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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장 붕(1877-1955)

장 붕(張鵬)은 1877년 9월 15일 서울 서대문구에서 출생했다. 그는 대한제국에서 내부주사와 강원도 사무관을 역임했다가 한일병탄이 되던 1910년에 사직하였다. 이듬해에 장로교인이 되었고, 1916년에 전도사로 활동했다. 1919년 4월에 상하이로 망명하여 임시의정원 의원과 의장으로 활동하던 때 상해 한인교회에 출석했다. 그는 피터 장으로 프레지던트 태프트 기선을 타고 46세 때인 1923년 12월 15일에 하와이 호놀룰루로 이동했다. 

 

힐로한인기독교회 목사

 

장 붕 목사는 김성기 목사와 김치현과 함께 마우이 섬 파이아 한인기독교회 대표로 1926년 1월 4일부터 10일까지의 한인선교부 연회에 참석했다. 그는 그해 한인선교부 건의조사위원 중 한 사람이 되었고, 한인선교부 이사원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으며, 그해 전도부장이기도 하였다. 그해 그의 부인 그레이스 장과 자녀인 헬렌, 피터 그리고 아이삭이 상하이에서 하와이로 이동했다. 1930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장 붕 목사는 그의 부인과 함께 하와이 섬 호녹가이지(Honokaa)에 있는 사립학교 교사로 활동했다.

장 붕 목사는 1931년에 힐로한인기독교회 담임목사였다. 그해 본 교회는 “주의 피로 사신 교회임을 잘 깨달아 어려운 때에 열심히 연보하여” 4,500달러를 주고 30년 된 건물을 구매하여 예배당으로 개조했다. 본 건물의 주소는 우루라니 길 213번지였다. 

그해 부활주일은 1934년 4월 1일이었는데 그날 오전 5시 30분에 힐로의 각국 교회 교우 700여 명이 할나우 언덕에 올라가 십자가 앞에서 부활절 연합새벽예배를 드렸다. 본 교회는 예대로 오전 8시 30분에 소년회가 준비한 특별 프로그램을 한 후 9시 30분부터 주일학교 공과공부를 하였을 때 교사들은 자기의 돈으로 준비한 과자를 아동들에게 나누었다. 10시부터 부활 주일예배를 드렸다. 아동 셋이 유아세례를 받았고 청년 열 명이 입교식에 참여했다. 그날 오후 7시 30분에는 힐로 각국 교회 교인들이 백인예배당에서 부활절연합 저녁예배를 드렸으며, 교인들은 부활의 진리를 더 사모하게 되었다.

예배당을 구매한 후 3년이 되던 1934년에 빚이 1,000달러가량 남았으니 그동안 본 교회 교인들의 헌신을 가름할 수 있다. 이렇듯 본 교회의 청년회, 찬양대, 주일학교는 이전보다 발전하였다.

그해 6월 9일 아침 7시에 힐로를 방문한 박동완 목사를 맞았다. 장 붕 목사가 박동완 목사를 모시고 자동차로 예배당에 갔다가 잠시 쉰 후 근방 교우를 심방하였을 때 박동완 목사가 보기에는 생활상태가 5년 전보다 훨씬 윤택하게 보였다. 이튿날 주일예배에 교우들이 많이 모였고 또 찬양대의 청아하고 유창한 찬송 소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했다. 박동완 목사의 설교제목은 ‘자기의 피로 값 주고 얻은 교회’였고 본문은 사도행전 20:28이었다. 장 붕 목사가 박동완 목사를 모시고 11일에는 학갈나우 상동에, 12일에는 옥갈나와 파월노와 호노카를 심방하였다. 

그해 7월에 한인기독교보가 다시 출간되었다. 이에 힐로한인기독교회 직원일동이 “축, 교회보 속간”이라는 글을 게재했는데 장 붕 목사 목사가 쓴 것으로 보인다. 아래는 게재한 글이다. “우리 주 예수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치 아니하시고 또 알파이시오 오메가이신고로 유시유종하시나 우리 신도들은 주님의 이름을 부르짖으나 변하기도 자주하고 시작은 있으나 끝이 없는 일도 많음으로 우리 교회의 유일한 교회보가 4, 5년 성상을 정간이 되어 교회의 소식이 컴컴한 속에서 지내었더니 다행히 금년 정월에 우리 교회의 평신도 대표회가 일어서 교회보를 다시 발간하게 되니 본 교회의 직원일동은 기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간단한 축사를 보내어 인하여 바라기는 우리 교회보는 지면마다 줄줄이 우리 주 예수의 보혈과 하나님의 사랑으로만 채우게 되어서 모든 신도의 신앙이 주님의 은혜가운데서 날마다 자라게 될 뿐만 아니라 내외국인에게 복음의 빛을 비추는 등대와 같이 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파하는 나팔과 같이 되고 죄인들에게 구원의 길을 가르쳐주는 지남침과 같이 되고, 하나님의 성전 뜰에 항상 있는 감람나무와 같이 되기를 축사의 요지로 삼습니다.”

1934년에 장 붕 목사는 하와이 섬을 순행 전도했다. 고나 구역 동포자녀들의 소학교 졸업 축하식에 초청을 받아 그해 8월 22일에 교호 지방에 가서 축연에 늦게 참석하였다. 그 밤에 예배를 드리고 졸업생들에게 권면했다. 다음 날 홀루알루와 가일루아에 거주하는 동포를 심방하고 교호에 돌아왔다. 다음 날은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가 가일루아 해변에 와서 낚시를 하였다고 한다. 25일부터 매일 밤을 이용하여 전도하였는데 지리상 형편으로 동포가 많이 참석하지 못했으나 재미있게 지났다. 그곳에서 장수영과 아내 정인숙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28일에는 김원근과 함께 캡렌쿡 지방에 거주하던 김순성의 가정에서 투숙하고 29일 주일아침예배를 드렸고, 그 예배에서 노석봉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김기두와 홍기서를 원입교인으로 세웠다. 그날 예배 후 그곳 형제자매의 뜻을 따라 평신도회를 조직하였다. 회장에 김순성이, 서기에 노석봉이 피선되어 회장이 개회하고 임원을 선정하였는데 부사에 김순성, 재무에 박봉남, 탁사에 김원근이 뽑혔다. 그날 오후에 김순성과 김원근과 함께 호노나우로 가서 그곳 장성욱의 가정에서 밤에 예배를 드렸다. 

30일에 김순성과 교호로 돌아와서 김원근 가정에서 묵고, 31일에 김일만의 차로 와미아, 호녹가, 파월로 등에 거주하는 동포를 심방하고 옥갈나에 가서 그날 밤에 예배드린 후 교회를 조직하고 부사에 백윤영과 홍경오를 그리고 탁사에 이용선을 선정하였다.  

1934년 10월에 발간된 한인기독교보에는 장 붕 목사의 설교가 실려 있다. 출애굽기 20:3을 본문으로 하여 설교제목은 “첫째 계명”이었다. 십계명은 모든 율법의 강령이 된다. 이 중에 첫째 계명은 계명 중의 첫째 계명이 될 뿐만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는 법에 제일 중요한 조건이다. 첫째, 여호와 외에 다른 신을 허락지 않았다. 둘째, 신자가 다른 신을 둠은 간음하는 것과 같음으로 허락지 아니하였다. 셋째, 우상도 허다하니 다 피할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다하며 정성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섬김이 첫 계명을 지키는 것이오. 혹시라도 큰 물건이든지 적은 물건으로 우상을 만들어 마음속에 두어서 하나님께 적대되는 일을 엄금함이 합당하다.

힐로교회 안에 있는 보영국어학교는 1934년 가을에 학부형회를 열고 교장 겸 재무에 김흥부로, 교사는 이수영으로 선정하였고, 학교가 발전되고 규모도 짜여가며 학도들이 증가하여 40여 명이었다.

그해 추수감사절에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남녀 교우 100여 명이 모여 1년간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물건을 가지고 와서 하나님께 바치며 순서를 은혜롭게 진행했다. 찬양대가 추수찬미를 하였고, 각 임원이 기도와 성경 읽은 것을 번제로 드렸고, 장 붕 목사 목사가 △1년 동안 세계에 전쟁이 없고 평안히 지냄 △미국 안에 재정 공황이 완화됨 △하와이에는 아무 천재나 지변이 없음 △힐로교회에 구채를 갚아서 짐이 가볍게 됨 △교회 청년들 다수가 입교함 그리고 △교회의 임원이 피선됨을 감사했다. 그리고 김응섭, 김흥복, 김승률, 박자도 형제와 김순남, 김충애 자매와 김성만 청년이 감사담을 나누었다. 예배를 마친 후 교우들이 가지고 온 식물과 실과를 나누었고 감사절 연보는 8달러였다. 

 

1926년 한인선교부 대표로 도미...힐로한인기독교회 담임사역

한인기독교회보 주필로 전도와 성경지식, 청년성경공부 확대   

 

그해 12월에 평신도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김미나, 서기에 박세별이 선임되었다. 교회 임원으로는 전도사에 김흥복과 김충애가 선정되었고, 부사에 최하립, 집사에 김성기, 김정수, 탁사에 이수영과 김베드로가 뽑혔다.

그해 청년과 아동들이 교회 직원들과 같이 성탄 축하식을 수 삭 동안 준비했다. 성탄절 밤에 교우들과 힐로 구역 안에 있는 각 교회의 교우들과 아동 등 400여 명이 하일리 홈에 모여 김미나의 사회로 순서를 재미있게 진행했다. 아동의 연극은 영적인 의미에 전도 목적도 있었고, 영어와 한국어로 하여 3시간 이상 계속되었으나 교인들이 다 재미있게 여겨 피곤한 모습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외국 사람도 참석하였는데 내년에도 오려니와 작년에 못 왔음을 후회하였다. 이날 80여 달러를 헌금하였고, 외국 사람들도 90여 달러를 헌금하였으며, 캔디와 실과를 보낸 것이 4, 50달러가 되었다.

박동완 목사는 1935년 1월에 발간한 한인기독교보에서 “힐로교회는 장 붕 목사 목사의 주께 대한 충성과 일에 대한 성의로 말미암아 일반 교우로 더불어 교회 토지 값을 한 3,000달러나 갚게 되었으며, 외국 친구들의 사랑스러운 동정에 깊이 치하하는바 또한 교우들의 성의에 감복하며 또는 청년들이 교회에 접근하여 활동하는 것”에 감사한다고 썼다. 

1938년 3월 15일에 교인들이 모여 사진을 찍었다. 그해에는 본 교회 재적이 206명이었고 유아 세례자는 480명이었다. 작년 교회가 쓴 경비는 1,194달러 80센트였다. 주일학교 교장은 김민나였으며, 주일학교 학생 50명을 지도했다. 국어학교도 있었다. 학생은 31명이었고 1년 전 사용경비는 1,956달러 28센트였다. 그리고 교회 기지는 7,500달러에 해당했다. 

1940년에는 힐로 한인기독교에 19명의 임원이 있었다. 신도수는 185명이었고, 주일학교 학생은 65명이었다. 청년면려회에는 35명, 소년면려회에는 30명이 참석했다. 국어학교에는 38명의 학생이 있었다. 재정은 1,273달러였고, 토지와 건물 값은 7,500달러였다. 

호놀룰루교회 김형식 목사가 1940년 1월에 사임서를 낸 후 김창순 목사가 부임하던 8월 말까지 3개월 동안 장 붕 목사이 설교목사로 활동하였다. 그해 8월 4일 주일에 장붕 목사는 로마서 10장 15절을 설교 본문으로 하여 ‘복음을 전하는 이의 발’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였다. 그는 교회보를 이용하자는 요지로 설교를 마쳤는데 교회보에는 ‘날마다 읽을 성경 장절’이 있어 매일 아침과 저녁에 이에 따라 성경을 읽을 수 있었고, ‘만국주일공과’가 실렸는데 이를 통해 집에서도 성경공부가 가능했다.

1940년 7월에 한인기독교회보가 속간되면서 전도와 교인들의 성경지식 확장 그리고 청년들의 국어 성경공부 등의 목적을 다졌다. 장 붕 목사가 이의 주필 겸 편집인이었다. 1953년 호놀룰루 전화번호부에는 장 붕 목사가 호놀룰루한인커뮤니티교회 목사였는데 2년 후인 1955년 8월 2일에 호놀룰루에서 78세로 소천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9년 그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damien.sohn@gmail.com

11.07.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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