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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김형식(1895-1982)

김형식은 1895년 12월 24일 경기도 삭녕에서 출생했다. 1911년에 송도 한영학교를 졸업한 후 평양 숭실 중학과 서울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1920년 3월에 일본 고베의 명문 칸사이 학원 신학과에서 기독교 교육을 전공하고 졸업하였다. 

김형식은 학업을 하는 틈틈이 전도사역에 종사하여 1914년에 전도사 직첩을 받았고, 칸사이 학원 신학부를 졸업한 지 2개월이 되던 1920년 5월부터 춘천지방 양양구역에서 전도사로 시무하다가 9월 연회에서 오지 C. 밍글도르프(민걸도) 선교사와 함께 춘천구역으로 파송 받았다. 그가 춘천교회 전도사로 시무할 때 설교한 ‘봉사의 정신’에서 그의 목회관을 읽는다: “이 복잡한 세계에서 평화를 담보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가르쳐주신 봉사의 정신이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자기의 마음으로 하는 신자는 단체와 사회와 세계에 그리스도를 제공해야 한다.” 

철원에서 목회하던 김형식은 1922년에 도미한다. 1925년 켄터키주 오웬스보로에 있는 켄터키 웨스레이안 대학에서 학사학위를 받았으며, 그해 10월에 테네시주 내쉬빌에 있는 스카릿 대학에 입학하고 “가정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이라는 62쪽의 논문을 제출하고 1927년에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는 귀국하여 서울에서 감리교 목사로 목회하였다.

 

1927년 석사학위 취득 후 귀국, 1934년 호놀룰루 한인기독교회 부임

경제공황 중 성전건축, 1945년 나성한인기독교회 설립 담임목사 사역

 

 

호놀룰루 한인기독교회

 

1934년 6월 1일에 김형식이 그의 부인과 3남매를 데리고 호놀룰루에 도착했고, 그달에 호놀룰루 한인기독교회에 부임했다. 부임 후 첫 교회 행사는 이승만 부부의 환영식이었다. 1935년 1월 24일, 이승만이 아내 프란체스카 도너와 함께 하와이에 도착했고, 이튿날 약 900명의 동포가 그들을 위한 성대한 환영식을 마련했다. 이후 한인 기독학원 기숙사에 거주하면서 이승만은 교장직을, 그의 부인은 사감직을 맡았다.

김형식의 두 번째 사역은 교회당 건축이었다. 이승만의 귀국으로 건축 모금은 탄력을 받아 특별건축기금 위원으로 양유찬과 호놀룰루 센트럴유니온교회 부목사 J. 레슬리 던스탄을, 공동이사로 체스터 리빙스톤과 김윤배를 선정하고 미국인 친지에게까지 모금을 확대했고, 외국인이 기부한 금액만 총 7,600달러였다. 1936년 3월에 릴리하 스트리트에 위치한 1.4에이커인 약 1,800평의 기지를 하와이 천주교단으로부터 구매했다.

1936년 교회 직원으로 이종관 목사가 퇴역(은퇴) 목사였고, 전도사에 조석진, 집사에 이재연과 차신호, 그리고 여집사에 윤세라, 안득은과 안숙자가 있었다. 청년 면려회 회장에 남월터, 소년 면려회 회장에 김해리였다. 그리고 재무부에 여러 직원이 있었는데 부장에 손창희, 서기에 문인화, 회계에 박주범 그리고 위원에 황원태, 최H.E. 심제임스, 공영복, 공C.S., 그리고 박N.S.였다. 그해 10월에는 10시 30분 영어예배와 11시 15분 한어예배 등 두 번의 오전예배가 있었는데 이승만이 영어예배에서, 김형식은 한어 예배에서 설교했다. 주일 저녁예배는 7시 30분에 있었고, 대부분 노인이 참석했다. 수요일 저녁예배는 7시 30분에 있었다. 성가대 지휘자는 남패니였는데 매주 목요일 저녁에 연습했다. 그리고 주일학교가 있었다. 그 외 집회로는 청년면려회가 저녁 6시 30분에 모여 ‘삶을 귀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주제를 놓고 토론했다. 유년군(Boy Scout Troop)이 있었다. 유년군 19는 유일한 한인 보이스카웃으로 김학성의 지도로 매주 목요일 저녁 7시 30분에 본 예배당에서 모였다. 1919년에 조직되었다가 1935년에 폐단했는데 1936년에 다시 조직하였다. 교회창립 18주년 기념행사가 1936년 12월 20일에 있었다. 교회 마당에 1,000여 명이 들어갈 수 있는 텐트를 친 가운데 300여 명의 주일학교 학생들의 성탄 캐럴 합창과 19 유년군의 묘기 등이 있었고, 그날 점심은 부인보조회가 준비했다.

1937년 새해를 맞아 몇 가지 중요한 행사가 있었다. 교회가 운영하는 신흥 국어학교는 그해 6월에 10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는데 이 졸업식에서 장기대회도 있었다. 

같은 달 교인들이 리리하 스트리트의 새 교회부지의 잡초를 제거했고, 10월 3일 개천절에 시티 밀 건축회사가 김찬제가 사진을 보고 설계한 대로 6개월 동안 종탑이나 십자가 대신 광화문 문루를 세운 서양식 건물을 건축했다. 건축위원장 양유찬과 건축 수전 위원 김국경에게 박수를 칠만 했다. 1938년 4월 24일에 예배당 봉헌식이 있었다. 미국인 친지가  13,245달러를 헌금했고, 한인 교인들과 한인 친지가 17,577달러를 헌금하였는데 총건축비는 약 41,000달러였다. 세계적인 경제공황임에도 교회의 숙원사업이었던 성전건축을 완성하였으니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었다. 봉헌식 순서지에서 당시 교회의 형편을 엿볼 수 있다. 주일학교 교장은 이매리였고, 찬양대 지휘자 남패니가 약 50명의 찬양대를 이끌었고, 풍금 주악인은 이대시였다. 15명의 교사가 200명 이상의 주일학교 학생들을 가르쳤다. 소년 찬양대와 부인 보조회, 청년 면려회, 소년 면려회, 상애 보조회, 걸스카웃 등의 단체가 있었다. 그리고 신흥국어학교는 교장에 김영기였으며 9명의 교사가 225명을 가르쳤고, 카이무키 국어학교에는 교사 1명이 30명의 학생을 지도했다. 

1938년 4월 24일에 새 교회당 헌당식을 마치고 이어서 29일까지 연회가 있었다. 김형식은 한인 선교부 이사원의 서기였다. 당시 보고된 호항 한인기독교회 교세는 어른 세례교인이 455명이었으며, 유아 세례자가 480명, 주일학교 학생이 250명이었다. 그리고 두 개의 국어학교에 등록한 학생이 50명이었고, 지난 1년 경비가 1,956달러 28센트였다. 그리고 주일학교 교장에 이메리였다. 매해 두 번 야외예배가 있었는데 1938년 9월 야외예배는 와이키키 공원에서 있었다. 그리고 와히아와 교회와 합동 야외예배가 매년 1번 있었는데 할레이바 해변 공원에서 있었다.

1939년 교회 직원은 담임목사 김형식 이외에도 안현경과 정운서가 전도사로 시무했다. 그리고 부사에 차신호와 김학성, 탁사에 이원순, 양유찬, 강영복, 이재연, 재무에 문인화, 황원태, 박주범, 집사에 백인숙, 조매륜, 윤세하, 안숙자, 심영신 그리고 안득은이었다. 주일학교 학감에 이메리와 이동빈이었으며, 기독학원 홈장에 이매리였고, 신흥국어학교 교장에 김영기였다. 이해 김형식은 이종관, 문인화, 백인숙 그리고 김유실과 더불어 한인선교부 연회에 참석했다. 이 연회에서 그는 박동완과 장 붕과 더불어 한인 선교부 장정 수정위원으로 선임되었고, 1년 임기의 이사로 선출되었다.

1939년 1월 한인상조회 운영이 난관에 부딪혀 교회가 한인양로원을 운영하게 되었다. 손노디가 홈장이 되어 10년간 수고했다. 매해 회원수가 감소하였지만, 회원들이 매달 25센트를 내고 이 금액으로 회원이 사망하면 장례를 치렀다. 그해 부활절에 김형식이 오상호와 권성재 등 성인 두 명과 박해리 등 아동 22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해 5월에는 신흥국어학교 정원에서 유년군 설립기념식이 있었다. 그해 교회 재정은 9,800달러였다. 7,000달러 이상의 건축 빚을 갚기 위해 상애 보조회 회원들이 경품권을 팔아 1,000여 달러의 기금을 모았고, 부인회는 1939년 7월에 신흥국어학교에서 연극과 박마타 양의 무용공연으로 기금을 모금하기도 하였다. 그해 9월에는 한인 선교부를 대표하여 김형식이 하와이 섬, 마우이 섬, 라나이 섬, 몰로카이 섬을 심방하고 동포를 돌아보았다. 심방을 받은 동포들이 호황 총교회에서 부채로 인하여 고생한다는 말을 듣고 호항교회 건축기금으로 총 668달러 75센트를 헌금했다. 2개월 후 11월에 한인기독교회, 기독학원, 동지회 등 세 단체 고문부가 조직되었다. 이듬해 1월에 하와이 재무국에 등록된 서류에 따르면 한인 선교부 대표로 김형식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는 서기였다. 그 외에 회장 이승만, 재무 이원순 그리고 손노디, 황원태, 강영B, 최숭대가 있었다. 

1940년 교회 직원에는 휴직 목사로 이종관과 김이제가 있었고, 전도사로 손승운과 안득은이 있었다. 기타 직원으로는 주일학교와 영어예배 교장에 이동빈 목사, 부사에 김학성과 김노디, 탁사에 이원순, 강영복, 양유찬, 이재연과 문인화, 재무에 최성대, 박주범과 손승운, 집사에 안숙자, 안득은, 윤세라, 백인숙, 심영신, 조매륜, 전영족, 김유실, 이복수, 민함나, 정순이, 이영옥, 양로원장에 김노디, 국어학교 교장에 김영기, 부인 보조회 회장에 조매륜, 상애보조회 회장에 송메리였다. 그리고 평신도회 회장에 김광재, 본 회 서기에 김유실이었다. 김형식은 1940년 한인 선교부 연회에 이원순, 손승운, 김유섭, 민함나와 함께 참석했다. 그는 이 연회에서 제1 부이사장으로 선임됐다. 

그런데 1940년 1월에 김형식이 사임서를 제출했고, 후임목사가 오던 그해 6월 5일에 사임하였다. 아래의 1940년 통계를 통해 그의 마지막 목회 현황을 엿볼 수 있다. 임원이 26명, 신도가 918명, 주일학교 학생이 215명, 청년 면려회 회원이 70명, 소년 면려회 회원이 30명, 영어예배 참석자가 70명, 소년군이 60명, 국어학교 학생이 140명, 유아 세례자가 38명, 소천하신 분이 8명, 양로원 거주자가 16명이었다. 그리고 지난 1년 재정이 9,492달러였고, 토지와 건물 싯가가 63,500달러였으며, 교회 부채가 6,690달러였다. 김형식은 1940년에 미국 남가주 나성으로 이주함으로써 그의 사역은 7년간이었다.

 

나성 한인기독교회

 

1940년에 나성으로 이주한 김형식은 김중수 목사가 목회하는 대한인기독교회에 출석했다. 그런데 그가 출석한 지 3년이 되던 1943년에 위의 교회에 내분이 일어나 교인 중 일부가 동지회 사무실에서 ‘한인기독교회’를 창립했고, 2년 뒤인 1945년에 1142 36th 스트릿트에 있는 주택을 빌려 예배를 드렸는데 1947년 12월에 본 교회가 ‘나성 한인기독교회’ 창립 선포문을 발표하고, 김형식이 본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고 백란관, 백인명, 송 철 등 30여 명이 모여서 예배를 드렸다. 1968년 한인기독교회 연회록에 따르면 본 교회는 나성교회 기지를 방매한 값에 유지들의 특연을 받아 10만 달러 예산으로 이승만 박사 기념교회 건물을 신축할 작정이라고 김형식이 보고했다. 이 프로젝트를 위하여 하와이에서도 모금했다.  

은퇴한 김형식은 1982년 4월 28일에 향년 87세로 미국 남가주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damien.sohn@gmail.com

10.10.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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