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청교도들은 성경적 경건한 의무(Godly Duty)와 자기 부정(Self-Denial)에 충실한 자들이었다.
(2)자기 부정(自己否定, Self-Denial)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자기(自己)를 부정(否定)하고 십자가(十字架)를 지는 삶이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核心)이며, 기독교적 경건의 결정체(結晶體)이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이 세상의 성공(成功)과 안락(安樂)과 평안(平安)함만을 추구(追求)하고 있지 않는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토마스 맨튼(Thomas Manton, 1620-1677)은 그의 대표적 저서 ‘자기부정(Self-Denial)’에서, 우리는 아무런 공로(功勞) 없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恩惠)로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子女)가 되고 구원(救援)을 받는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주권(主權)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값없이 받지만, 구원(救援)받은 성도(聖徒)의 삶은 자기부정(自己否定)과 십자가(十字架)가 따르는 삶이다. 그것은 바로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사는 삶(갈2:20)이며, 나의 영광(榮光)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삶이라고 했다. 이렇게 청교도들은 복음을 위해 이 땅에서의 평안하고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자기를 부정하고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았다.
존 카튼(John Cotton, 1582-1652)은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이 주님의 것이다”라고 일깨워 주었다. “우리 도시와 마을과 우리 집도 주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모든 것에서 주님을 인정(認定)하자.” 자신을 위해 “지혜, 부, 존경, 쾌락”을 얻고자 노력하며, 이런 것들을 “우리의 소망과 바람들의 으뜸”으로 삼는 것은 분명히 우리의 노력(努力)과 행복(幸福) 모두가 궁극적(窮極的)인 상실(喪失)로 끝날 것이라고 전했다.
또한 카튼 매더(Cotton Mather, 1663-1728)는 자기증대(自己增大)를 구하는 “개인 정신(Private Spirit)은 많은 책망(責望)을 받아야 하는 악(惡)”이라고 칭했다. 1690년에 매더는 “아아 불쌍한 개인 정신이여, 이 개인 정신은 우리와 마주치는 다른 모든 악한 것들보다 우리나라에게 더 음침한 국면을 갖고 있다”라고 한탄했다.
심지어 매더가 개인 정신이라고 언급한 바를 토마스 후커(Thomas Hooker, 1586-1647)는 “자기 사랑이라는 배신죄(背信罪)”라고 칭했다. 자기 사랑의 태도는 마귀의…, 대표적인 작품이며 마귀가 항상 그 위에 자신의 왕국(王國)을 세운 근본적(根本的)인 대설계도(大設計圖)가 된다.
후커에 의하면 자기 사랑과 대조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근본이며 실로 모든 신학(神學)의 대설계도는 “자기 부인”(Self-Denial)이다. 청교도들이 철저하게 자신들의 의무(義務)로 삼았던 것들은 성수주일, 예배, 기도, 찬양, 선행…, 특히 마귀(魔鬼)의 대설계도인 개인 정신, “자기 사랑이라는 배신 죄”를 추종(追從)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대설계도(大設計圖)인 자기 부인의 진정하고 경건한 거룩한 삶을 청교도들은 추구(追求)했다.
복음위해 이 땅에서 안락한 삶 포기하고 십자가 지는 삶 살아
설교방향: ①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전파 ②말씀의 강력한 적용
3)청교도들은 성경의 진리를 연구(Research)와 삶(Life)으로 설교(說敎)한 자들이었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紳士的)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詳考)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행17:11-12).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는 “청교도들은 빛 가운데 불타오르는 그러한 빛의 사람들이었다. 검은 성 바돌로뮤의 날(1572년 8월 24일부터 10월까지 위그노 전쟁 중이었던 프랑스 파리에서 가톨릭 세력이 개신교 신자였던 위그노인들에게 행한 대학살. 그 이유는 학살이 시작된 8월 24일 밤이 가톨릭에서 예수의 12사도였던 바돌로뮤의 축일에서 유래)의 조치(措置)에 의해 쫓겨나 대로와 울타리와 헛간과 들에서 조차 설교할 권리를 박탈(剝奪) 당했을 때, 그들은 여전히 말씀의 권위(權威)를 가진 사람들로서 특별한 방식으로 글을 쓰고 설교했다.”
청교도들은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배워서 성경 본문의 바른 의미(意味)를 알고자 하였으며 성경의 본문을 올바르게 해석(解釋)하고자 노력하였고 찾은 진리(眞理)를 인간의 제도(制度)나 사상(思想)을 따라 구부리지 아니하고 하나님 편에 서서 바른 설교를 하고자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예전(例典)이나 의식(儀式)보다는 설교(說敎)를 중요(重要)시하여 예전을 중시하던 미신적인 가톨릭의 전통(傳統)을 배제(排除)하고 말씀을 통한 생활의 변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예배(禮拜) 시간은 설교(說敎) 시간과 같은 의미로 사용될 정도로 설교, 즉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듣는 것을 중요시하였다.
청교도들은 지성(知性)과 마음을 서로 상충(相衝)하는 것으로 여기는 구조(構造)를 거부하고, 지식(知識)은 성령(Holy Spirit)이 중생(重生)의 씨앗을 심는 토양(土壤)이라고 가르쳤다. 그들은 지성(知性)을 신앙(信仰)이 머무는 전당(殿堂)으로 이해했다. 카튼 매더는 “무지함은 경건의 어머니가 아니라 이단의 어머니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청교도들은 지성(知性)이 없는 기독교는 뼈가 없는 연체동물(軟體動物)과 같다고 생각했다. 반지성적(反知性的)인 복음은 빠른 속도로 “필요성을 느끼는 것”을 채우는 것 이상으로 나아갈 수 없는 텅 빈 혹은 형태(形態) 없는 복음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 이는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리차드 벡스터(Richard Baxter, 1615-1691)는 “나는 다시 설교하지 못하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설교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을 삶과 죽음 사이에 있는 자로 간주하여 마치 저 세상에 다녀온 사람처럼 저 세상에 대하여 말하였다. 그가 생명(生命)을 담보(擔保)로 삼고 설교할 때 2,000명에서 3,000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운집하여 협소한 장소 때문에 수백 명이 돌아가야 할 정도였다.
청교도 목회자들은 강단(講壇) 위에서 할 설교를 위하여 성경을 철저히 연구(硏究)했고, 또한 그들은 마지막 설교(說敎)인 것처럼 선포했다. 그러므로 교회(敎會)가 성경의 권위(權威) 아래 있게 했을 뿐만 아니라 성경의 진리(眞理)를 드러내는 설교(說敎)의 권위(權威)를 되찾게 되었다.
그들은 설교(說敎)를 공예배의 절정(絕頂)으로 간주했다. 즉 “성령의 권능에 의해서 수반되는 말씀 선포와 그 말씀으로부터 오는 교훈을 구원과 성화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권능의 중요한 수단으로 여겼다.” 이와 같이 청교도들은 철저하게 성령을 의지하여 성경의 진리를 설교함으로서 인생의 제일 되는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임을 강조하고, 의지하고 바라보아야 하는 유일한 대상이 그리스도임을 제시했다.
또한 신앙인(信仰人)의 삶의 방향(方向)이 경건(敬虔)과 거룩임을 일깨웠고, 철저한 직업(職業) 소명의식(召命儀式)을 가졌다. 하나님을 경외(敬畏)하는 건전한 가정생활(家政生活)은 세상의 쾌락(快樂)과 사치(奢侈)로부터 돌아서게 했다. 16-17세기 주의 몸 된 교회의 신실한 종이었던 퍼킨스(William Perkins)와 에임스(William Ames)의 설교론(說敎論)은 오늘 21세기 목회자와 설교자들에게 귀한 교훈(敎訓)과 경종(警鐘)을 준다.
특히 퍼킨스는 당시 어려운 영적 상황을 직시하며 경건의 삶이 없는 설교자들을 질타한다. “오늘날 회심자가 적은 이유는 자기 자신과도 화목하지 않은 하나님께 다른 사람들을 화목 시키고자 하는 목사들을 하나님이 싫어하시기 때문이다.”
그들의 설교방향은 두 가지로 요약(要約)할 수 있는데, 첫째는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의 전파(傳播)이며, 둘째는 그 말씀의 강력(強力)한 적용(適用)이다.
교회사를 통해서 볼 때 교회의 타락(墮落)은 설교(說敎)의 타락(墮落)에서 출발(出發)한다. 그러므로 설교자의 지식, 학문은 숨겨져야 하고 오직 성령의 역사만이 설교에서 드러나야 한다. 왜냐하면 설교자가 전달하는 말은 인간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설교자의 사역을 생명력 있게 하는 것은 그 설교자 안에서 그리고 그 곁에서 역사하시는 오직 성령 하나님의 나타나심이다.
청교도주의(淸敎徒主義, Puritanism)를 부흥운동, 각성운동, 설교운동으로 평가하게 되는 것은 근저(根柢)에 성경운동(聖經運動)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청교도들에게 있어 설교(說敎)는 참으로 중요했다. 설교자가 성경의 진리대로 먼저 삶을 살았고, 교인들 역시 그 설교자(說敎者)의 삶을 모델(model)로 순종(順從)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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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5.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