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청교도 신앙 회복 및 부흥(復興)”(19)

5. 미국 청교도 신앙 회복(回復)과 부흥(復興, Revival)

 

청교도 사상(Puritanism)은 미국 사상의 주류(主流)에서 중요한 위치(位置)를 차지하고 있다. 그것은 서부의 프론티어(Frontier, 개척)정신, 프래그머티즘(Pragmatism, 실용주의)과 더불어 미국의 3대 사상(思想)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청교도 사상은 단일(單一) 정신 또는 사상 체계(體系)로서는 가장 오래 유지(維持)되었고, 미국 역사 문화(文化) 형성(形成)에 가장 큰 영향(影響)을 미쳤다.

 

1)미국의 뿌리, “청교도 정신으로 돌아가자”(Let’s return to the Puritan spirit) 

1620년 메이플라워(May Flower)호를 타고 온 미국 이민 1세대인 청교도 102명에 대하여 후세 사람들은 “필그림 파더스(Pilgrim Fathers)” 라고 부른다. 이 필그림 파더스가 바로 오늘의 미국을 있게 한 선조(先祖)들이다.

또한 뉴잉글랜드(New England)의 청교도 운동을 주도(主導)한 청교도 지도자들은 경건한 새 사회를 이룩하기 위하여 시민권(巿民權) 부여와 이민(移民)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기독교(基督敎) 신자에게만 제한(制限)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헌장(憲章)에서 청교도 이주의 목적(目的)을 ‘하나님의 영광(榮光)과 교회의 선(善)을 위함’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성도의 자격으로 도덕적 무흠(無欠), 신앙의 고백(告白), 회심 체험(體驗)을 요구하였고, 그들에게 참정권(參政權)을 주어 다스리게 함으로써 거룩한 공동체(共同體)를 이룩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초기 뉴잉글랜드는 진정한 성경(聖經) 말씀대로 다스려지는 죄가 없는 경건한 사회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 영국의 제임스 2세(James Ⅱ)는 뉴잉글랜드의 자치(自治) 정부를 부정(否定)하고 신대륙에 대한 지배권(支配權)을 강화하기 위해 총독(總督)을 파송한다. 

1688년 영국에서 명예혁명(名譽革命, Glorious Revolution)이 일어나자 보스턴 사람들은 제임스 2세가 파송한 총독 엔드로스(Andros)를 체포하고 영국으로부터의 독립(獨立)을 거론하는 등 혁명적(革命的) 분위기가 고조(高調)되었다. 1691년 인크리스 메더(Increase Mather; 1639-1723)가 매사추세츠에 대한 새로운 면허장(免許狀)을 얻어 귀국(歸國)하였다. 그는 면허의 조건(條件)으로 뉴잉글랜드가 종교적인 관용寬容)을 허락하고 참정권을 모든 시민으로 확대(擴大)할 것이며 왕이 임명한 총독을 받아들인다는데 동의(同意)하였다. 

인크리스의 동의는 뉴잉글랜드를 프랑스나 독일 등의 침략(侵略)으로부터 보호(保護)하기 위한 방편(方便)이었지만 반세기가 넘게 청교도들이 자치적(自治的)으로 운영해오던 정치형태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화를 허락함으로서 정통적인 신앙에 기초하여 성도들이 다스리는 “언덕 위의 도시”(city on the hill)를 세우겠다는 청교도의 건국(建國)이념을 포기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영국정부(Government of the United Kingdom)의 개입(介入)으로 타종교에 대한 관용과 함께 종교적 다원화(多元化) 시대가 열리면서 타 종교인과 이교도(異敎徒)들의 유입으로 말미암아 신앙의 열도(熱度)가 점점 떨어지고 회심(悔心)을 체험한 성도의 수가 줄어드는 현상이 나타났다. 특히 이민 2세대로 넘어가면서 교회에는 출석하나 형식적(形式的)인 신앙을 지닌 종교적 신자들이 늘어났다. 외식하는 자들이 많아지면서 성경에 기초한 경건한 국가를 세우려는 청교도의 꿈(dream)은 식어갔다. 

17세기 뉴잉글랜드에 발을 디딘 모든 영국인들이 참된 신자가 아니었고, 또한 소위 “뉴잉글랜드 방식”(The New England Way)으로 알려진 바의 모든 면들을 반드시 지지하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이와 같이 뉴잉글랜드에서 1734년 제1차 대각성 운동이 일어날 시대적 종교상황은 아메리카 신정(神政) 정치라 불리던 청교도 제1세대들의 실험은 100년도 채 안되어 완전(?) 종말(終末)을 고하던 때였다. 이렇듯 완전무결한 청교도 정신으로 온전한 신대륙 건설을 강조했던 세계관(世界觀)은 이제 과거(過去)의 일이 되었다. 이민 1세대의 청교도 신앙을 다시 회복하자는 부흥 운동이 18세기 초반 코튼 메더(Cotton Mather) 목사를 비롯한 청교도들 중심으로 일어났다.

그리고 1734년과 1735년 사이에 청교도 정신으로 충만했던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 목사를 중심으로 노스햄턴에서 일어난 제1차 각성운동과 1741년 이후 에드워즈와 영국성공회 목사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그리고 장로교 목사인 길버트 테넌트(Gilbert Tennent, 1703-1764)가(家)의 목사들과 연합을 통해 몇 해 동안 계속된 대각성 부흥운동을 통해 결실(結實)을 맺었다.

 

2)대각성 운동의 시발점(始發點) 테오도르 프렐링후이젠(Theodorus Frelinghuysen, 1691-1747) 

정준기에 의하면, “이 대각성 운동의 시발점은 사실 1720년부터였고 그 대각성의 부흥의 불 을 지피고 그 불을 지속(持續)시키는데 큰 역할(役割)을 감당한 인물이 바로 네덜란드 출신 테오도르 프렐링후이젠 선교사”로 본다. 조엘 비키(Joel R. Beeke)와 필자 역시 이에 적극 동의 한다. 

청교도 제1차 대각성운동의 시발점으로서의 그의 역할(役割)과 공헌(貢獻), 특히 “청교도들을 미국에 보내주신 하나님의 뜻은 세계선교((世界宣敎)를 위한 것이다.” 즉, 선교적(宣敎的) 목회를 프렐링후이젠은 주장(主張)했다. 그는 휫필드나 에드워즈처럼 성령의 조명(照明)과 내주를 체험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네덜란드 개혁파 개신교도들은 뉴저지의 라리탄(Raritan) 강변을 개척하면서 독자적으로 신앙생활을 해오고 있었다. 1720년 암스테르담의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성경 말씀에 충실(充實)하고 선교 열이 있는 프렐링후이젠 목사를 뉴저지에 네덜란드인을 위한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필그림 파더스 이후 대각성 운동으로 교파초월 신앙 불붙여

독립전쟁 이후 유니테리언교회 되며 미국청교도운동 막 내려 

 

프렐링후이젠 목사는 신앙을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영접(迎接)한 뛰어난 설교가였고, 삶 속에서 경건한 신앙을 실천(實踐)이 있는 자였다. 그는 신학적으로 칼빈파 개혁주의자였지만 독일경건주의에도 깊은 조예(造詣)가 있다. 그는 경건주의의 열정과 그리스도를 닮아가려는 윤리적 생활강령(綱領)을 실천함으로서 신앙의 깊은 체험(體驗)을 해보지 못한 뉴저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신앙의 회심 경험을 강조하였다. 심지어 조나단 에드워즈의 주장처럼 그리스도를 영적(靈的)으로 만나 보지 못한 자는 집사, 장로들이라 할지라도 성찬(聖餐)에 참여 할 수 없다는 폭탄 같은 선언(宣言)도 감행했다. 신자(信者)의 생활은 종교적 임무(任務)를 수행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 분을 경배(敬拜)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교회는 급진적(急進的)으로 부흥을 맛보며 성도들의 수가 증가하였다. 

프렐링후이젠의 열매 맺는 목회(牧會)를 본 이웃 교회들은 그를 초빙(招聘)하기 시작했다. 넓은 미국 대륙을 순회(巡廻) 전도자 자격으로 돌면서 그는 신앙 회심(悔心)의 중요성과 신앙의 열매인 경건(敬虔)한 삶을 강조(強調)했다. 

칼빈파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교회들은 프렐링후이젠의 부흥(復興) 사역에 동참(同參)하기 시작했다. 장로교회, 회중 교회, 네덜란드 개혁파 교회가 교단(敎團)이나 교파(敎派)를 초월(超越)하여 동역하였다. 이렇게 교단과 교파를 초월하여 연합을 통한 청교도 대각성 부흥운동은 수십만 명이 회심 체험을 하였고,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의 말처럼 뉴잉글랜드에 하나님나라(kingdom of God)가 임한 것 같은 충만한 분위기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대각성 운동이후 신대륙의 화두(話頭)는 독립전쟁(獨立戰爭)에 관한 것이었는데 찰스 조운시(Charles Chauncy)와 조나단 메이휴(Jonatana Mayhew)와 같은 진보주의(Progressivism)자들은 미국인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독립전쟁에 참여(參與)할 것을 주장한 반면, 1758년 에드워즈가 죽은 뒤 그를 이어 미국 청교도를 이끌어오던 보수주의(保守主義)자들은 소극적(消極的) 입장을 취하였다. 

그 결과 독립전쟁 후 많은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거나 진보주의자 편에 가담(加擔)하였고, 청교도들이 세운 교회는 삼위일체(三位一體) 교리를 부정(否定)하는 유니테리언(Unitarian)교회로 문패(門牌)를 갈아 달면서 미국 청교도 운동은 막을 내리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나단 에드워즈를 중심한 청교도 신앙회복 대각성운동 이후 약 280년 동안 미국의 청교도들은 중부지역 복음주의(福音主義) 백인(白人)들을 중심으로 한 바이블 벨트(Bible Belt) 즉, 하나님 절대주권(Absolute sovereignty)의 청교도 정신의 역사(歷史)와 문화(文化), 그리고 삶을 지배(支配)하며, 그 명맥(命脈)을 유지(維持)하고 있다. 

현재,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화로 말미암아 많이 희석(稀釋), 세속화(世俗化) 되었지만 아직도 청교도(淸敎徒, Puritans) 정신은 미국(United States) 국민 전체(全體)의 문화와 전통(傳統)으로 표출(表出)되며 자리하고 있다.

kimjoyh@hotmail.com

09.19.2020

Leave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