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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곽림대(1884-1971)

곽림대(郭林大)는 1884년 9월에 황해도에서 태어났다. 그의 또 다른 이름은 곽태종이고 호는 쾌설당(快雪當)이다. 그는 처남 안태훈 진사의 아들이자 5살 위인 처조카 안중근과 자주 만나 애국에 눈을 떴다.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한 그는 1909년 평북 선천에 있던 신성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교사 근무 중이던 1911년 11월 그는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한성 감옥에서 고초를 겪었다. 

이후 가족은 한국에 남겨 두고 홀로 중국으로 떠나 1913년 4월 몽골리아 선편으로 상해에서 하와이에 도착했고, 그해 9월 20일에 유학차 도미하였으나 망명의 길이었다. 35달러로 미주에서 생활했던 그의 미국 이름은 로웰(Lowell)이었다. 1913년 11월, 상항 국민회 지방회 가입 명단에 처음 그의 이름을 냈다. 그런데 1914년 5월에 클래몬트로 이주했고, 그달에 업랜드로 이동하면서 1915년 새 학기에 클래몬트 한인양성소 국한문 교사로 피선되었다.

클래몬트 한인장로교회 목사

 

1915년 4월에 업랜드 제일장로교회에서 업랜드와 클래몬트에 있던 동포들이 주선하여 업랜드의 서양 부인 스트왓을 위한 대연을 베풀었을 때 곽림대가 목사로 소개되었다. 그가 국한문 교사를 하였던 기간에 클래몬트 한인양성소에 체류하면서 이곳에 있던 한인장로교회 목사로 사역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다년간 한인 목사로 사역했던 민찬호 목사에 이어 본 교회의 안수 받지 않은 목사였는데 사실상 그는 전도사였다. 그런데 민찬호가 다년간 맡았던 학생양성소 새 감독은 강영대였다. 이날 대연의 순서를 소개하면 일동의 할렐루야 찬미로 개회한 후 연설과 음악과 찬사가 있었다. 연설 담당자는 알리손, 사전트, 헌트, 스토온, 곽림대, 이종희였다. 음악 순서자는 민찬호 목사 부인, 강영승, 이요섭, 임보배의 독창, 강영각의 나팔 독주, 팩손, 쿡, 스트왓, 리의 4인 병창, 팜어 부인의 바이올린 독주, 음악대의 음악이 있었다. 그리고 박 선 목사의 찬사가 있었다. 이후 친교가 이어졌다.

1915년 5월 임 초가 일제에 의해 감옥에서 고생하던 여독으로 병을 얻어 병원에서 치료 중이었고, 김기만의 부인이 3주간 동안 치료하였으니 곽림대의 심방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달에 이석원이 감자농사에 실패한 후 마차를 구매하여 채소 소매상을 시작했으니 곽림대의 기도제목이 하나 더 늘어났을 것이다.

1915년 6월 5일 오후 7시30분에 클래몬트 한인양성소에서 금번 하기에 졸업한 본 양성소 학생 이원석과 이순복을 위하여 내외빈객 6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졸업생위로회가 있었다. 이날 곽림대는 사회자로 활동하면서 본 양성소 장래 정황에 관해서 소개했다. 전체 절차는 찬미와 기도 후 곽림대의 개회사, 회중의 국가, 박 선과 지성진과 패던과 스트왓 부인 등 4인의 축사, 미국여학생 단체의 창가, 길턴어의 연설, 임보배의 창가, 이원석의 정빈연설, 히스킨스의 창가, 이순복의 정빈연설, 합킨쓰와 강영각의 음악, 이종해의 소설, 합킨쓰와 강영승과 강영각의 음악 과텟, 곽림대의 본소 장래 정황 그리고 군악 후 폐회했다. 

1915년 7월 곽림대는 클레몬트를 떠났다. 이로써 그의 클래몬트 목사직은 길어야 7개월이었다. 그는 신한민보 방사원과 클래몬트 지방회 회장이었던 직책도 내려놓았다. 아마 그는 나성으로 이주한 것 같다.

 

나성 한인복음청년회

 

1917년 3월에 나성 지방회 학무원 김덕준이 사임함에 곽림대가 보임되었다. 이듬해 2월 3일부터 나성 한인복음청년회는 매 주일 오후 7시에 청년강연회를 열고 풍기교정과 남녀 수양에 대한 필요한 문제를 강연하기로 아래와 같이 결정했다. 2월 3일에 남자 강사 김창만이 ‘남자의 눈에 보이는 여자’에 대해서, 여자 강사 박순애는 ‘여자의 눈에 보이는 남자’에 대해서, 2월 10일에는 곽림대가 교회 핍박 전말에 대해서, 2월 17일에는 남자편 김태진과 장리욱이, 여자편 안헬렌과 민매늬가 각각 ‘현 시대 한국여자들은 남자의 결제만 받는 것보다 아니 받는 것도 좋을 듯’에 대해서, 그리고 2월 24일에 박영로가 강연하기로 했으나 아직 주제는 미정이었다.

1918년 9월 5일 신한민보에 곽림대가 ‘마이 올드 켄터키 홈’의 곡조에 노래 글 ‘동반도 옛집’을 게재했다. 이는 두고 온 그의 고향을 노래했지만 한인 모두의 나라사랑을 생각하게 한다. 

 

1. 조일이 선명한 나의 동반도 옛집/너는 나의 조국이로다/선조들이 너를 창립하였고/또 너를 의지하였네/억천 만대 자손이 우리 위하여/그 살과 또 피로 단장한/저렇듯 장엄한 금수강산은/오 나의 조상 나라이로다

후렴: 사랑옵다. 나의 조국/오 나의 혈족들아/활동하세. 우리 민족의 자유와/조상 나라운명을 위하여.

2. 산은 높고 물은 맑은 동반도 옛집/ 너는 나의 고향이로다/산 밑에 소나무 내가 길렀고/성킨 참대 내가 심었네/무궁화 그대로 피어있는가/못 잊을 생각도 사랑/저렇듯 화려한 금수강산은/오 나의 고향 나라이로다.

3. 죽어도 잊지 못할 동반도 옛집/너는 나의 사랑이로다/우리 선조 너를 내게 주실 때/만세 무궁 축복하시며/돌비를 세워 표적케 하심은/그 살과 또 피를 기억케/저러한 자유의 금수강산은/오 나의 성장한 옛집일세 

 

세계 제 1차 대전 징병서류를 제출하던 1918년 9월 12일에 곽림대는 나성 노스 피구에로아 스트리트 106번지에 있는 코리아 아카데미의 사무직원이었는데 그는 5피트 7인치의 키에 136파운드의 체구였다. 

1919년 6월에 그가 시카고 지방회 학무원으로 보충되었으니 시카고로 이주한 것이 분명하다. 1920년 2월에 노백린과 김종림 등과 함께 북가주 윌로쓰에 한인비행학교를 설립하고 그해 7월에 개소식을 개최한 후 19명의 학생을 훈련하였는데 그는 연습생 감독직에 있었다. 그해 9월 7일에 그는 상항에서 켄터키주 린톤에 있는 켄터키 무관학교로 향했고, 군사이론을 수학했다. 1923년에 뉴욕국민회 지방회장이었던 그가 1927년에 흥사단 미주위원부 이사부장에 선임되었다. 그가 1929년 1월에 나성흥사단 사무원으로 취직하면서 나성으로 다시 이주했고, 그해 6월에 나성국어학교의 야학교사로 국어와 편지 쓰는 법을 가르쳤으며, 그해 9월에 한인 아동교육기관 기성발기인의 한 사람이었다.

 

클래몬트 한인양성소 교사와 한인장로교회 목사(전도사)로 사역
나성 이주 한인비행학교 설립, 흥사단 등 독립운동, 1970년 귀국 

 

나성 한인예수교회 유사

 

1930년 10월 12일 오전 11시에 나성 버들롱 한인 예배당에서 미국 남감리교 감회사 데비쓰 목사가 마태복음 13장 20절부터 14장 17절까지 낭독한 후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데 있지 않고 오직 의와 평안과 기쁨과 성신을 힘입음에 있다는 설교가 있었고, 오후 8시 30분에 남녀 100여 명이 미국남감리교 한인교회 조직과 환영회로 모였다. 강영승의 사회로 찬송가 237장을 부른 후 그의 기도가 있었고 이어서 개회사가 있었다. 그는 본 교회를 남감리교회로 변경됨과 이에 따른 임원조직을 언급하였다. 나성 한인예수교회 위원장 김성권이 본 위원회와 전반 교우를 대표하여 본 교회를 미국남감리교회로 조직하기를 허락함을 일반 교우 앞과 감회사 데비쓰 목사에게 선언했다. 이에 데비쓰 목사는 전임목사 황사용을 파송할 것을 선언했다. 임원조직에 있어 계삭회가 열릴 때까지 유사를 두기로 하고 곽림대를 비롯하여 강영승, 김성권, 임정수, 박재형, 박경신, 황성택 등 7명을 유사로 선임했다. 9시에 김성권이 환송연회를 개회하였다.

이듬해 1931년 1월 4일 오전 12시 50분에 버들롱 예배당에서 미국 남감리교 감리사 데비쓰 목사의 사회 하에 김성권이 기도한 후 계삭회를 열고 임원을 선정했다. 이날 곽림대는 유사로 선임되었는데 그 말고도 유사에 황성택, 임정수, 박재형, 윤으로사 그리고 박경신이 선임되었다. 그 날 본 교회 목사에 황사용, 지방 전도사에 강영승, 임성택, 김 강, 평신도 대표에 최능익, 주일학교 교장에 김해반이 선출되었다.

1932년 2월 21일 주일 오후 4시에 미국남감리교 감리사 데비쓰 목사의 사회로 나성 한인 남감리교회 계삭회가 있었다. 이날 보고를 접수한 후 동 교회 재무였던 곽림대가 사임을 하고 최능익이 선정되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중국 난민과 재중 한인 구제를 목적으로 뉴욕과 시카고와 나성에서 중국 후원회가 조직될 때 곽림대는 김 강, 이경선, 신두식, 안석중, 최영순, 최봉윤, 선우학원, 최능익, 김혜란 등과 함께 나성 중국 후원회의 일원이 되어 활동했다. 그는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지회장과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도 활동했다. 

그는 1944년 10월 미주와 하와이 각지에 있던 13개 한인단체 대표가 회동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위원부 개조안 발표에 대한 대칙회의에 참석했다.

1970년 6월 17일 곽임대는 57년 만에 “뼈만은 고국에 묻히고 파” 고국에 돌아갔다. 그에 따르면 “와보니 내 조국은 말 그대로 상전벽해가 된 느낌이요, 마치 외국에 온 듯한 느낌을 맛보게 했다. 말을 절반 밖에 못 알아들을 정도로 모든 게 격변하여 내 자신이 이방인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자녀들이 여기에 있고, 어언 환갑을 맞은 흥사단도 건재해 있으므로 차츰 정이 들어 비교적 화평한 말년을 보내게 된 것을 하나님께 늘 감사드리고 있다.” 

귀국한 지 이듬해인 1971년 11월 24일에 그는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니었다. 망명객으로 한평생을 미국에 살면서 독립운동에 나선 이야기를 토대로 정리한 그의 회고록 “못잊어 화려강산”은 그가 세상을 떠난 2년 후인 1973년에 대성문화사가 펴냈다. 대한민국정부는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는데 그는 지금 국립대전 현충원에 잠들어 있다. 

damien.sohn@gmail.com

07.18.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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