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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에임스(William Ames)의 “신학의 정수(A Marrow of Theology)” (1)

들어가며-“신학의 정수”의 위치

 

필자가 청교도 신학의 강의 준비를 하면서 감명 있게 읽었던 세계 고전 중의 하나인 “신학의 정수”는 청교도적 신앙과 생활의 명확하고 설득력 있는 표현으로서 지금까지도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에 필자는 세계적인 고전에 대한 내용을 기록함에 있어서, 에임스의 책 “신학정수”와 더불어, 그 책을 요약하고 평가한 켈리카픽(Kelly M. Kapic)과 랜들 글리슨(Randall C. Gleason)의 “청교도 고전으로의 초대”, 그리고 조엘 비키(Joel Beeke)와 마크 존스(Mark Jones)의 “청교도의 모든 것”을 참조하여 글을 전개하였다. 

영국, 화란 그리고 뉴잉글랜드에서 청교도의 방식을 열망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본서를 탐독하였으며 화란이나 미국에서 신학에 접하는 모든 학생들, 특히 임마누엘대학, 라이든대학, 하버드대학, 예일대학 학부생들은 신학개론의 일환으로 라틴어본 “신학의 정수”를 읽어야 했다. 

청교도인 하트포드(Hartford)의 토머스 후커(Thomas Hooker, 1586-1647)는 목회자들에게 매우 열정적으로 에임스의 “신학의 정수”를 추천하면서 “다른 저서들을 전혀 소장하지 못하고 본서만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본서는 능히 그를 훌륭한 목사로 만들 것이다"라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1717년 코튼 매더(Cotton Mather)는 임직식 설교에서 목사들의 필독서로 오직 “신학의 정수”만을 추천했다. 현존하는 영역본은 아마도 19세기에 인쇄된 역본으로서, 본서가 17세기 초엽에 저술된 라틴어 저서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본서의 광범위한 독서계층을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에임스는 “신학의 정수”를 학문적인 논문으로서만 아니라 일반 성도들과 학생들을 위한 유용한 개론서로 저술했다. 본서는 두 권으로 구분되며 각 장마다 번호가 매겨져 있고, 초신자도 특정한 신앙내용의 항목에 대하여 에임스의 답변을 쉽게 발견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또한 본서는 신학적인 점검을 위한 목록 이상, 신앙적인 깊이를 가지고 응답해주는 깊이가 있는 저서이다.

 

I. 저자 에임스(William Ames)의 생애와 배경

 

1. 캐임브리지 대학, 크라이스트 칼리지(Christ College in the University of Cambridge)

 

윌리엄 에임스(William Ames)는 1576년 영국 서포크에 있는 입스위치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 1558-1602)가 도입한 강건파 청교도 운동의 중심지였다. 에임스의 아버지는 청교도에 동조적인 부유한 상인이었고, 어머니 조안 스넬링의 친척은 뉴잉글랜드에서 플리머스 식민지(Plymouth Colony, 1620-1691 Massachusetts) 건설에 공헌한 가정이었다. 그의 어린시절에 부모가 죽었기 때문에 그는 청교도인 외삼촌 로버트 스넬링의 집에서 양육 받았다. 

그 어린 시절부터 그 시대와 지역의 활력적인 청교도 운동에 발을 딛고 살았다. 외삼촌은 그를 1593년에 케임브리지대학의 크라이스트 칼리지에 입학시켰다. 에임스는 보다 높은 수준의 교육을 위해 자연적으로 옥스퍼드대학 대신에, 당시 청교도 학문의 중심지였던 케임브리지대학을 선택하였다. 

이 대학은 청교도 지도자들인 토머스 카트라이트(Thomas Cartwright, 1535-1594),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 1558-1602), 존 프레스톤(John Preston, 1587-1628)과 같은 대가들이 설교와 가르침에 의해 주도되었던 학교였다. 이 학교는 순수한 청교도 운동과 라무스(Petrus Ramus, 1515-1572, 프랑스 논리학자, 자연학자 인문주의자)의 철학으로 유명했다. 

에임스는 완벽한 학문의 자질을 가졌고, 1601년 문학석사학위를 취득한 후 크라이스트 칼리지의 특별연구원으로 임명되었다. 목사안수를 받고 ‘경험적 청교도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윌리암 퍼킨스의 감동적인 설교를 듣고 극적으로 회심을 체험했다. 그의 깊은 영적 변화는 크라이스트 칼리지의 도덕적 나침반과 양심이 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목회자 필독서로 학문적 외 일반성도 학생의 유용한 개론서

신학적 점검 목록 이상, 신앙적 깊이 갖고 응답해주는 저서

 

 

2. 청교도로서 케임브리지에서의 역할

 

청교도 교수로서 에임스는 늘 학생들에게 죄에 대해 경고했고, 그들로 하여금 더 깊은 신앙과 경건을 갖게 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의무감에서 자신을 에스겔의 파수군(겔33장)과 같은 사람으로 여겼다. 그러나 이 역할은 오래가지 못했다. 1604년 제임스 1세(James Charles Stuart, James VI of Scotland, 1566-1625)의 관용령에 대응하여 개최된 햄프턴 궁전 회담(Hampton Court Palace)으로 영국 국교회를 비판하는 대학들의 청교도 활동이 억압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케임브리지대학의 청교도 일파는 엘리자베스 여왕(1533-1603)의 종교적 타협에 대해 격렬한 반대를 계속했다. 여왕의 칙령에 대한 이런 반발로 인해, 청교도 대변자들은 곧 직위를 박탈당하고 해고되었다.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청교도운동을 매우 싫어한 케리(Carey)는 에임스보다 훨씬 낮은 지위에 있었으나 그가 먼저 학장이 되었다. 

에임스가 영국 국교회를 비난하고 성의 착용을 거절하자 국교회의 반감은 더욱 고조되었다. 1609년 에임스가 도박을 비판한 설교를 한 후에 대학 당국은 그를 구금하고 직위를 중지시켰다.

 

3. 네덜란드에서 역할과 책의 발간 요인

 

1610년 에임스는 영국을 떠나 화란의 학교와 교회가 갖고 있는 더 자유로운 풍토를 찾아보기로 결심했다. 에임스는 먼저 로테르담으로 가서 라이덴(Leiden)에서 회중교회를 섬기고 있던 청교도 분리주의자 존 로빈슨(John Robinson) 목사를 만났다. 로빈슨 목사를 지지하던 호레시오 베레 대령을 통해 헤이그에 주둔한 영국군의 군목으로 선임되었다. 여기서 그는 교회를 위기에 빠뜨릴 알미니우스에 반대하는 많은 글들을 쓰기 시작했다. 

네덜란드에서는 알미니안주의로 인한 위기 때문에 도르드레흐트(Dort, Dordrecht)에서 국제총회가 개최되었다(1618-1619). 알미니안주의와의 싸움에서 드러난 문제점에 대처할 전문적인 실력을 갖고 있었던 에임스는 영국인으로서 의결권이 없었지만 의장인 요한네스 보게르만의 신학고문 겸 비서로 도르트 총회에 참가했다. 

도르트 총회의 회원들은 알미니안주의들이 제시한 다섯 가지 요점에 대해 역사적인 칼빈주의 입장을 지지했고 에임스에게는 이것이 큰 기쁨이었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도르트 총회가 개최된 후로 3년 동안 그는 개인교수와 가정교사로 대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잠시 개인적으로 가정대학(House Collegge)을 운영하기도 했다. 신학생들은 에임스의 집에서 살았고, 그는 그들에게 청교도 운동과 페트루스 라무스의 논리학에 입각한 신학을 가르쳤다. 에임스는 나중에 하우스칼리지에서 강의했던 내용들을 그의 저술로 연결시켰는데, 이때 했던 강의의 일부가 바로 유명한 “신학의 정수”의 모체가 되었다.

younsuklee@hotmail.com

10.24.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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