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원형질
코로나 시기에도 한국과 캐나다를 연결해서 새벽부흥회를 영상으로 3주간 진행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필요한 간절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온전한 변화의 바램으로부터, 가정과 가문의 변화, 교회와 삶의 전 영역의 변화에도 결코 빠질 수 없는 원형질의 공급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은혜가 필요했던 것이다.
은혜는 대단히 큰일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아주 작고 사소한 것으로부터 모든 것 속에 은혜가 필요하다. 하다못해 나의 아주 개인적 바램인 한국 신문과 뉴스를 절독하기를 원하지만, 그것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을 본다. 뉴스를 보면서 미워하고 판단하고, 그래서 기도하지 못할 정도로 마음이 어수선하다면 끊어버려야 마땅할 것인데 말이다.
이러한 개인적인 문제뿐 아니라 인생연한과 함께 익어가는 세월의 무게를 잘 지고 계신 어르신들에게도 여전히 은혜가 필요함을 본다. 조금 젊은 사람들은 절제력이 없어 그렇다 치더라도, 연세 드신 어르신들은 이제 원숙한 품격을 가질만하시다. 그러나 어르신 중에도 감정조절이 잘 되지 않아 어린아이 같은 문제로 교회 안에서 고통과 상처를 호소하는 것을 본다. 자신도 모르게 열을 내고, 거친 성격 다 드러내 보인 다음 그 후회를 반복하며, 사람에게 위로 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사람에게 기대한 그 위로는 또 다시 설화가 되고, 마음은 더 큰 상처를 받게 된다.
세상과 교회, 모두 은혜
이처럼 개인적인 문제에서나 연륜 있으신 어르신들의 문제나, 모든 것에 오직 은혜가 필요한 것을 본다. 은혜는 그저 교회에서만 필요하고, 세상에서는 약육강식과 정글의 법칙처럼 그렇게 살아야 잘사는 것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교회 안에서나 밖에서든, 세상과 교회 모두가 한결같이 필요한 것이 오직 은혜이다. 신문하나 보는 것도 마음대로 어거하지 못하는 인생의 연약함 때문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실히 필요하다.
자녀와 가정과 가문을 생각하면, 마음과 힘을 다해 사랑하는 것만큼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져야 함을 계속 깨닫게 된다.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다보면 결론은 나 자신과 그에게 함께, 모두에게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함을 절실히 알게 한다. 상담대화를 하면서는 온유함을 지키는 은혜가 필요함을 느끼게 된다. 오늘 좋았던 사람이 내일만 좋은 것이 아니라 영원히 좋으려면 거기에도 은혜가 필요하다. 한결같은 사람이 이 땅에 어디 있으랴.
은혜는 연약함과 함께
은혜는 부족함과 직결된다. 구원의 빛 가운데, 자신의 비참함과 형편없음을 깨닫고 마침내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며 살아가는 순간순간의 모든 삶에 동일한 은혜가 필요하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바울은 세상적으로 대단한 사람이었다. 공부도 많이 했고 실력도 남다른 데가 있었고 로마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요 세상 살아가며 자신감이 넘치는 전도유망한 청년이었다. 하지만 그가 예수님을 다메섹 도상에서 영접한 뒤에 그는 앞을 보지 못하는 급 전락한 인생이 되었다. 세상의 자랑거리가 아무 소용없게 된 인생이 된 것이다. 누군가를 의지하지 않으면 걸을 수도 없고, 눈에 덮인 비늘 같은 것을 벗겨주지 않으면 앞을 볼 수도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동안 세상적으로 잘나 보이는 능력들이 이젠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된 것이다. 그의 비참함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스스로를 죄인중의 괴수라고 할 만한 일을 너무나 담대히 행하였다. 그런데 그렇게 해하고자 하였던 바로 그 원수 같은 존재가 일순간 나의 왕 나의 주님이라는 사실로 드러났을 때, 그 자신은 정말 황망했을 것이다. 그가 모든 지식과 힘을 다해 핍박하였던 예수,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그가 바로 메시아 곧 그리스도, 자신이 생명 바쳐 따라야 할 참된 주님이라는 사실 앞에 어쩌면 낙망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주님을 따르는 길만이 사는 길이라고 할 때에, 그동안 자신이 자랑하던 모든 판단과 학문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는 괴로움을 맛보았을 것이다. 게다가 몸에는 가시 같은 질병까지 있어서 자신의 영육을 괴롭히는 처지가 되었으니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그러나 그에게는 이미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있었다. 그 은혜가 세상을 이길 능력이 되었다. 과거 자신의 약함과 허물에 대하여, 자신의 몸의 가시로 받는 고통에 대하여,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을 때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My grace is sufficient for you)”는 것이었다. 이미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충분한 은혜를 부어주셨다는 뜻이다. 그 은혜가 그 모든 연약함들의 조건들, 세상조건의 허물어짐, 반역에 열심이었던 일들, 몸의 연약한 질병 등의 모든 육신의 조건들까지 넘어설만한 가장 강력한 힘이 되었던 것이다.
연약함의 축복
사람이 얼마나 무지한 존재인가 하면 내가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한 가지 부족한 것으로 인해서 안타까워하고 괴로워할 때가 있다. 그런데 그것이 지나보면 그 연약함이 나를 믿음의 최고 전성기를 달리게 한 축복의 동력장치가 되었음을 고백한다. 그 부족함을 통해 세상의 썩어질 자랑거리에 자신을 매몰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밝은 빛의 조명아래 자신의 연약한 모습을 발견하고 깨닫는 것이 있다면 그는 정말 은혜를 아는 복 있는 존재이다.
그래서 은혜를 맛보아 누리고자 할 때 무엇보다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완벽하게 지으시지 않았음을 감사해야 한다. 완전하신 창조주의 무능력을 말함이 아니다. 완전하게 지으셨다. 그러나 그 완전함은 인생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지할 때만 완전해지는 제한적 조건이 붙는 내용이다. 생각해보라,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실 때 하나님이 필요 없는 완전하고 완벽한 존재로 지으셨다면 어느 누가 하나님을 의지하겠는가? 오히려 하나님을 넘보는 존재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몸에 가시 같은 어려움이 있는가? 내 몸에 붙어 다니는 가시는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깨닫고 영광스런 은혜의 빛과 연결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임을 믿어야 한다. 그 은혜의 빛은 곧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상황들을 만족하는 삶으로 고백하게 한다. 우리의 삶이 온전한 증거는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인식하고 누리느냐 하는 데 달려있다. 그래서 신실한 성도는 날마다 그 은혜를 계수하며 은혜를 헛되이 하지 않고 순종으로 잘 지키게 된다.
연약함의 자리, 감사
하나님 앞에 받은 은혜는 생각만 하여도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감사가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가시들을 통해서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를 받고서 살아왔는지를 돌아보고 누리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얼마나 하나님께 영광인가? 한계와 장애를 가진 믿음의 사람들, 그러나 그들은 그 연약함 가운데 하나님의 도와주심으로 모든 것이 변화되는 아름답고 멋진 사람이 되었던 것을 본다.
헬렌 켈러는 태어난 지 19개월 되던 때에 열병으로 인해서 눈이 보이지 않고 귀가 들리지 않는 중복 장애인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애인으로서 최초의 인문학 학위를 받았고 사회운동가로 영향력 있는 삶을 살았다. 그러한 헬렌 켈러는 “3일 동안만 본다면”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만약 내가 삼일 동안만 볼 수 있다면 꼭 보고 싶은 것들이 있다. 첫째 날에는 친절과 우정으로 내 삶을 가치 있게 만들어준 사람들을 보고 싶다. 오후가 되면 오랫동안 숲 속을 산책하면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흠뻑 적시고 싶다. 그리고 감사의 기도를 하고 싶다. 둘째 날은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밤이 낮으로 바뀌는 가슴 떨리는 기적을 보고 싶다. 그날 저녁에는 영화나 연극을 보면서 시간을 보내고자 한다. 내 손의 감각으로는 도저히 알아차리지 못한 우아함과 아름다움을 보고 싶다. 셋째 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평범한 길거리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다.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의 일상생활을 이해하고 싶다. 도시의 여기저기에서 행복과 불행을 동시에 눈여겨보면 그들이 어떻게 일하며 어떻게 살아가는지 보고 싶다”라고 고백한다.
그런데, 헬렌 켈러가 그토록 소망하지만 평생 이룰 수 없었던 그 삼일을, 지금 우리는 매일 누리면서 살고 있다. 그러나 감격이 다르다. 연약함에 대한 간절함의 차이이다. 그러면 인생은 모두가 장애와 어려움을 가져야만 감사할 수 있을까? 그렇게 사는 사람도 많다. 평소에 자신이 원하는 인생을 막 살아간다. 그러다가 어려움과 고난이 닥치면 호떡집에 불난 것처럼 울며불며 주님 앞에 나아온다. 이런 모습도 잘 찾아보기 어려운 은혜가 탁한 세상이다. 불이 아니라 대형 화재가 발생해도 기도할 줄 모르는 세상이 되었으니 말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받은 은혜를 생각하기만하여도 사실 그것 자체만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감사가 존재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한 가시들을 통해서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를 받고서 살아왔는지를 돌아보고 누리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이를 누리고 즐거워할 때.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가? 연약함이 그리스도의 신앙과 연결되면, 영광 찬송 기쁨의 주제어가 된다.
연약한 자리, 은혜의 자리
상술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능력은 무한대의 강력함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의 그 강력하심과 온전하심의 은혜가 폭포수처럼 인생에게 부어지는 장소가 있는데,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인정하는 바로 그 자리이다. 바울에게 육체적인 연약함이 있었다. 말하는 것이 좀 어눌하고, 외모도 그렇게 호감 가는 형은 아니었다. 육체의 가시라고 말하는 질병도 있었다. 보통 사람 같으면 그 연약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일을 포기하고 거절하는 이유가 됐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연약함을 기도의 기회로 삼아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 감사의 자리가 되게 하였다.
인생의 강함은 무엇인가? 연약함과 부족함으로 주님 앞에 울 수 있는 사람이다. 그 슬픈 탄식으로 하나님 안에 머물 수 있는 그 사람이 진정한 강한 사람이요, 세상을 이기는 믿음의 능력자가 된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연약함을 늘 깨달으며, 우리의 지혜와 능력이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한결같은 삶을 이어가야 한다. 연약함 가운데서도 예배드리고, 부족함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역을 감당하고, 거친 세상 가운데서도 오직 믿음으로 반응하고자 몸부림을 칠 때, 한결같으신 주의 은혜가 그를 강하게 붙들고 온 세상가운데서 승리하게 하실 것이다. 부족함과 연약함이 있는가? 더욱 크고 놀라운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이다.
davidnjeon@yahoo.com
11.21.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