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목은 1898년에 평양의 김시장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평양 숭의여학교를 나와 여자성경학교를 졸업한 후 김익두 목사를 도와 교회를 섬겼다. 그녀는 1916년에 이선두와 평양에서 결혼했고, 1922년에 남편 이선두가 미국 유학길에 올랐으나 한국에 머물렀다.
이화목은 일찍이 조선여자외국전도회 회장을 역임했고, 오랫동안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전도사로 재직했다. 세 딸을 두었는데 두 딸은 일찍 세상을 이별했으므로 그녀는 딸 일경(케이)을 데리고 41세가 되던 1939년 7월 5일에 천간환 선편으로 미국 나성 남쪽 산페드로 항구로 도미했다.
이화목은 미국에 와서 남편 성을 받아 만든 두 번째 이름이다. 그녀의 원래 이름은 김화목이었다. 그녀가 도미한 지 나흘이 되던 1939년 7월 9일에 이화목을 위한 환영회가 나성한인장로교회에서 있었고, “재미로운 순서를 거행하였다.” 당시 본 교회 담임목사는 1937년 2월 16일에 한국에서 나성한인장로교회로 부임한 김성락이었다.
이화목은 도미한 그달 23일 아침 11시 예배에서 설교하였다. 이를 위하여 교회는 “다수 동포가 와서 이치 있는 강설과 고향 소식을 듣기를 바란다”고 신한민보에 광고했다. 그녀가 도미한 이듬해인 1940년의 3월 5일에 당회장 김성락 목사의 제안으로 당회는 본 교회 안에 부인전도회를 설립하기로 가결하였고, 기아나 선교사와 이화목에게 본 교회 부인 집사들과 협동하여 부인전도회를 조직하도록 맡겼다. 그해 5월 29일 오후 8시 30분에 본 교회 주일학교 교실에서 ‘장로교부인전도회’를 결성하고 임원을 선정할 때 이화목이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 외 임원으로는 서기에 김종옥, 회계에 박화순, 고문에 기아나였다. 이날 회비는 매월 25센트로 하고, 입회금은 50센트로 하고, 통상회 기일을 매월 3차 주일로 했다. 본 전도회는 “눈부신 봉사활동”을 하였는데 “예수님 당시의 믿음의 여인들과 같이 어떻게 주님을 따르며 그의 몸 된 교회를 섬길 수 있는가를 서로 의논하고 또 그대로 실행”하였다.
위에 언급한 기아나(奇亞那)는 애나 M. 맥기(Anna M. McKee) 선교사로 1909년에 미국 북장로교 독신 여자선교사로 내한하여 재령과 평양에서 여성사역을 감당하다가 1933년에 은퇴한 후 도미하였고, 나성한인장로교회를 섬기고 있었다.
1940년 9월 1일 주일 하오 8시에 국민총회관 대례당에서 나성지방회 국어학교 하령회 방학식이 있었다. 이날 지방회 교육위원 임치호의 사회로 개회하여 일동이 애국가를 합창한
후 사회자의 취지 진술이 있은 다음에 이화목이 간곡하게 기도하였다. 이후 일반 생도들의 ‘산토끼’ 합창, 김랄프의 연설, 조하벗의 독창, 3반 학생의 ‘밤 한톨’ 시 읽기, 오일순과 박신영의 피아노 병주, 1반 학생의 속담과 합창에 이어 광고순서가 있었다. 2부에서 임혜실의 피아노 독주, 2반 학생의 ‘눈꽃 새’ 합창, 3반 학생의 ‘여호와는 나의 목자’ 시 읽기, 박동원의 독창, 3반 학생의 ‘고추 먹고 맴맴’ 합창 그리고 일동이 교가를 불렀다.
1939년 딸과 함께 도미, 나성한인장로교회 장로로 26년 재직
부인전도회 회장으로 해방된 한국 복음사업과 선교경비 모금
그해 9월 15일 하오 8시 15분 목사실에서 김성락 목사의 사회로 이영기, 전호택, 손승조, 윤병희 등 4인이 출석한 당회에서 이화목을 부인 전도사로 사용하기를 이영기의 동의와 손승조의 재청으로 결정하였다. 이로써 이화목은 부인 전도사에 장로교부인전도회 회장으로 여성사역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1941년 4월에 이화목이 회장인 장로교 부인전도회는 남가주 지역 부인전도회에 가입하고 전국 사업을 협력할 수 있었다. 백인 남가주 부인전도회 총회가 열릴 때 ‘곱기가 꽃 같은 유년 주일 학생들과 본 부인전도회 회장 이화목은 한국 전통 옷을 입고 등단하여 한국의 아름답고 고상한 문화를 자랑하였고, 조종익의 부인 조세핀은 청아한 노래를 독창하여 천여 명의 대표로부터 극찬을 받았다.’
1944년 1월, 이화목은 나성한인장로교회 장로로 선출됨으로 교회 전반에 그의 손길이 뻗쳤다. 또한, 그해 이화목은 여자봉사회 회장에 선출되었다. 그해 3월 12일 주일 오전 11시 예배는 본 여자봉사회 주최로 특별 음악순서를 곁들인 특별예배였다. 그녀는 세계 제2차 대전일 발발한 전시에 특별한 은혜를 받으시기를 바란다는 광고를 신한민보에 냈다.
그해 5월, 나성한인장로교회 장로교 부인전도회 회장 이화목이 경북 대구에서 다년 선교하신 안두화(Edward A. Adams) 선교사가 나성을 방문하는 기회에 그를 강사로 초빙하여 본 전도회 주최로 그달 28일 오후 8시에 나성한인장로교회에서 특별예배를 모인다는 광고를 신한민보에 내고 다수 동포가 참석하기 위하여 저녁에 모이기로 했다고 설명하면서 많은 참석을 권고했다.
그해 9월 17일 주일 오전 11시에 나성한인장로교회에서 김중수 목사 교역 25주년 기념식이 성대하게 있었다. 찬송에 이어 마영준 장로가 기도하고, 성경교독 후 찬송을 불렀고, 헌금한 후 광고가 있었으며, 이헬렌의 피아노 독주 후 윤병구 목사의 설교, 이마리아의 독창, 이병억 장로의 김중수 박사의 약사, 전유선의 기념품 증정 후 이화목의 축사가 있었다. 이후 김중수 박사의 답사, 찬송, 축도로 이어졌다.
1945년 9월, 국내 복음 사업 부흥 운동을 위하여 나성한인장로교회 부인전도회는 한국 해방 시기에 있어서 국내 복음사업 부흥운동에 필요한 경비를 모금했다. 본 전도회 회장 이화목과 서기 김종옥이 이성례와 함께 그달 2일에 딜라노를 방문하였고, 그달 9일에는 중가주 각지 재류 동포를 방문하여 총 약 500여 달러의 의연금을 모금하였다.
그달에 나성한인장로교회 당회는 김성락 목사의 노고를 감사하여 본국에서 6개월간 체류하도록 허락하고 임시 당회장으로 나성노회의 쀼울 목사를 가결하고, 강단은 당회원이 맡기로 하였다. 1946년 2월 당회는 3월 10일 주일오전 예배에 이화목 장로가 설교하기로 하였고, 3월 10일 주일오후 8시에 모이는 특별저녁기도회를 이화목 장로가 인도하기로 결의하였다. 그해 3월 당회는 4월 21일 주일아침 예배에서 이화목 장로가 설교하기로 했다.
1946년 9월 15일 오후 7시 30분에 교회 사교실에서 한국으로 다시 부임하는 옥호열(Horace Volkiel) 선교사 부부의 전별회를 개최하고 우리 민족을 위한 수고에 감사를 드릴 때 이화목이 중심이 되어 장로교 부인전도회가 전별회를 준비했으며, 이듬해 1월 12일에 시내 마얀 호텔에서 메리 스튜웟(Mary Stewart) 부인의 75회 생신잔치를 교회적으로 거행하고, 스튜윗 부인이 우리 한국인들에게 보여준 희생적 사랑에 보답하는 뜻을 표시할 때 이화목이 중심이 된 전도회가 수고하였다.
장로교 부인전도회는 1948년 2월 7일 월례회에서 중국에 잔류하여 해방이 된 고국으로 돌아가는 한인교포와 한인교인들을 돌보고 있던 방지일 선교사에게 위로금으로 100달러를 보내기로 했고, 그해 5월 22일에 가결한 대로 서울 영락교회에서 주관하는 고아원인 보린원의 건축기금으로 1,000달러를 보냈고, 625동란 이후 전쟁미망인을 위한 서울 다비다 모자원에 120달러 상당의 재봉틀 한 대를 기증했다.
1949년 10월 23일 오후 2시에 김성락 목사의 부친 고 김선두 목사 추모예배를 드려 김 목사와 그 가족을 위로하였다. 장로교 부인전도회가 식사 등을 후원했을 것이고, 이화목의 역할이 컸을 것으로 안다.
1953년 10월 11일에 모인 장로교 부인전도회 월례회는 경북 대구 근방의 노곡동 교회에 임종숙 전도사를 파송하여 1년 동안 300불을 후원하였고, 본 교회가 자립하던 1959년까지 전도비를 후원하였다. 1960년에 강경구 여전도사를 영등포 지구 공장에 파송하여 연 500달러를 후원하여 공장 노동자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강 전도사는 동아염직, 대한모직, 대동모방 등을 순회하며 이곳에서 노동하는 여성노동자에게 전도했다.
1958년 2월 1일로 김성락 목사는 사면했다. 그는 30대의 청년 목사로 부임하여 50대의 초로기에 서울 숭실대학 학장으로 가게 되었다. 아마 이화목의 전도사직은 이해로 마쳤으리라 본다. 그렇다면 19년간이 되겠다.
그해 6월 1일 임시 당회장 넬슨 목사의 사회로 차기 ‘목사청빙위원회’를 구성하였는데 이화목은 7인 목사청빙위원회의 한 사람으로 선임되었다. 본 위원회의 천거로 하와이의 와이아와한인교회에서 6년간 목회하던 권희상 목사가 1959년 7월 1일에 본 교회 제3대 목사로 부임하였다. 권 목사는 1944년 연희대학을 졸업하고 도미하여 남가주대학과 상항신학교를 1948년과 1951년에 각각 졸업한 후 1953년 목사안수를 받았다.
이화목은 1960년까지 17년간 장로로 활동하다가 이듬해 한 해 쉬었고, 1962년에 다시 장로로 취임했다.
권희상 목사의 사임 후 1968년 1월 28일에 공동의회를 소집하여 7인 운영위원회를 구성하기로 가결했을 때 이화목은 운영위윈회의 일원이 되었다. 운영위원회의 제안으로 김형일 목사가 임시목사로 부임하였다. 김 목사는 한국교회 초기의 전도자 김영옥 목사의 둘째 손자이며 김은석 목사의 차남으로 샌프란시스코 장로교신학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롱비취 주립대학에서 철학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1968년 2월 운영위원회에서 이화목은 성바울한인교회 김요한 목사의 메시지를 보고하면서 성 바울한인교회의 본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와의 합동 제안을 거론했다. 이에 본 위원회는 합동을 가결하였고, 그해 3월 10일 주일에 첫 합동예배를 드렸다. 이후 두 교회 연석회의는 교회 입적 절차에 따라 ‘장로교 헌장에 따라 4월 21일부터 4주 동안 주일아침 10시부터 11시까지 주일학교를 통해 교인자격을 재교육한 후 세례 받지 않은 사람은 세례식으로 교인이 되고, 이미 세례를 받은 사람은 기립 신앙고백으로 본 교회에 입적’하도록 했다. 이로써 약 30명의 교인이 출석하여 눈에 띄게 교세가 증가했다. 성바울한인교회의 김요한 목사는 교회문제협의와 심방 등을 하기로 하고 월 사례비로 100달러를 드리기로 가결했다. 그런데 16주가 지난 후 성바울교회는 분열되고 말았다.
1969년 11월 당회는 장로 수를 지금까지의 정원수의 거의 배가 되는 12명으로 가결하였고, 이듬해 12인 장로가 선임되었다. 이때 이화목은 당회원으로 시무했다.
1972년 6월 18일에 백리언 목사가 3년간의 목회를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했다. 그해 7월 16일 모인 공동의회에서 이화목은 구두로 장로직의 사의를 표명했다. 이로써 이화목의 장로직은 총 26년간이다. 그해 9월 19일에 우상범이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 임시목사로 부임하였고, 이듬해 1월에 결성한 7인 장로추천위원회에 이화목이 피선되어 그해 2월의 공동의회는 김치은, 문영조, 안정옥, 이대수, 조규환, 차경수 등 6인을 장로로 선임했다. 노회는 이어서 당회장으로 내한선교사 배위량의 손자인 존 S. 베어드 목사를 임명하였다. 이화목은 1997년 향년 99세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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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29.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