역사”에서 기록했다.
특히 로저 윌리엄스(Roger Williams)는 부의 우려와 염려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세상의 부, 편안함, 자유, 명예, 쾌락 등에 가깝게 접근하면 할수록 초조함, 오만, 분노, 폭력과 더욱 가까워진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돈(재물)이란 본질적으로 악한 것이 아니라, 가치중립(Value Neutrality)적인 것이란 사실이다. 바울 역시 “돈을 사모하는 것 일만 악의 뿌리”(딤전6:10)라고 했다. 그 돈을 쓰는 사람의 의도와 사용처에 따라 선하게도, 악하게도 된다는 것이다.
(3)부의 축적(Accumulation of Wealth)
중세 이전 사람들은 자신의 필요한 만큼만 생산하고 재산의 축적을 죄악시 하였다면, 칼빈주의나 청교도의 전통 속에서 재산의 축적은 결코 세속적이지도 악한 것도 아니었다. 자신이 사용할 것 이상을 생산하여 공급함으로 자본을 축적하고, 그 근면함을 통하여 축적된 자본을 다른 사람에게 이자를 받고 빌려주는 것도 이론적으로 용납되었다.
농업이나 방직업을 하기에는 너무 경쟁력이 없는 칼빈의 목회지였던 제네바가 살 수 있는 길은 정밀공업과 은행업의 발전을 통한 자본주의적 기업가의 자유로운 활동이었다. 스위스 제네바에서 시작된 금욕주의적인 개신교의 윤리 이론이 활성화되었고, 이는 유럽과 영국으로 퍼져 나아갔다. 신자들의 금욕적인 생활이 수도원 안에서만이 아니라 일반 직장과 기업을 통하여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근면한 기업가와 노동자, 그리고 이들의 재산, 부의 축적은 세상 속에서 금욕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갖는 당연한 결과이자 축복이었다.
하나님을 경외, 충성하면 상을 받는다.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와 같이 재산을 이용해서 그 재산을 불리는 것은 피할 수 없는 명령이다. 청교도들은 열심히 일을 하면 할수록 부와 자본이 축적되었다. 사업에 대한 헌신, 재산의 축적, 토지의 획득은 청교도의 임무가 되었다. 근면, 절약과 성실한 노력을 통하여 자본을 축적하고 그것을 다시 생산에 투자하는 것은 많은 사람에게 일자리를 준다는 의미에서 선행이었다.
직업을 가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구체적으로 응답하는 것이었고, 이것이 청지기적 삶의 실천이었다. 그러나 현대 21세기 미국의 자본주의는 청교도적 자본주의를 상실했다. 그래서 지금의 자본주의를 서슴없이 탐욕적 자본주의, 혹은 천민자본주의(賤民資本主義, Pariah Capitalism)라고 부른다.
이 용어는 독일의 막스 베버(M. Weber)가 비합리적이며 종교나 도덕적으로 비천하게 여겼던 생산 활동을 의미했으나, 현재는 그 의미가 확대되어 탐욕적 자본주의를 가리킨다. 열심히 일해서 자본을 축적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으나, 그 수입을 자신의 만족이나 탐욕을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 율례와 영혼 구원에 맞게 사용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미국이나 유럽에서 거룩한 소명으로서의 직업의식, 금욕적이고 건설적인 자본주의가 사라졌다. 국제적 영역에서도 탐욕적인 신자유주의적 거대 자본과 다국적 기업은 이제 봉사와 공헌으로서의 자본주의를 버린 지 오래이다.
부는 하나님으로부터 오지만 축복보다는 유혹으로 생각
청지기로서 구제와 기증함으로 선교와 교회운영에 도움
(4)구제(救濟, Relief)
루터는 사유 재산권은 인정했으나, 개인의 재산은 사랑의 규범 즉 이웃을 위한 봉사를 위해 사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요한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은 “진정한 부자는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많이 주는 사람이다.”
코튼 매더(Cotton Mather, 1663-1728)는 “청교도 대상인들은 잉여생산을 경건하게 사용했다. 그들은 공과금의 지불, 사업자금의 대부, 가난한 자의 구제를 위한 시여(施與, 남에게 물건을 거저 줌)와 빚을 탕감하는 용서에 사용했다.” 그러나 그는 “당신은 자선을 잘못해서는 안된다. 일할 수 있으면서도 게으른 자는 그들 스스로 빵을 구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그들에게 최고의 자선이다. 게으른 자와 거지는 다 같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 그들을 굶게 하라”라고 했다.
그렇다. 구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3:10)고 한 사도 바울의 말씀과 같이 “게으름과 나태로 인한 가난”은 청교도 초기 공동체에서는 사회적으로 거부되었다. 즉 청교도들은 일할 수 있는데도 게을러서 일하지 않는 것을 가장 경멸하고, 큰 죄로 보았다.
(5)기증(Donation)
청교도들은 상당한 재산이 있으면서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적수공권(赤手空拳)이다. 이들에게는 거대한 물질적 재화를 등에 지고 묘지에 들어간다는 것은 퇴폐적 본능인 금전욕의 산물로 밖에 이해되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의 삶을 살고자 했다(Max Weber,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 p. 46.).
청교도들은 자녀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것을 가장 부끄러워했고, 나아가 청지기직 실패(?)로 보았다. 즉, 청교도들은 지금도 자녀들에게 재산을 상속하기보다는 교회와 선교기관, 대학 등에 기증하는 것을 최고 가치로 둔다. 그 결과 미국은 가장 많은 선교사 파송, 최고의 대학과 연구소 등을 갖게 되었다.
청교도들은 돈과 재물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것이었다. 내 자신도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해 있었다. 따라서 일하며 벌고 쓰는 모든 것에 철저히 내가 배제되었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야 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올바른 청지기 자세이다.
감리교의 창설자 요한 웨슬레는 “할 수 있는 대로 많이 벌라 할 수 있는 대로 많이 저축하라 할 수 있는 대로 많이 주를 위해 쓰라”고 권고하였다. 뿐만 아니라 웨슬레(John Wesley)는 저술이나 강연으로 자신의 수입이 많아진 후에도 과거와 같은 액수의 돈을 자신을 위해 쓰고, 나머지는 모두 주의 일을 위해 사용하였다.
크리스천 기업가로서 대표적인 기부 인물인 석유왕 록펠러(John D. Rockefeller)는 53세 때 회심 후 4,928개의 교회를 지었고, 시카고대학을 비롯한 24개의 대학, 또한 자선사업을 행하였다.
강철왕 카네기(Andrew Carnegie) 역시 소유를 삶의 목적으로 삼지 않았다 오히려 “부자들은 생전에 부를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총재산의 90%이상을 각종 교육사업과 사회사업 등에 거금을 기부한 당대 최고의 자선 사업가였다. 미국 전역에 무려 2천500개의 공공도서관을 지어 헌납했고, 8천대의 오르간을 기증했다. 카네기 공과대학도 설립했다. “부자인 채로 죽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상속은 자식들의 재능과 에너지를 망치게 하는 것이다”라고 카네기가 주장했는데, 필자도 그의 의견에 적극 찬동한다.
빌게이트, 워렌버핏 등 세상 사람들도 “높은 신분에 따르는 의무(Noblesse Oblige)”의 실천으로서 자신의 재산을 자손들에게 상속하기보다는 대 사회적 기부를 통한 큰 공헌(?)을 하고 있다. 하물며 천국을 소망하고 대망하는 크리스천들이라면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마6:29-20)라고 당부하신 예수님 말씀처럼 소유 재산을 자녀들에게 상속하기보다는 그 재산을 교회와 선교단체에 기부함이 세계선교와 영혼구원을 위한 것이고, 천국 시민으로서의 합당한 의무(義務)와 책무(責務)인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미국의 청교도 정신이 살아 있는 교회의 성도들이 임종 시 부동산과 현금을 교회에 기증함으로서 넉넉히 세계 선교와 교회 운영에 귀하게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1776년 미국의 독립이 청교도들의 언약사상과 그 윤리에 입각하여 세워졌고 하나님께 영광이 된 것처럼 청교도 미국 이주 400주년을 맞아 교회와 성도들은 진정 성경적 경제관으로 반드시 회복, 부흥되어야만 한다.
kimjoyh@gmail.com
12/05/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