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균(李完均)은 1900년 4월 7일에 서울 혜화동 15번지의 91에서 이희창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수하동공립 보통학교와 사립 오성학교와 한성 모 강습소를 졸업한 그는 1921년에 연희전문학교 이과에 입학하여 1928년에 본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장로교인이었다.
이완균은 미국 유학차 1929년 7월 24일에 일본 요코하마에서 ‘프레지던트 피어스’에 승선하여 미국 북가주 상항에 도착했다. 그는 상항에 도착했지만 배에서 거의 1주간 있다가 7월 31일에 상륙했으니 유학 액땜을 한 셈이다. 스탁톤 한인감리교회 담임목사 김 탁이 상항으로 와서 그를 마중했고, 상항을 거쳐 스탁톤에 도착한 그는 김 탁 목사의 주택에 이종석과 함께 거주하면서 스탁톤 퍼시픽 대학에 입학했다.
스탁톤 한인감리교회 전도사
1930년 4월 18일 오전 10시에 상항 한인감리교회에서 미국 남감리교 한인남감리교회 지방회 연환대회가 개최되었다. 데비스 목사가 사회를 보는 가운데 한석원 목사를 서기로 지정한 후 한국에서 방문한 양주삼 목사가 '그리스도를 들라'라는 주제로 기도회를 인도한 후 회무에 들어갔다. 이날 스탁톤 한인감리교회 계삭회의 천거로 이완균을 1년간 스탁톤 한인감리교회 신임 전도사로 파송했다. 당시 본 교회 목사는 김 탁이었고 전도사로 임성택과 김필권이 있었다.
이날 보고에 따르면 스탁톤 한인감리교회는 80명이 등록하였고 30명이 출석하였으며 지난 한 해 동안 성인 한 사람이 세례를 받았고, 유아 3명이 유아세례를 받았으며 1년간의 헌금 총액은 600달러였다. 상항 한인감리교회는 84명이 등록하였고, 이 중 45명이 출석하였으며, 성인 한 사람이 세례를 받았고, 유아 4명이 유아세례를 받았으며 1년간 헌금 총액은 805원이었다.
오클랜드 한인감리교회는 삭도 한인감리교회를 포함하여 63명이 등록하였고, 30명이 출석하였으며 지난 한 해 동안 성인이나 유아 중 한 사람도 세례를 받지 않았으며, 1년간 헌금 총액은 360원이었다. 리들리 한인감리교회(딜라노 한인감리교회와 태프트 한인감리교회 포함)의 경우 75명이 등록하였는데 50명이 출석하였으며 유아 한 명이 유아세례를 받았고 1년간 헌금액은 966원이었다.
1929년 유학차 도미, 스탁톤 한인감리교회 전도사로 2년 시무
가주관립대학(버클리주립대) 졸업 1933년 귀국후 석사학위 취득
그해 4월 17일에 상항에 도착한 양주삼 목사와 그의 부인이 상항에 이어 스탁톤을 방문하였으니 이완규의 활동이 바빴을 것으로 본다. 그들은 리들리, 나성, 달라스, 뉴욕, 시카고 등을 3개월간 방문하였고, 그해 7월 19일에 상항에서 출발하여 귀국하였는데 신한민보 9월 11일자에서 그들은 “여러 형제자매들에게 풍성한 사랑을 여러 가지 모양으로 받고 폐를 단단히 시켰음으로 감사한 마음이 그치지 않는 중에 미안함도 없지 않습니다”라고 적었다.
다음 달인 5월 23일 밤 12시경에 스탁톤에 다년 거류하며 상업에 종사한 김승길이 괴한에게 칼로 복부를 찔려 중상한 가운데 입원 치료 중이었고, 그달 26일 하오 1시 30분에 상항에서 장인환 의사 장례식이 있었으니 공부하던 이완규가 이들을 위한 발걸음이 바빴으리라.
그해 9월 20일 오전 9시에 상항 시내 부쉬 스트리트에 있는 미국인 남감리교회에서 미국남감리교 연환회가 있었다. 김 탁 목사와 김필권 전도사가 참석하였고, 이완균은 참석하지 못했다. 하오 2시 30분에 다시 모인 연환회에서 스탁톤은 ‘오클랜드 삭도 스탁톤 구역’으로 재조정되었고 임정구 목사가 본 구역목사가 되었다. 김 탁 목사는 ‘리들리, 딜라노, 태프트 구역’으로 이동했다.
그달 24일에 김병칠이 별세했고, 나흘 후인 26일에는 박영제가 득남하여 희비가 엇갈리는 9월이었다. 다음달 10월에는 한치홍이 환국하는 가운데 아들 한상호의 심란한 마음은 이완규의 목회였다.
1931년의 첫 행사는 삼일절 기념식이었다. 3월 1일 저녁 8시경에 시내 한인 예배당에서 일제히 모여 성황을 이룬 가운데 기념식을 거행했다. 그해 6월 14일 하오 7시30분에 스탁톤 한인교회에서 김 탁 목사 사회하에 다수 동포가 모여 졸업생 축하회가 있었다. 재미있는 순서를 진행하였고, 여럿이 준비한 아이스크림으로 여름날에 열기가 가득한 흉금을 시원하게 하면서 여흥을 나누었다. 이날 졸업생은 그해 5월에 퍼시픽 대학에서 문학사학위를 취득한 이완균, 모데스토 주니어대학 졸업생 허 은 그리고 와싱톤소학교 졸업생인 김필권의 장녀 김옥자 등 세 명이었다. 그달 21일 저녁 7시에 예배당에서 스탁톤 국어학교 방학식이 있었다. 본교 교장 김필권의 사회로 방학식에는 일반 학생들이 배운 바 학예를 시험하며 재미있는 노래와 감상담이 있었고, 우등 학생들에게 시상식을 거행하였고, 시원한 아이스크림을 나누었다.
그해 7월 4일 오전 9시 30분에 남가주 나성에 있는 백인 교회에서 미국남감리교 한인남감리교회 지방회 연환대회가 열렸다. 보고에 따르면 스탁톤 한인감리교회 등록교인이 62명이었다. 이날 이완균은 김필권과 함께 스탁톤 한인감리교회 전도사로 2년 차로 파송되었다. 그해 9월 5일 상오 9시에 상항 백인 남감리교회 꼴나이드 기념예배당에서 감독 무어 박사의 사회로 미국남감리교 산하 동양인선교회 대회가 있었다. 한인보고회는 따로 모였는데 보고에 따르면 나성에 교회를 조직한 후 50여 명의 교인이 증가하였고, 작년에 비하여 공황에도 불구하고 별로 재정이 감소되지 않았다.
그해 12월 12일 저녁에 스탁톤 한인교회에서 본 교회 유년회의 아동들이 중심이 되어 재만동포 구제금에 관해서 논의했다. 유년회 회장 박윌리암쓰의 사회로 어린 미간에 걱정 빛을 띄우며 적은 주먹을 휘두르며 밤 깊도록 재만동포 구제문제로 토의하더니 아침내 저희 8명이 오랫동안 과자 사먹는 대신 푼푼이 모아두었던 회비 중에서 그 절반인 5달러를 보내기로 만장일치로 가결하였는데 그 광경은 참으로 지필로 기록하기 어려우리만치 아름다웠다. 이날 교회가 5원을 기부하였고, 이완규는 50전을 기부했으며, 이날 총 33원 50전이 모였다.
1932년의 첫 행사는 삼일절 기념식이었다. 그해 3월 1일 저녁에 국민회 지방회 회장이자 본 교회 전도사인 김필권의 사회로 스탁톤 한인감리교회에서 있었다. 개회 후 애국가 1절과 2절을 부른 후 김 탁 목사가 기도하고, 김필권이 취지설명을 한 후 국기경례식이 있었다. 변영로의 선언서 낭독, 찬양대의 독립선언가 찬양, 순국열사 추도사, 찬양대의 삼일가 찬양, 박영제의 독립운동사, 찬양대의 고려 신천아 찬양, 김 탁의 ‘우리의 앞길’ 연설, 수의 연설, 삼일절 헌납 그리고 애국가 3, 4절을 부른 후 만세삼창으로 폐회했다. 그해 김승제가 노환으로 가주 주립양로원 라구나혼다 홈에서 4월 27일에 세상을 떠났는데 수중에 한 푼도 없었다고 하여 노동 이민자의 슬픔을 감상하였는데 다음 달 2일에 박양래의 장녀 15세의 이디가 불행하게도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갔으니 한인촌에는 눈물겨웠다.
그해 가을에 버클리대학교에 입학하였으므로 이완균의 목회는 1930년 4월부터 1932년 여름까지 약 2년간이었다.
오클랜드 한인 감리교회
이완균은 1932년 11월에 버클리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1932년 가을학기에 본 대학에 입학한 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학교 인근에 있는 오클랜드 한인감리교회에 출석했다. 그는 교역자로서 활동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해 12월 오클랜드 한인감리교회에서 성탄절이 있었을 때 이완균은 성경을 봉독했다. 임캐트린이 음악을 한 후 일동이 ‘세계에 기쁜 날’을 찬미하고 노신태가 기도한 후 이완균이 마태복음 1장 2절을 낭독하였다. 이후 헌금과 광고로 이어졌다. 예배를 드린 후 이어진 1부와 2부에서 성탄 행사가 있었다.
1933년 3월 1일에 독립선언 제14회 기념식이 있었다. 이날 한국과 미국의 국기를 교체한 단상에서 회장 김은해의 사회로 기념식과 다과회가 있어 밤이 깊도록 혁명적 사상을 충만히 새롭게 했다. 이날 이완규는 25전을 기부했다. 신한민보는 모본할 만한 삼일 성금이라고 치하했다.
이완균은 1933년 5월에 버클리대학을 졸업했다. 그해 졸업생을 위하여 그해 6월 11일에 나성 흥사단소와 나성 한인장로교회에서 북가주유학생 총회 서부대회가 졸업식 축하식이 있었다. 이해 대학졸업생은 그를 포함하여 차상달, 주중남, 김안드류, 김 강, 권일중, 박필연, 박T.C., 송흥국 등 9명이었고, 중학교 졸업생은 15명이었다. 당시 대회장은 문장옥이었고 위원은 김세형과 추중남이었다.
오클랜드 한인감리교회 부인전도회가 1933년 8월에 내지 3남 이재민을 위한 구제금을 모금할 때 이완균도 50전을 기부했다. 이들의 기부와 상항 한인감리교회의 기부금을 합한 35달러를 서울 동아일보사로 보내졌다.
귀국
그 후 이완균은 가주관립대학(버클리주립대학)에서 수학을 공부하고 1933년 여름방학 때 학사학위를 취득했다. 그해 가을에 그는 물리학 석사학위과정에 입학하였는데 가을이 짙은 11월 30일에 상항에서 아사마 마루로 한국으로 귀국했다. 그가 귀국하기 전 신한민보 기자에게 “이민국에서 하루바삐 출국하라고 재촉하나 선비가 부족하여 염려하던 차에 리들리에 계신 김형순씨가 선비를 도와주셨음으로 무사히 배를 타게 된 바 김 씨의 후의를 잊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또한, 그는 “미국서 공부하는 동안에 스탁톤, 뻐글리, 상항, 리들리 등지에 계신 여러분의 후위를 잊을 수 없습니다”라고 감사의 말씀을 남겼다. 그런데 1934년 5월에 이완균이 버클리주립대학원에서 졸업했다고 한다. 아마 그가 한국에 가서 과정을 마친 것으로 보인다. 1939년에 이완균은 일본 젠 라쿠에 있는 젠 라쿠 고등학교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가르치는 교사로 재임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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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15.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