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 9월 12일에 트레이시 로즈가 작성한 제 1차 세계대전 징집 서류에 따르면 박 선(Sun Park)은 1886년 5월 27일에 한국에서 태어났다. 그의 친척 가운데 평안남도 강서군에 박래K가 있었는데 박 선이 태어난 곳이 바로 평안남도 강서군이 아닌가 싶다. 본 서류에는 그의 인상착의를 소개하고 있다. 상중하에서 그의 키는 중에 해당했고, 체구는 역시 중에 해당했다. 그는 상항을 통해 도미하여 나성을 거쳐업 랜드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업랜드는 나성에서 보면 동쪽으로 40마일이 미처 되지 못하는 곳이다.
업랜드 한인장로교회 전도사
박 선은 가주 한인장로교회를 담당한 순행 전도목사인 민찬호의 지도하에 업랜드 한인장로교회를 목회하는 전도사였다. 그러나 그는 한인 사회나 미국 사회에서 목사라고 불렀다.
1915년 4월에 업랜드 제일장로교회에서 10년 동안 한인 노동자와 한인교회를 위하여 수고한 스트왓 부인에게 감사하는 예배를 드렸다. 업랜드뿐만 아니라 인근 클레몬트의 한인들과 6, 70명의 지역 백인이 참석했으니 약 100명이 모인 듯싶다. 본 감사예배의 순서 중 박 선이 찬사를 담당했다. 본 감사예배는 할렐루야로 일동의 개회 찬미에 이어 백인 목사 알리손이 기도한 후 박 선 목사의 찬사 순서가 있었다. 그의 찬사 후에 민찬호 부인, 강영승, 이요섭, 임보패 등의 독창이 있었으며, 픽손 부인, 쿡 부인, 본 예배의 주인공인 스트왓 부인과 리 부인의 4중창이 있었으며, 강영각의 나발 독주가 있었고, 팜어 여사의 바이올린 연주, 그리고 곽림대, 이종희, 백인 헌트 목사, 스토온 목사, 스트왓 부인, 사전트의 연설이 있었다. 감사예배 이후 여흥이 이어졌다.
1915년 6월은 두 번의 경사가 있었다. 그달 5일 하오 7시 30분에 클레몬트 한인양성소에서 금번 하기에 졸업한 본 양성소 학생 이원석과 이순복 등 두 명의 학생을 위하여 내외 빈객 6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졸업생 위로회가 있었다. 이날 박 선이 축사했다. 전체 절차는 찬미와 기도 후 곽림대의 개회사, 회중의 국가, 박 선과 지성진과 백인 패던, 스투왓 부인 등 4명의 축사, 미국 여학생 단체의 창가, 길턴어의 연설, 임보패의 창가, 이원석의 정빈 연설, 히스킨스 부인의 창가, 이순복의 정빈 연설, 합킨쓰와 강영각의 악기 연주, 이종해의 소설, 합킨쓰와 강영승과 강영각의 음악 과텟, 곽림대의 본소 장래 정황 그리고 군악대의 군안 후 폐회했다. 그리고 이튿날에는 업플랜드의 임준기가 딸을 낳아 또 다른 경사를 맞았다.
나성 한인장로교회 전도사
국민회 나성지방회가 1917년 8월 29일에 나성에 거주하는 100여 명의 한인이 모여 그날 밤 8시 30분에 국치기념일을 개최했다. 이날 박 선은 전도사로 소개되었는데 마지막 순서인 폐회 기도를 담당했다. 국가로 개회한 국치기념일의 순서는 아래와 같았다. 회장 이영수의 취지 설명, 김마태 부인의 ‘목적을 다하세’ 독창, 박순애 부인의 ‘우리의 감상’ 연설, 황사근의 ‘한반도야’ 독창, 국치적립금 기부, 서명옥 부인의 ‘목수회포가’ 독창, 민찬호 목사의 연설, 정등엽의 국치적립금 보고, 부인 창가대의 ‘고국 사모’ 찬양, 연설, 폐회기도였다. 이날 부인 창가대와 연설이 가장 특색이 있어 경청했다고 한다.
다뉴바 한인장로교회 전도사
박 선은 1917년이나 1918년에 한인 노동주선인 김병구에 의해 다뉴바로 이주하여 농장 노동자로 활동했다. 1918년 9월 12일에 제출한 제1차 세계대전 징집서류에서 그는 자신을 목사라고 소개했다. 그러나 그는 오늘날의 전도사로 재직했을 것이다. 또한, 그는 다뉴바 국어학교 교사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박 선이 제1차 세계대전 징집서류를 제출하던 그 날 중국 산동 선교사였던 사병순 목사도 제1차 세계대전 징집서류를 제출하였는데 그도 다뉴바 목사라고 소개했다. 사병순은 다뉴바 한인장로교회의 안수 받은 목사였고, 박 선은 사병순과 동역하는 전도사로 보면 될 것이다. 가주 한인장로교회 순행 전도목사 민찬호의 지도하에 이들 목사와 전도사가 다뉴바 한인장로교회를 섬겼다고 보면 된다.
위에서 언급한 1918년 10월 12일에 개최한 다뉴바 지방회의 보고에 한국어 학교에 대한 보고도 있었다. 1반에 6명, 2반에 4명, 3반에 3명 총 13명의 학생이 등록하였고, 과목은 국문 첩경, 수신선, 초학 첩경, 대한역사, 습지, 작문, 찬미 그리고 편지법 등 8과목이었다. 등록한 이들 13명의 학생이 본 교회 주일학교 학생이었을 것이다.
다뉴바 지방회 구제원(한인 위생국) 장덕오의 보고에 의하면 1919년 2월 다뉴바에 스페니시독감에 걸려 고생한 자가 61명이었고, 사망한 자가 2명이었다. 당시 한 집에 여러 명의 한인이 거주하였는데 한 집에서 7명이 앓은 집이 한 집이었고, 6명이 앓은 집이 한 집이었고, 5명이 앓은 집이 세 집이었고, 2명이 앓은 집이 두 집이었다. 이들 집을 위하여 심방하거나 여의치 않으면 기도하였을 박 선 전도사의 모습이 상상된다.
1919년 2월 8일 다뉴바지방회 통상회 보고에 따르면 서기와 법무원과 학무원 담당자가 각각 사면하여 다른 사람으로 선출하였다. 이중 학무원 사병순 대신에 김관유로 대체되었다. 사병순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고 한승곤이 목사로 추대되었을 것이다. 박 선은 전도사로 계속 본 교회를 섬겼다.
그해 3월 1일 삼일만세운동의 소식을 듣고 성대하게 독립을 경축했다. 당시 신한민보의 보도에 따르면 “다뉴바에 거류하는 우리 동포들은 중앙 총회장 안창호씨의 전보를 받고... 기쁨과 슬픔이 어울려 어떤 동포는 취하듯이 정신을 진정치 못하며, 어떤 동포는 너무 기뻐서 울기도 하며, 또 어떤 이는 아무 말도 없이 일변으로 6, 7인 동포들은 자행거(자전거)를 타고 농장으로 순행하며 부근 동포들 모아 독립 경축회를 열기로 준비할 새 농장에서 일하던 동포들이 혹은 낫을 던지고 들어오며 혹은 호미를 던지고... 독립 경축회에 참석하였으므로 잠시 동안에 내외국인의 모임이자 250여 명이라... 땅총을 천지가 진동하도록 놓으며 일변 경축예식을 거행하였는데 그 절차는 아래와 같더라.”
독립경축 행사는 개회, 국기, 김성권의 기도, 신한국 만세, 취지 설명, 창가, 박영로의 연설, 한영숙의 창가, 이원석의 창가, 연설, 국어학교 생도의 창가 그리고 폐식으로 이어졌다. 이날의 독립 경축식에 박 선도 참석했을 것이다.
다뉴바 한인교회 주일학교 교사 중에 백인 란들리가 있었다. 그가 친한을 살피려고 동방으로 여행하게 되었는데 본 교회 교인 일동이 다뉴바장로교회의 백인 목사와 교인들을 초청하여 1919년 5월 5일 저녁 8시 30분에 그의 전별회로 모였다. 이는 한승곤 목사와 박 선 전도사의 노력의 산물이었을 것이다. 란들리는 한국인의 정형을 생각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한국의 삼일독립만세운동에 동정을 표하고 스스로 백인에게 한국의 정의를 힘써 증명하겠다고 하였다고 한다.
다뉴바 한인장로교회의 교인 임성택의 가정에 딸 임제시가 1919년 5월에 다뉴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의 아들 임요한이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등 졸업 경사가 있었다. 본 교회는 그들의 근면과 열심 수학에 찬사를 보냈고 다뉴바 지방회와 다뉴바 부인회와 함께 졸업생 경하식을 거행했다. 이날 박 선이 권설(권면)을 담당했다.
개회에 이어 한승곤 목사가 기도하였고, 지방회장 이범영이 취지를 설명하였으며, 김숭현이 바이올린 독주를 하였고, 한시대가 연설을 하였으며, 이원석이 노래를 하였고, 부인회 회장 강원신이 시상을 한 후 박 선의 권면이 있었다. 박 선의 권면 이후 중학교 졸업생 임제시가 답사를 하였고 이어서 임제시가 창가를 불렀으며, 그리고 국가를 부름으로 폐회했다. 그리고 임성택은 새로 마련한 주택에서 한인 100여 명을 초대하여 만찬회를 벌였다.
그해 7월 정봉화가 추행으로 쫓겨났고, 오태선 부부가 이혼하면서 그 집에 화재가 발생하는 등 다뉴바 한인 사회는 뒤숭숭한 달이었지만, 의미 있는 일도 있었다. 상무 정신으로 무장한 임공선, 김진성 그리고 이도신이 1차 세계대전에 자원하여 입대하여 그달에 다뉴바 한인장로교회에서 한인 100여 명이 모여 전별회가 있었다. 찬송을 부른 후 박 선이 기도했다. 박 선의 기도 이후 이순기 주석의 취지 설명, 이원석의 독창, 임공선의 연설, 김승현의 바이올린 독주, 김진성의 감사담, 학생들의 창가, 이도선의 연설, 허순복과 허순택의 창가, 이범영의 작별가, 한상호의 테너 솔로, 임공선 모친의 ‘성공하면 섭섭이 없소,’ 강영각의 군가 나팔 독주 그리고 일동의 작별가로 폐회했다. 이들 세 명의 자원 입대자는 그달 16일에 다뉴바를 떠나 상항 훈련소로 갔는데 그들은 “장차 대한독립군의 자격을 예비하여 기회를 지어 시베리아, 만주에서부터 왜적과 싸워 우리 강산에서 외적을 몰아 쫓을 결심”이었다.
다뉴바에 ‘포도 따러 오소’라는 광고가 있던 그해 7월 8일에 다뉴바 하기 학생회장 김창만이 신한민보에 다뉴바 하기 학생회 소집 광고를 냈다. 그런데 이 광고에 박 선의 주소인 다뉴바 사서함 505를 소개했다. “국가 운명이 가장 위급한 때라 고생과 적막에 싸였던 학우들로 하여금 사랑과 뜨거운 정의를 나누게 하려는 동시에 국가 대사에 원조적 방침을 연구하기 위하여” 1919년 8월 14일부터 16일까지 네 회의와 두 연극회가 있었다. 애국회는 16일 오전 11시에 170여 명이 모인 가운데 본 교회에서 박 선의 사회로 있었다. 주석의 개회사에 이어 태극기와 성조의 게양, 일동 국기가 합창, 일동 국기에 대한 경례, 한장호의 만세, 기념사진, 국가합창, 서재필 박사의 축하문 낭독, 중앙총회의 국기 전개식, 흥사단의 축전낭독, 국민회 청년 혈성단 대표 김정진의 축사, 다뉴바 지방회장의 축사, 북미총회 학무원 이살음 목사의 연설 ‘애국 국민이 됩시다’ 등이 있었다.
그해 8월 8일 하오 8시에 본 교회에서 북미한인교회 공의회가 있었다. 본 공의회 회장에 민찬호 목사였고, 서기에 한승곤 목사였다. 박 선은 북미한인교회 공의회가 모인 다뉴바 한인장로교회 전도사였으므로 뒤치다꺼리는 그의 몫이었을 것이다.
장인환 의사는 1908년 3월 대한제국 외교고문임에도 일제의 대한제국 병탄을 노략한 덜함 W. 스티븐슨을 저격하여 사망케 함으로 일급 모살혐의로 투옥되었다. 그의 모범적 수형생활과 국민회의 석방운동으로 10년만인 1919년 1월 10일 장의사는 가석방되었다. 그해 8월에 장의사를 도와준 스미트와 맥코믹에게 감사 전보를 보냈는데, 이 감사 전보에 박 선이 국민회 다뉴바 지방회장 이점영과 한인부인 애국단장 한영숙과 함께 서명하였다.
박 선은 다뉴바 한인장로교회의 전도사로서 제1차 세계대전 징집서류를 작성한 1918년 9월부터 장의원과 스미트와 맥코믹에세 감사 전보를 보낸 1919년 8월까지 약 1년 본 교회를 섬겼는데 아마 1년 이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박 선의 이후를 찾기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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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7.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