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뉴잉글랜드(New England)의 청교도 운동
로버트 알렌(Roberrt Allen)은 “초기에 온 자들인 뉴잉글랜드인들은 사상적 이익을 위해 왔고, 후기에 온 자들은 물질적인 이익을 위해 왔다”고 했다.
1620년 메이플라워를 타고 온 신대륙 플리머스에 도착한 청교도들이 미국의 포석을 놓았다고 생각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미국의 정신적 기초를 놓은 사람들은 1630년 이후 뉴잉글랜드 즉, 보스턴을 중심으로 이민 온 청교도들이다. 특히 보스턴은 영국군의 보스턴 시민학살 사건, 납세를 거부하는 보스턴 차(Boston Tea Party)사건들이 마침내는 영국과의 독립전쟁으로 이어지고 승리한다. 그러므로 1776년 독립한 미합중국 건국정신의 바탕에 청교도 정신이 흐르고 있다.
뉴잉글랜드(New England)라는 이름은 그들이 떠나온 고국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1621년 청교도들은 포트네(Fortune)호를 타고 32명이 이주했고, 1623년 안네(Anne)호와 리틀제임스(little James)호를 타고 100여명의 이주민이 새로 정착하게 한다. 이와 같이 영국에서 10년 동안 1만8천명의 대 이민(移民)의 역사가 진행되었다. 드디어 1628년 존 윈스럽(John Winthrop)을 중심으로 하는 청교도들(비분리주의자들)은 신대륙으로의 이민을 계획하였다. 1630년에 1000여 명의 이민자가 매사추세츠(Massachusetts)에 도착하여 그곳을 중심으로 성경에 기초한 법을 만들고 개인주의를 경계하면서 공동체의 의를 실현하는 경건한 사회 즉 ‘언덕위의 도시(City upon a Hill)’를 세우고자 했다.
John Eliot: The Man Who Loved The Indians
성경에 기초한 법을 제정하고 성도들이 다스리는 사회를 만들었다. 청교도 비분리주의자들이 중심이 되어 오늘의 보스턴(Boston)을 건설했고 후에 1636년 9월 8일에 목회자 양성을 위해 하버드대학(Harvard University)을 세웠다. 1637년 인디언 사도, 존 엘리엇(John Eliot)이 원주민(인디언) 선교운동을 시작하였고, 원주민을 복음화 하기 위해 인디언 문법책을 출판하고, 청교도 경건 서적과 알곤킨어로 성경을 번역했다.
특히 엘리엇은 선교했던 모든 마을에다 학교를 제일 먼저 세웠다. 존 엘리엇의 헌신과 열정으로 1660년 나티크에 인디언 독립교회 공동체가 세워졌다. 1650년 하버드대학 헌장 초안에는 ‘이 나라의 영국인 젊은이와 인디언 젊은이들을 지식과 경건으로 교육하는데 이바지 한다’고 적혀 있다. 1685년 존 덩턴은 존 엘리엇 선교사를 “모든 뉴잉글랜드의 영광이자 록스베리의 영광”이라고 했다.
여기서 주목할 일은 청교도 지도자들은 경건한 새 사회를 이룩하기 위하여 시민권 부여와 이민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기독교 신자에게만 제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헌장에서 청교도 이주의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선을 위함’이라고 명시했다. 따라서 성도의 자격으로 도덕적 무흠, 신앙의 고백, 회심 체험을 요구하였고, 그들에게만 참정권을 주어 다스리게 함으로써 거룩한 공동체를 이룩하고자 하였다.
그 이후 계속해서 오직 성경에 약속된 자유와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며 미지의 세계를 정복하고 대자연에 감사를 드리는 믿음의 사람들이 신대륙을 많이 찾았다. 그러므로 오늘날 미국 역사의 정신적 지주는 바로 청교도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 이미 신대륙 뉴잉글랜드(New England)에는 매우 정치적이고, 제국주의자들과 야합, 야망에 불타는 육의 사람들 즉, 청교도 정신과 신앙이 희박한 자들도 많이 정착해 있었다. 그 당시 뉴잉글랜드에 정착한 청교도들은 하나님의 법으로 다스리는 신정(神政, Theocracy) 정치 체계를 소망했지만, 뉴잉글랜드는 엄연히 영국의 식민지로서 영국 왕의 통치와 지배를 받는 식민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1682년 뉴잉글랜드의 청교도 자치권이 영국왕실에 의해 취소되면서 청교도의 ‘언덕위의 도시’ 사상은 대 내외적으로 큰 도전을 받게 된 것이다. 결국 이것이 청교도 미주이주 100년도 채 안 되어서 완전 세속화(世俗化, secularization), 타락(墮落)을 가져오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이러한 때 개인적인 경건을 주장하면서 뉴잉글랜드 사회를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우려고 한 사람이 바로 코튼 매더(Cotton Mather) 목사였다.
미국 정신적 기초 놓은 이민자는 1630년 이후 뉴잉글랜드로 온 청교도
거룩한 공동체 이루려 ‘시민권 부여와 이민은 기독교 신자에게만 제한’
더불어 간과(看過)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 당시 신대륙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로부터 시작된 제국주의 해양국가들에 의한 해외식민지들 중 아메리카가 최대 황금어장(黃金漁場)이었다는 사실이다.
콜럼버스의 탐험은 기독교의 전파 혹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진지한 탐구심이 아닌 각종 향신료의 수입을 위한 인도(India)와의 교역으로 얻을 수 있는 금과 보물이 가장 큰 이유였다. 스페인 이사벨(Isabel I) 여왕과 체결한 계약 내용처럼 그의 탐험은 1)기사와 제독 작위 2)발견한 땅을 다스리는 총독의 지위 3)얻은 총 수익의 10분의 1 소유 등 부(富)의 축적(蓄積)이었다. 특히 콜럼버스는 15세기말 제1회 항해(1492.8.3)의 대 성공후, 제 2차 항해(1493년) 때에는 17척의 대선단으로 출항한다. 탑승자 1200명 대부분은 황금이 주 목적이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금 산출량이 적자 대신 인디언(Indian)들을 노예화, 반항하는 원주민을 학살, 식민지화한다. 즉, ‘아메리카원주민’(Native American)들에 대한 ‘홀로코스트(Holocaust, 집단학살)’의 전주곡(前奏曲)이 시작된 것이다.
또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의해 고용된 헨리 허드슨(Henry Hudson)은 1609년에 지금의 뉴욕 시와 그의 이름을 딴 허드슨강 일대의 땅을 지금의 올버니(Albany) 북쪽까지 탐험한다. 네덜란드인들의 최초의 관심은 모피무역이었다. 이 목적을 위해서 네덜란드인들은 모피가 나오는 오지에의 접근을 막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이로키 인디언 5족’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1617년 네덜란드의 정착민들은 허드슨 강과 모호크 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요새를 건설했는데 그곳이 지금의 올버니(Albany)이다.
현재 세계의 경제, 금융 심장의 도시인 맨해튼(Manhattan, “많은 언덕의 섬”)은 1625년 레나페족(Lenape) 인디언들에게 맨해튼 섬을 24달러의 물품과 교환한다. 이 섬은 네덜란드의 소유가 된 즉시 ‘뉴암스테르담(New Amsterdam)’으로 명명된다. 그러나 1664년, 영국-네덜란드 전쟁으로 잉글랜드가 뉴암스테르담을 점령하였고, 요크 공작의 이름을 따서 뉴욕(New York)으로 변경된다. 이와 같이 신대륙 아메리카는 청교도들이 1620년 이주 전부터 제국주의 열강 해양 국가들을 위한 로또(Lotto)와 같은 황금 식민지였다.
[참고] 미국에 공식적으로 가장 먼저 정착한 사람들은 청교도들보다 13년 앞서 1607년 5월 버지니아의 제임스타운(Jamestown)에 ‘수잔 콘스탄트’(Susan Constant)호를 타고 도착한 104명의 영국인들이었다. 그러나 1622년 3월 22일 포우하탄(Powhatan) 인디언들 습격에 의한 제임스타운 학살(Massacre) 사건 발생으로 철수한다. 플리머스가 건국의 상징으로 남게 된 것은 그에 앞서 1607년 버지니아주 체사피크 만의 제임스타운에 닻을 내렸던 첫 정착민들의 실험이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바닷가 늪지대에 104명의 영국인들이 정착한 이후 1624년 제임스 1세가 제임스타운을 건설한 버지니아 주식회사를 해산하기... 제임스타운의 짧은 역사는 영광과 수난의 연속이었다. 제임스타운 개발은 당시까지 스페인이 주도권을 잡고 있던 북미대륙에 식민지 건설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한 영국의 실험이었고, 정착민들이 대서양을 건넌 주된 동기는 돈이었다. 즉, 식민지를 건설, 옥수와 포도주, 원목 등을 본국에 팔자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6개월간의 항해 끝에 낯선 땅에 도착한 영국인들은 알곤킨족(Algonquian) 인디언과 스페인 군함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모기떼가 극성을 부리는 바닷가 늪지대에 마을을 조성했다. 물물교환을 통해 식량을 얻기도 했지만 때로는 빼앗기도 했다. 인디언들이 작심을 하고 식량을 끊었을 때 정착민들을 가축은 물론 인육까지 먹어야 했다. 굶주림과 장티푸스, 이질 탓에 1610년까지 20여명만이 살아남았다. 그 후 150명의 인력이 추가 파견되고 세모꼴의 요새를 건축하면서 조금씩 적응해 나갔다. 그러나 평화가 깨지고 1622년 인디언들의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되자, 주민들은 결국 제임스타운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07.11.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