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와 추도예배
기독교신앙을 지닌 신자가 제사를 지낼 수 있을까? 십계명에 분명히 기록된바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은 우상숭배이다. 보수적 성도들은 제사문제에 대한 입장이 단호하다. 기독교신앙과 이미 죽은 조상에게 음식을 바치는 행위는 병행될 수 없다고 믿고 있다. 1890년에 한국으로 파송 받아 46년간 복음과 교육 사역에 매진하였던 사무엘 마펫(Samuel Moffet, 1864-1939) 선교사의 영향 때문이다. 그는 신자들은 제사에 참여할 수 없다는 규범을 제정하여 단호하게 대처하였다.
한국 천주교는 1962년에 제사가 우상숭배행위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제사란 조상을 추모하려는 좋은 동기로부터 시작된 한국인의 문화적 요소라고 정의하고 새롭게 허용한 것이다. 그 후로 개신교회는 제사에 대한 부정적인 목소리를 더욱 드높였다. 그 당시 성도 중에는 제사문화란 종교의식이 아니라 조상에 대한 후손의 효심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믿거나, 거부할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신앙의 양심을 거스르며 실천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요즈음 젊은이들 사이에 효심이 사라진지 오래다. 대가족과 핵가족 시대를 넘어 1인세대 시대가 도래한 뒤, 노인을 누가 돌보느냐에 대한 이슈가 사회적 문제로 등장하였다. 내 가족과 자식을 위해서는 모든 희생을 감수하려해도 부모 부양책임은 지려하지 않는다. 나아가 죽은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은 더욱 꺼리는 추세이다.
이런 상황에서 조상을 존중히 여기는 전통적 문화를 다시 살려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는 자들이 있다. 이들은 후에 언급될 자유주의신학자들로서, 기독교가 지나치게 타종교에 대하여 공격적이며 배타적이라고 주장한다.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하고 사회적 변화에 공헌한 것은 사실이지만 조상을 존중히 여기는 한국인의 아름다운 전통을 중지시키고 가족 간에 엄청난 갈등을 불러온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조상을 존중하는 미풍양속을 거부하는 종교인가? 아니다. 이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선교사들이 한국문화를 분명히 이해하지 못한 상황 속에서 유일신만 섬겨야 한다는 성경적 가르침을 잘못 적용한 것이 아니다. 선교사들은 죽은 자에게 제물을 바치며 복을 구하는 행위가 하나님께서 내리신 계명을 어기는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성경은 부모공경을 매우 중요시 하고 있다. 그러므로 추도예배가 장려된 것이다. 초기에는 추도예배가 제사와 유사하기에 혼동을 줄 수 있다하여 금지되었지만 점차 각 교단마다 전 교회적으로 이를 권장함으로서 기독교는 부모공경을 중요시 하는 것을 널리 알게 하였다.
추도예배와 제사의 근본적인 차이점이다. 추도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며 제사는 죽은 영혼을 대상으로 한다. 추도예배는 복음이 한국에 토착화 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다. 제사를 소중히 여기던 한국인의 문화 속에서 기독교 신앙인들을 위해 도입된 제도이다.
복음보다 상황을 더 중시한 토착화 신학과 민중 신학은 거부
변하는 문화에 대응하며 성경에 근거한 토착화는 계속 돼야
토착화
선교를 통해 전달된 복음의 씨앗이 어떤 방법으로 뿌리를 내릴 수 있을까? 특히 수입된 서양의 종교로서의 기독교가 전혀 생소한 문화권에서 어떤 방식으로 자리매김을 할 수 있을까? 선교학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인 토착화(Indigenization)가 답이다. 이는 복음이 문화적 형태로 표현되기에, 문화에 대한 이해를 통해 복음과의 접촉점을 찾으려는 노력을 가리킨다.
과연 토착화는 어떻게 이뤄지는 것일까? 또한 한국교회 초기에 이뤄진 토착화는 어떤 성격을 지녔었으며, 1960년대 이후에 시도되었던 토착화 작업의 특징은 무엇일까? 이런 긴장감 속에서 현대교회에 요구되는 개혁과 토착화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토착화라는 단어 자체는 생소할 수 있어도, 성경에 기록된 복음의 내용과 복음전파의 역사를 이해한다면 이미 토착화에 대한 기본개념을 이해하고 있는 셈이다. 타 문화권에 복음을 전하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초월의 세계에서 인간이 사는 땅에 도성인신 하셨다. 초문화적 존재가 유대인의 전통문화를 입고 오셨다. 십자가에서 완성된 복음이 그리스-로마라는 특수한 문화를 지닌 세계에 전파되었다. 신약성경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많은 언어 중 헬라어로 기록되었다. 유대문화 또는 헬라문화가 타 문화에 비해 우수하거나 완벽하였기 때문이 아니다. 모든 문화는 예외 없이 상대적이며 타락한 인간의 모습이 반영되어있다. 단지, 신약성경은 순수한 복음의 진리가 어떻게 독특한 문화에 토착화되었는지의 과정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교회역사는 복음의 확장에 대한 기록이다. 이는 곧 복음이 지속적으로 새로운 문화 속에 토착되는 과정에 대한 언급이다. 지구상 각 지역의 언어와 문화가 매우 다양하다. 수용하는 자들이 친숙한 문화를 통해 불변하는 복음의 진리를 수월하게 표현함으로서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복음을 받아들인 후 이전의 종교적 확신을 포기하고 변화된 삶을 살아갈 때에, 자신이 처해있는 삶의 상황을 전적을 무시하는 것은 옳은 결정이 아니다.
문화적 상황과의 관계 속에서 복음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중요한 사명 중 하나이다. 효과 있는 선교사역을 위하여 선교지 문화에 대한 이해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과제이다. 물론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와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신다는 근본적인 원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한국 교회
초기 복음 선교사들은 자신들이 친숙한 서양의 문화와 매우 다른 한국의 고유문화를 접해야 했다. 그들은 토착화 이론에 대한 학문적 체계를 갖춘 전문가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앞서 제사제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문화 속에 성경의 진리를 수용시키는 과정 속에서 자연스레 토착화를 시도했다. 그럼에도 한 가지 특이하였던 것은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선교사들이 복음을 들고 그 땅을 밟기 전부터 성경이 중심된 교회의 모습으로 토착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1872년부터 만주에서 활동하던 스코틀랜드 선교사 존 로스(John Ross, 1842-1915)에 의해 한국어 성경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이미 토착화가 이뤄졌다. 로스는 성경번역이 조선 선교에 큰 효과를 얻을 것으로 확신하고, 구체적 방법을 모색하기 위하여 두 차례 만주 심양 봉황성의 고려문을 방문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이응찬, 백홍준, 서상륜 등을 만나게 되었다. 로스는 어학에 뛰어난 재능을 지닌 인물이었지만, 정확한 한국어 표기를 위해 한인들의 도움이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놀라운 것은 성경번역에 참여한 이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았다는 것이다. 이들은 복음을 받아들인 후 개신교 신앙인의 신분으로 로스의 작업에 협조할 수 있었다.
로스는 이미 번역된 한국어를 다시 교정하는 과정을 걸치면서 원문에 충실한 성경이 되도록 노력하였다. 이 과정에서 번역을 도왔던 한인들의 문화적 요소가 잘 반영될 수 있었다. 그 당시는 한글사용에 있어서 띄어쓰기가 실행되지 않았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하나님, 예수, 주, 그리스도와 같은 단어 뒤에 한 칸을 비워두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였을까? 이미 복음을 받아들여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가진 번역자들이, 신적 명사를 표기하면서 한국 전통문화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던 동양인의 예법을 그대로 적용한 것이다.
이 성경은 초기 한국교회의 신앙적 근간이 되었다. 로스를 도와 성경번역에 참여했던 이들은 의주로 돌아와 복음을 전파하였다. 백홍준은 그 과정에서 재산을 잃고 옥고를 치렀지만 복음에 대한 열정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 결과 국내 최초로 자발적 개신교 신앙공동체가 형성될 수 있었다. 서상륜은 동생 서경조와 함께 황해도에서 최초 개신교 교회인 소래교회를 설립하였다. 이는 언더우드 선교사와 아펜셀러 선교사가 조선에 도착하기 전인 1883년에 일어난 일이다.
초기 한국교회 성도들이 성경을 대하던 태도에서 다른 토착화의 예를 발견할 수 있다. 성도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있는 거룩한 경전이란 생각 때문에 매우 조심스럽게 대했다. 성경을 대할 때에는 두 손으로 정성껏 받들었다. 또한 성도들은 1주일 이상 지속되던 사경회 참석을 신앙의 필수로 삼았다. 교회에서 성경을 공부하는 모습은 마치 서당을 연상시켰다. 교인들은 각 절에 담겨져 있는 내용을 차근차근 설명하는 교사의 말에 겸손하게 귀를 기울였으며, 그 내용을 깊이 숙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실시된 성경암송이 한국교회에 토착되었다.
토착화 신학
한국기독교의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토착화 신학이 출현한 것은 1960대의 일이다. 윤성범, 유동식, 변선환 교수를 중심으로 서구 기독교의 신학적 개념을 한국 전통문화와 종교 속에서 해석하려 한 것이다. 이들은 전개한 토착화 신학은 성경의 진리로부터 매우 벗어났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한국에 단군신화의 환인, 황웅, 환검 이야기가 경교를 통해 한국교회의 삼위일체론에 영향을 준 것이라고 주장한다. 율곡의 성리학은 그리스도의 초월과 내재를 포괄하는 진리를 계시하는 원리라고 보기도 한다. 또한 6세기에 형성된 풍류도에 이미 기독교적 진리가 실현되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한국인은 정확히 규정할 수 없는 초월적 대상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개신교의 하나님과 통하는 대상이라고 주장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토착화 신학은 혼합주의 경향을 드러냈다. 한국의 문화전통이 지나치게 강조되면서, 복음이 지닌 순수성을 희생시킨 것이다. 그들의 관심은 한국적 문화와 기독교 진리의 유사성에 집중되어 있었기에, 이 둘 사이의 존재하는 근본적인 차이점을 고려하지 않은 오류를 범한 것이다. 이미 오랜 시간에 걸쳐 한국교회에서 토착된 복음임을 무시하고, 새롭게 한국전통 문화에 근거한 한국적 기독교를 수립하려는 시도였다.
한국적 신학을 지니려는 노력은 70년대부터 새로운 양상을 갖추게 된다. 서남동과 안병무 교수를 중심하여 민중신학이 등장한다. 이미 60년대부터 서구교회에서 시작된 해방신학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들은 한국의 정치적 상황 속에서 지속적으로 배제된 민중의 고난에 현실을 부각시키고, 이런 상황에 저항하는 자들의 목소리를 신학적으로 대변하는 위치에 서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리스도가 고통 받는 민중으로 둔갑되었다.
토착화의 필요성
선교의 목적은 토착화된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복음은 예언적 기능을 지니고 있기에, 특정 문화를 향해 진리를 선포하고 충분한 이유를 지니고 있다. 한국에 복음을 전해준 서양 선교사이 지녔던 서양문화도 완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서구교회의 모든 것을 무조건 수용해야 한다는 주장은 결코 옳지 않다. 그러나 동시에 선교사들의 사역 이후 한국교회가 복음을 수용하는 모든 과정에서 일어난 토착화가 온전히 성경의 범위 안에서 이뤄진 것인지에 대한 반성이 요구된다.
선교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타 문화권에서 교회를 세우시는 주체도 하나님이시며, 복음의 진리를 밝히시는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문화를 통해 복음이 전달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토착화는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어 이뤄져야 한다. 복음보다 상황을 더욱 중시한 토착화 신학과 민중신학을 거부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성경에 근거한 토착화는 계속되어야 한다. 문화는 변화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코비드-19으로 인해 급변하는 세상에서 건전한 토착화가 긴박하게 요구된다. 지금까지 예배는 특정장소에 성도들이 함께 모여 드리는 것이었다. 그 누구도 교회출석이 불가능하게 될지, 인터넷예배가 전통 예배형식을 대치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팬데믹이 그친다 할지라도 더 이상 전통적 예배만 성경적이라고 주장할 수 없는 것 같다.
시대가 변하면서 문화도 함께 변한다. 그러므로 변하지 않는 복음의 진리를 어떻게 수용하고 적용할 것인지에 대한 거룩한 부담을 달게 져야한다. 만일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상황에 대해 예민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꼴통신앙과 차가운 교조주의로 전락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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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8.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