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전세계 기독인들은 19세기말에 시작된 한국교회가 급성장하던 모습에 놀랐다. 한국교회 성도들은 1945년 이전까지 일제의 압박을 이겨내도, 그 후 출현한 공산당의 횡포와 전쟁의 아픔 속에서도 다시 일어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하였다. 그 후 고난 속에서 다져진 신앙을 기초로 전국 복음화 불길이 확산되었다.
많은 교회가 새롭게 세워지고 교인들이 넘쳐나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세계선교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어 각 교회마다 선교사들을 파송하고 기도와 물질로 사역에 동참해왔다. 국내외 전문가들은 한국교회가 20세기 이후 전세계 교회를 주도할 것이라고 확신하는 가운데 기대감을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와 한국교회에 큰 변화가 생겨났다. 꾸준하게 성장을 거듭해오던 모습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제자리걸음을 시작하면서 서서히 침체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부터 순탄한 길을 걸어왔던 한국교회에 위기가 찾아왔음을 직감하고 교회의 앞날을 우려하며 교회의 건강상태를 파악할 뿐 아니라, 반드시 변화와 갱신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당시 대부분 한국교회는 급성장에 취한 나머지 당면한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자성의 기회를 가져야한다는 의견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할 수 있다’라는 신념의 불길을 계속 지피려하였다. 교회성장에 대한 신화를 버리지 못한 것은 교회지도자들이 ‘교회성장학’이라 불리는 이론에 심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초심 사라진 ‘교회성장학’, 목적이 이끄는 학문으로 과정 중요성 무시
우상된 교회성장, 수평이동은 성경진리 역행...유행보다 진리 선택해야
교회성장학
‘교회성장학’이란 교회성장에 관하여 다양한 연구를 하는 학문을 가리키는데, 이에 대한 평가가 대조를 이루고 있다. 한편 교회성장을 꿈꾸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 처해있을 때 이미 성장을 경험한 사례를 접하면서 배워 실천할 수 있다는 긍정적 견해가 있다. 이와 반대로, 각자의 은사와 처한 상황이 다르기에 성공사례를 따라하려는 시도 자체가 잘못된 것이며 인간적인 방법을 선택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를 거스르는 일이라는 부정적 의견도 있다.
사실 목회자의 입장에서 교회가 성장하지 않아 고민에 빠져 있을 때, 해결책이 될 수 있다면 어떤 방법이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교회는 ‘양보다 질’이 중요시해야 한다는 그럴싸한 핑계를 앞세워, 이미 마음으로 포기하고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 것보다 훨씬 바람직한 듯하다. 이런 논리를 따르자면 교회성장학이란 이론은 실보다 득이 훨씬 많은 것이기에 적극 권장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교회성장학’이란 이론을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된다. 교회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방법을 제시하는 실천적 학문으로 인식되고 있는 ‘교회성장학’ 역시 다른 학문과 같이 장점과 약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의 진리에 비추어 평가할 때, 비판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부분도 있으며 21세기 교회를 향해 도전이 되는 내용도 제시하기 때문이다.
도날드 맥가브란
교회성장학은 도날드 맥가브란(Donald A. McGavran, 1897-1990)에 의해 시작되었다. 인도 선교사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선교 분위기에서 성장하였다. 청년시절 법률가의 길을 선택하여 경제적으로 풍요한 삶을 살려했던 그였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신하고 신학교를 졸업한 뒤 외조부모와 부모님이 헌신했던 땅 인도에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다.
맥가브란은 감리교 인도 선교사 제렐 피켓(Jerrel Waskom Pickett, 1890-1981)이 1933년에 펴낸 ‘인도기독교대중운동(Christian Mass Movements in India)‘이란 책을 통해 선교현장에 대해 다양하고 올바른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현장연구조사 방법에 대한 통찰력을 얻게 되었다. 맥가브란은 1934년에 세계 여러 나라로부터 파송된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된 인도 중부의 145개 교회의 실태를 조사했다. 그 결과 134개 교회는 이미 정체되었고 11개 교회는 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는 결과 접하자, 자연히 침체와 성장의 원인이 무엇인지 궁금증을 갖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속하였던 선교부는 물론 교파를 초월하여 조직된 기독교협의회를 통해 효과적인 선교에 대한 연구를 확장하게 되었다.
그의 성장과정과 사역이 선교현장과 밀접한 연관을 지니고 있었던 것을 인식하는 것은 교회성장학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열쇠이다. 그가 선교지 교회가 성장하지 않는 현실을 접하면서 그 원인을 분석하고 해결책을 찾으려는 작은 노력이, 향후 그와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학문화되었으며 결국 한국교회를 포함한 세계교회에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교회성장에 대한 관심이 자연스럽게 교회성장학이란 학문적 틀로 발전될 수 있었던 계기가 있었다. 그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1955년에 ‘하나님의 가교(The Bridges of God)’를 출판하였는데, 세계 각국에서 성장하는 교회와 침체된 교회를 광범위하게 연구한 결과를 이곳에 담은 것이다. 이 책을 접하는 사람들마다 매우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그는 1961년에 오레곤에서 교회성장연구소를 시작하였다. 또한 1965년에는 향후 교회성장학 발전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던 풀러신학교의 선교대학원이 태동되었다. 1970년에 해외선교전략이 총망라된 ‘교회성장에 관한 이해(Understanding Church Growth)’가 출판되면서 맥가브란은 교회성장학의 중심인물로 우뚝 서게 되었다.
그렇다면 선교현장을 배경으로 시작된 교회성장이론이 기존 교회에 접목된 계기는 어떤 것이었을까? 교회성장이론이 미국교회에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을 지닌 채 1972년에 25명의 목회자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단지 집중과정으로 강의를 처음 시도하였다. 참석한 자들은 교회성장학이 지역교회에 적용될 수 있는 확신하게 되었고, 순식간에 미국 전역으로 이 운동이 퍼져나갔다. 침체되었던 미국교회를 각성시키고 성장에 헌신하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 향후 미국교회에서 유행하던 교회성장학을 한국교회가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피터 와그너
교회성장학이 기존 교회에 접목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은 피터 와그너(C. Peter Wagner, 1930-2016)이다. 그도 남미 볼리비아 선교사 출신으로 스승인 맥가브란에 이어 풀러신학교 선교대학원의 교회성장학 교수로 1971년부터 30년간 봉직하였다. 한국교회를 여러 차례 방문한 적이 있던 그는 교회성장운동에 가장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다.
한국교회는 와그너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그에 대한 평가가 매우 부정적인 것은 그가 논란과 비평이 대상이 되고 있는 신사도운동, 즉 성경이 완성된 후에도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사도와 선지자를 통해 자신과 그 뜻을 나타낸다고 주장하는 그룹을 주도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교회성장학이 신사도운동에 기초로 세워진 것은 아니었으며, 그가 이 운동에 깊숙이 관여하기 시작한 것은 교수생활을 은퇴한 후부터였다. 그럼에도 한국교회에 알렸던 교회성장이론을 비판적인 자세로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은 그가 성경적 진리로부터 벗어난 내용을 중시하였기 때문이다.
와그너는 그의 스승으로부터 성장목적달성을 위한 ‘효과집중’에 대한 원리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맥가브란이 제시한 교회성장원리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동질집단원리(Homogeneous unit principle)이다. 사람들은 자신과 동류의 사람들에 의해 복음을 전달 받을 때 가장 효과적이라는 내용으로, 성경적 원리를 배제하고 성장의 효과에만 집중하였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와그너는 인도의 카스트로 제도를 의식해서 맞춤형으로 제안한 맥가브란과 마찬가지로 각 교회가 처한 다른 상황에서 수적으로 성장시킬 수 있는 효과 있는 방법들을 적극적으로 개발하고 실천하면 반드시 그 목적을 이룰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무엇보다 와그너의 초자연적 현상과 교회성장을 연결시키는 것에 관심을 쏟았다. 특히 능력전도(power evangelism), 즉 예수께서 12제자에게 처음 보내실 때 사용하신 방법의 모델을 시험하는데 관심을 가졌다. 오순절교회의 은사주의자들이 1950년 이후 괄목할만한 성장을 보인 것이 능력전도의 결과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표적과 기사로 나타나는 성령의 초자연적 능력이 통한 교회성장이론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와그너와 그의 동료들은 끊임없이 세계의 대형교회와 역동적인 교회에 대한 연구를 통해 교회성장의 기준이 되는 방법을 찾아내려고 노력하였다. 이와 동시에 교회성장을 위한 자문을 실시하였는데, 교회설립세미나, 지역교회의 성장을 위한 계획설정 및 운영, 문제해결을 위한 워크샵, 교회성장훈련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였다.
진리와 유행
1960년대의 성장률이 41.2%, 1970년 5.9%, 1980년대 3.75%로 꾸준히 성장하던 한국교회는 교회성장학 학자들의 연구대상이 되었다. 특히 여의도순복음교회와 조용기 목사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교회성장학이 한국교회에 소개되자마자 큰 인기를 누렸다. 이미 성장을 일로에 있었던 한국교회였기에 특정한 방법을 사용하면 더욱 교회가 커질 수 있다는 확신을 주었기 때문이다.
교회성장이란 제목만 붙여놓으면 많이 팔리는 인기서적이 되었다. 교회성장에 대한 기대감에 부풀어있던 목회자들은 각종 세미나에 참석하여 효과적 방법을 배우려 하였다. ’이렇게 하면 반드시 성장한다!‘라는 과대광고가 판을 쳤다. 교회성장에 대한 열망을 지닌 목회자들은 떼를 지어 이곳저곳으로 몰려다녔다.
불행하게도 어느 순간부터 교회의 부흥은 곧 교인의 수가 많아지는 것이란 생각이 자리 잡게 되었다. 교회마다 성장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문맥에 전혀 맞지 않는 성경구절을 앞세워 어떤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빈자리를 채워야 한다는 신념이 생겨났다.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눅9:37),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합3:2)를 예로 들 수 있다. 대형교회가 하나 둘 씩 생겨나고, 교인숫자가 목회의 성공과 실패로 판가름되기 시작하면서 교회성장에 대한 갈증이 더욱 심해졌다.
1990년이 지나면서 한국교회가 쇠퇴하기 시작했다. 현재 교회성장은 아득한 과거의 이야기가 되었다. 교회성장학은 한 시대의 유행으로 끝났다. 와그너와 함께 능력대결(power encounter), 즉 예수의 능력은 사람들이 숭배하고 두려워하는 신과 영보다 압도적임을 알림으로 교회가 성장한다고 주장하였던 존 윔버(John Wimber, 1934-1997)는 ’빈야드운동‘을 전개하며 한때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이 역시 한 시대의 유행으로 끝났다.
무엇이 문제인가? 이런 과거로부터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일까? 주님의 교회는 반드시 유행보다 진리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의 수적 부흥을 위한 노력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해 회심시키는 일이 힘들어지자, 각 교회가 경쟁적으로 다른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들을 불러내는 일을 너무도 당연한 일로 여기게 되었다. 교회성장이 우상이 되었으며, 수평이동은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에 역행하는 모습임을 이제라도 인정하고 반성해야 한다.
교회성장학 학자와 이론가로 변하기 전의 맥가브란의 초심은 순수하였다. 그는 선교현장에서 그가 공부한 자유주의신학이 진리가 될 수 없음을 절실히 깨달았다. 성경의 무오성과 절대적 권위를 믿게 되었고 믿음과 실천의 유일한 기준임을 고백하게 되었다. 그 시절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해 교회로 인도하고 그들을 온전한 그리스도의 제자로 세우는 일이었다. 그는 교회를 세우시는 분이 그리스도이심을 항상 고백할 수 있었다.
교회성장학은 이런 초심을 사라지게 했다. 목적이 이끄는 학문으로 둔갑되자 과정의 중요성을 무시하게 되었다. 한국교회는 지난 2000년의 교회역사가 가르치는 교훈을 겸손히 수용해야 한다. 교인 수의 증가는 영적 부흥의 열매이며, 수적으로 약했지만 성경의 진리를 지닌 자들이 교회의 역사의 주인공이 되어왔다. 교회성장이 과거의 역사로 사라지지 않고 현대교회의 사명이 되기 위해 우리는 유행이 아니라 진리를 붙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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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22.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