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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의 땀방울- 무엇을 기대할까? (25)

교회사가 가르친다!(12)-소속의 중요성

소속-성도

 

초창기 한국교회 성도들은 쉽게 교회를 옮기지 않았다. 처음 등록한 교회에 소속되어있는 것을 당연시 하였기에, 몇 대에 걸쳐 같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교회로부터 치리를 받은 성도들도, 타인의 평가에 민감한 체면문화에도 불구하고 쉽게 교회를 움직이지 않았다.  

교회를 옮긴 성도가 전혀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아주 멀리 이사를 하는 경우나 피할 수 없는 특별한 사정이 생겼을 경우에는 다른 교회로 소속을 옮겨야 했다. 그러나 성도는 임의대로 교회를 바꿀 수 없었고 반드시 정해진 이명절차를 밟아야 했다. 

장로교회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과거 성도들은 출석하던 교회로부터 ‘교적부’와 ‘이명증서’를 발부받아 새로 옮길 교회에 제출하였다. ‘교적부’는 신급, 직분, 가족관계 등이 기록된 교회 보관용 문서이다. ‘이명증서’는 성도의 요청을 받은 당회가 정당한 이유를 살피고 이를 허락할 때 발급하는 증서이다. 타 교회로부터 전입하는 성도를 새로 받아들이는 교회도 매우 신중했다. 당회가 성도를 자세히 살핀 후에 교회의 등록교인으로 허락하였다. 

상황이 달라지면서 한 성도의 출입을 두고 보내고 받아들이는 교회가 함께 관계하던 전통이 사라졌다. 6.25전쟁 전후로 공산당에 의해 북한교회가 강제로 문을 닫게 되었다. 성도들이 대거 남한으로 이동하면서 이명절차에 큰 차질이 생겼다. 또한 1970년대 산업화 이후 인구이동이 대거 생겨났다. 도시를 중심으로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났으며, 도시거주자들도 새로 개척된 신도시로 몰리는 현상이 일어났다. 이런 상황 속에서 많은 교회들이 새롭게 개척되었다. 

1970년대 초에 시작된 민족복음화로 인해 전도 받아 처음 교회를 찾는 성도들의 수가 늘어났다. 각 교회는 과거 다른 교회를 다녔던 성도들이나 초 신자들을 동반해서 ‘새 교우’라는 명목으로 받아들였다. 대부분 정한 시간이 지나면 자동적으로 등록교인으로 받아들였다. 후에는 새 교우들에게 기초 교리와 교회 소개를 골자로 하는 과정을 이수하게 한 뒤에 등록교인이 되는 자격을 부여하는 교회도 있었지만 신앙점검보다 환영의 의미가 더욱 컸기에 형식적으로 흐르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 점점 타 교회와 관계 속에서 성도의 전입을 살피는 기능이 마비되었다. 각 교회마다 독립적으로 ‘등록교인’을 관리하는 일에 집중하는 체제로 변환된 것이다. 수평이동이 가속화되면서 대형교회가 생겨난 뒤 성도의 전입과정이 사라지고 이와 함께 소속감 역시 매우 미약해졌다. 1960년 이후 사회적 변화와 함께 개교회주의가 대두된 것이다. 지금도 경쟁적으로 교인의 수를 늘리는 일에 관심을 쏟는 교회일수록 전입성도의 과거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거나 묵과한다.   

현재는 ‘교적부’와 ‘이명증서’를 요구하거나 발급하는 교회가 거의 없다. 성도들은 이런 문서들이 있는지조차 모른 채 교회를 처음 방문 또는 등록 시에 작성하는 ‘교인카드’가 전부라고 생각한다. 새 교우를 등록교인으로 받아들일 때 본인의 진술에 근거해 과거 신급과 직분을 인정하는 실정이다. 이와 같이 성도에 대한 파악을 제대로 이뤄지지 않기에 이로 인해 교회 안에 사태가 생긴 뒤에야 수습하는 경우가 있다.   

 

교회: 성도의 신앙적 양육 돕는 영적 울타리

교단: 교회와 목회자를 세속화 물결로부터 막아주는 영적 울타리

교회등록은 그 교회 신앙노선 따를 것 결심 의미

 

 

소속-교회 

 

장로교회의 경우 헌법에 ‘이명증서’ 발급이 포함된 교인의 출입이 당회의 의무라고 명시되어 있다. 전입교인에 관한 원칙은 분명하게 세워져 있지만 잘 지켜지지 않는 상황은 교회의 정체성 자체를 혼동시키는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성도가 한 교회를 선택하고 등록하면 소속이 분명해지듯, 교회 역시 특정 교파 또는 교단에 소속되어있다. 일반적으로 ‘교파’와 ‘교단’은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 그러나 ‘교파’는 개신교의 보다 큰 단위(예: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와 ‘교단’은 각 교파 산하의 세분된 조직체(예: 장로교-합동, 통합, 합신, 고신, 백석...)로 구분하여 사용되기도 한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 구분을 따를 것이다.  

교파와 교단에 대한 언급은 항상 조심스럽다. 거대한 조직적 집단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교파주의’ 내지는 ‘교단주의’라는 함정에 빠지거나, 교단의 독단적 행보나 불법적인 처사로 인해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아예 교회 위에 교회가 있을 수 없다며 개교회주의를 정당화하여 독립교회로 남아있으려는 교회도 간혹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교회는 특정 교파와 교단에 소속되어 있다. 

여기서 분명하게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교파와 교단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교리적 일치’라는 것이다. 즉 교리에 있어 의견을 함께 하는 교회들이 모여 한 공동체를 이룬 것이다. 목회자를 양성하는 신학교들은 대부분 특정 교파에 속해 있거나 인준관계에 놓여있다. 신학생들을 목회자로 준비시키는 교과에는 설교연습 등 다양한 실천적 과목이 포함되어 있지만 무엇보다 각 교파와 교단이 추구하는 교리 습득과 아울러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관점을 갖게 하는 훈련에 집중한다. 

목회자들 역시 특정 교단에 속해있다. 장로교회의 경우 목사는 노회 소속이다. 교인들이 공동의회를 통해 담임목사를 청빙하지만, 그 결과를 허락하여 요청한 목회자를 교회로 파송하는 것은 노회의 임무이다. 만일 동일한 교단에 속하지 않은 목사를 청빙하려면 노회의 지도를 받아 그 자격을 얻은 후에야 정식으로 담임할 수 있다. 목회자는 반드시 교단이 추구하는 교리를 따르며 동일한 관점에서 성경해석을 하고 설교해야 한다.   

 

성경 해석

 

즉 교회 역사에 다양한 교파와 교단이 생겨난 사실이 시사하는 바가 무엇일까? 지금까지 교회 안에 성경해석 방법이 매우 다양하였으며, 새로운 관점을 지닌 교리가 등장하면 이에 동조하거나 반대하는 세력이 응집되었다는 것이다. 사도들에 의해 시작된 초대교회가 확장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교리형성을 요구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삼위일체 이해와 같은 신비스런 과제로부터 구원을 얻기 위해 인간이 어떤 노력이 얼마나 필요한지에 이르기까지, 많은 질문들에 대해 분명한 답이 없는 상황 속에서 교회 내에 갈등과 분열이 발생하였다. 이때 전문적인 성경 연구를 통하여 교리를 확정함으로 다시 교회가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교리란 특정 주제에 대하여 성경 전체가 어떻게 가르치고 있느냐를 체계적으로 정리해놓은 내용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보자.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구원을 얻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주장하는 칼빈주의 교리를 따르는 교파와, 인간 행위의 중요성도 중시하는 알미니안주의 교리를 따르는 교파로 구분된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교회의 회중의 자율성은 어느 정도 보장되어야 할까? 영국의 성공회를 제외하고 개신교는 지 교회 성도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회중교회 체계와 민주적 자율성을 보장하는 장로교회 체계로 나누어진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차이들이 상이한 성경 해석으로부터 기인되었다는 것이다.   

1054년,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분열되었다. 초대교회 이후 언어와 문화적인 차이를 극복하며 하나로 존재하였지만 교황의 수위권에 관한 교리 논쟁으로 인해 동서 교회로 갈라섰다. 그 후 두 교회는 독자의 길을 걸어갔다. 개신교가 탄생한 16세기 종교개혁의 무대였던 서 유럽에는 오직 하나의 교회, 즉 로마가톨릭교회만 건재해 있었다. 

초기 종교개혁자들이 가장 큰 관심을 두고 집중했던 것은 로마가톨릭교회의 성경적 오류를 통해 교회를 개혁하는 일이었다. 영적으로 어둡던 교회를 향해 성경의 진리라는 큰 빛을 밝히고, 타락한 교회의 정신적 지배를 받았던 유럽인들을 일깨우기 위하여 성경적 진리를 널리 알렸다.  

마르틴 루터(1483-1546)와 울리히 츠빙글리(1584-1531)와 같은 초기 종교개혁자들은 결코 독립된 교회를 세우려는 의도를 가지고 개혁을 주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로마가톨릭교회는 이들의 요구를 전적으로 무시하고, 도리어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개혁 세력을 억압하였다. 그 결과 더 이상 한 지붕 아래 함께할 수 없게 되는 상황 속에서 자연스럽게 개신교가 새롭게 탄생된 것이다. 

작고 미약하게 시작된 개혁의 불길이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면서 자연스럽게 로마가톨릭교회를 대항하는 세력이 커져갔다. 그러나 개신교 지도자들은 막강한 파워를 지닌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할 수 없었고 그런 의도도 없었다. 그들이 활동하였던 독일과 스위스 지역은 서로 상이한 지리적,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배경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이들은 로마가톨릭교회의 근본적 오류를 지적하는 부분에 있어서 일치된 의견을 지니고 있었지만 각자 다른 관점에서 성경을 해석하였기에 성찬과 세례, 그리고 예배 의식 등과 같이 중요한 교리에 대해 이견을 갖게 되었다. 그 결과 루터교회, 개혁교회, 재세례파 등의 교파가 생겨났으며, 영국의 성공회는 독특한 정치적 배경으로 인해 동시에 개혁파 신학과 구교의 예전을 수용하며 중도적 길을 걷게 되었다. 

초기 개혁자들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필립 멜랑히톤(1497-1560), 마르틴 부쩌(1491-1551), 또는 하인리히 불링거(1504-1575) 등의 개혁자들과, 개혁이 진행되고 있는 중에 등장한 요한 칼빈(1509-1563)과 존 낙스(1513-1572)와 같은 개혁가들은 두 가지 사명에 집중하였다. 하나는 개혁 세력을 저지하려던 로마가톨릭교회를 효과적으로 대항하는 일이었다. 다른 하나는, 이미 시작된 개신교가 어떤 방향으로 개혁되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성경적 고민이었다. 그 결과 그들은 교리적으로 각자의 길을 걸어갔으며 각 교파의 전통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울타리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루터교회, 개혁교회(장로교회), 그리고 재세례파가 시작되었다. 그 외에 침례교(17세기 초), 감리교(18세기 초), 성결교(19세기 말), 오순절교회(20세기 초) 등은 그 후에 생겨난 역시 개신교 산하의 교파들이다. 이들은 서로 성경 해석에 대한 이견으로 인해 각자의 교리적 전통 속에서 성장해왔다. 각 교파들도 교리적 갈등으로 인해 세분되어 다양한 교단을 형성하고 있다. 예를 들어, 장로교회라는 이름을 지녔지만 그 안에는 매우 보수적인 신앙을 지닌 교회가 있는가 하면 자유주의 사상을 수용하여 성경을 계시된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는 교회도 있다. 

교회 문턱은 절대적으로 낮아야 한다. 누구든지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 놓아야 한다. 그러나 성도는 교회의 교리적 정체성을, 교회는 성도의 신앙상태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허술한 틈을 원수 마귀가 교회를 흔들어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항상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 안정되고 평안한 교회라 할지라도, 이단의 공격과 세속적인 자들로 인해 연합이 깨어지고 큰 어려움을 경험할 수도 있다. 각 교회에 침투하여 악한 세력을 넓혀가고 있는 신천지가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본인이 출석하는 교회가 어떤 교단에 속해 있는지 정확히 모르는 성도가 허다하다. 모든 성도들은 자신이 속한 교회에서 목회자를 통해 바르게 목양 받으려면 반드시 교파와 교단에 대한 기본 지식이 있어야 한다. 교회는 성도의 신앙적 양육을 돕는 영적 울타리다. 이와 유사하게 교단은 교회와 목회자를 세속화의 물결로부터 막아주는 영적 울타리이다. 타 교파 또는 교단에 속한 교회로 전입하는 경우, 전에 다니던 교회의 행정체계와 성경 해석의 방향이 다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성도는 교회의 신앙노선을 자세히 알아본 뒤 거취를 결정해야 한다. 특정 교회를 정하여 등록하였다는 것은 그 교회의 신앙노선을 반드시 따를 것으로 결심하였다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covenantcho@yahoo.com

12/05/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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