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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와 교회 [ 1 ]

[편집자주: 이 글은 퀸즈장로교회(담임 김성국 목사) 기획위원회가 본 교회를 위해 작성한 것으로 교회의 동의를 얻어 본지가 연재한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지구촌을 뒤덮고 있다. 사람들은 지난 몇 주 동안 생활 방역수칙을 성실하게 지키고, 고강도 ‘사회적 거리두기’를 이행하며 감염 방지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 결과 확진자 수는 줄어들고 있다. 이제 사람들이 실제 바이러스 감염보다 더 두려워하는 것은 코로나 팬데믹(pandemic)이 가져다 준 ‘불확실성’이다. 불완전한 정보나 미지의 정보를 토대로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이다.

대다수 학자는 최근의 시대 구분을 BC(Before Corona)와 AC(After Corona)로 할 만큼 전 세계가 코로나 전후로 급변될 것이라 예측하고 있다. 이처럼 불확실성 시대에 교회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까? 또한, 교회 지도자들은 교회 구성원에게 어떤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을까?

150여년 동안이나 방치되었던 예루살렘 성벽을 탁월한 리더십으로 52일만에 재건했던 느헤미야, 그는 성벽 재건이라는 비전을 이루기 위해 많은 준비 작업을 거쳤다. 그가 아무리 위대한 리더라도 철저한 계획과 사전 조사가 없었다면 성벽 재건이 쉽게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코로나 19로 인해 우리 가운데 무너진 성벽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이제는 무너졌던 성벽을 바로 세우기 위해 지금부터 무엇이 무너졌는지 철저히 파악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후 함께 기도하면서 머리를 맞대고 상황을 냉철하게 분석함으로 무너진 성벽을 바로 세우는 재건 작업을 반드시 성공시켜야 할 것이다.

교회는 여전히 세상의 유일한 희망이다. 그리고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며, 지금도 우리를 통해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고 계신다. 코로나 19의 위기를 기회로 여기고, 새롭고 기대 가득한 미래로 나아감으로 시대의 변화 속에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교회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해야 할 것이다. 많은 기사와 논설을 수집하고 발췌, 정리한 이 보고서가 코로나 이후 우리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정립하고 교회에 주어진 과제를 완성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코로나19를 대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세

 

많은 사람이 코로나바이러스의 확산으로 인하여 염려하는 때, 교회 역사에서 전염병이 확산되었던 비극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돌렸던 세 가지 역사적 사건을 살펴보면서 교훈을 얻고자 한다. 서기 165-180년 사이에 일어난 전염병으로 급격한 인구 감소를 초래했다. 10년 이상 동안 로마제국의 인구는 2천5백만명 감소하였다. 정확히 같은 시기에 교회는 거의 50만 명이 성장했다. 이 전염병이 확산되는 동안 교회가 왜 성장했는지 정확하게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의심할 바 없이, 기독교인들은 아픈 사람들을 돌보기 위하여 삶과 죽음 그 사이에 서 있었다.

3세기 로마제국에 영향을 준 또 다른 전염병이 창궐했을 때, 교회 역사학자 유세비우스(Eusebius, 260-340)는 서기 263년에 있었던 전염병의 확산 과정에서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행동했는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기독교인들의 대부분은 넘치는 사랑으로 형제와 같은 친절을 아끼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를 굳게 붙잡고 격려하며, 병든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찾아다녔으며, 그리스도를 섬기면서 지속적으로 사역하였다. 기독교인들은 전염병에 걸린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감수하고, 전염병에 걸린 이웃을 도우면서 기꺼이 고통을 받았다. 그리고 전염병에 걸린 사람들과 함께 행복하게 죽었다. 환자들을 돌보며 많은 사람을 격려했던 기독교인들은 스스로 다른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다.”

13세기 후, 유럽의 페스트 전염병이 확산되는 시간에도 다르지 않았다. 전염병이 확산되고 있는 위기 속에서 마틴 루터는 전염병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살피면서 다음과 같이 교회를 격려하였다. “나는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여, 우리를 보호해 달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나는 먼저 소독을 하고, 공기를 정화시키고, 약을 투여하고, 약을 복용할 것입니다. 나는 먼저 나 자신이 전염되지 않기 위하여 필요 없는 장소를 가지 않고, 사람들을 피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또한 나의 부주의로 인하여 다른 사람의 죽음을 초래하지 않아야하기에 다른 사람들을 감염시키거나 오염시키지 않아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나를 데려가기 원하신다면, 그는 틀림없이 나를 찾으실 것이며, 하나님이 나에게 기대하신 대로 행동하였다면 나는 내 자신의 죽음이나, 다른 사람의 죽음에 대한 책임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웃이 나를 필요로 한다면, 나는 어떤 장소와 어떤 사람도 피하지 않고 갈 것입니다.”

 

코로나19, 복음 전파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오늘날 코로나바이러스가 창궐한 이 시대에도 틀림없이 하나님은 선한 일을 행하고 계신다. 교회가 그동안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역을 쉬지 않고 수행함에 따라 천국은 가까워지고 있다. 그리고 그 사명은 바뀌지 않았다(행1:8). 오늘날 우리가 알 수 있듯이, 전 세계 인구의 3 분의 2가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21억의 인구가 복음의 범위를 완전히 벗어나 있는데, 이 숫자는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지금도 증가하고 있다. 지구상에 살고 있는 269개의 서로 다른 민족은 아직도 선교사를 접촉한 적이 없다.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한 두려움과 과잉 반응으로 그리스도인들이, 그리고 교회가 복음 전하는 일을 주저한다면 온 민족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사역은 더딜 것이다.

위기의 시기에도 교회는 하나님의 복된 소식을 알려야 할 사명을 계속 이행해야 한다. 모든 종족, 민족, 언어, 그리고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예배하는 것을 보기 위해(계 5:9), 하나님과 그분의 사명에 함께 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초기 기독교인들처럼 우리 자신의 희생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코로나19, 우리가 한 운명공동체, 예배공동체임을 깨닫게 해준다.

 

구약 성경에서 전염병에 대응하는 주된 방법은 환자의 격리였다. 예를 들면, “만일 사람이 그의 피부에 무엇이 돋거나 뾰루지가 나거나 색점이 생겨서 그의 피부에 나병 같은 것이 생기거든 그를 곧 제사장 아론에게나 그의 아들 중 한 제사장에게로 데리고 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환자를 이레 동안 가두어둘 것이며 이레 만에 제사장이 그를 진찰할지니 그가 보기에 그 환부가 변하지 아니하고 병색이 피부에 퍼지지 아니하였으면 제사장이 그를 또 이레 동안을 가두어둘 것이며”(레13:2-5) 이처럼 전염병 환자를 격리하고 관찰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격리된 이들이 공동체로 돌아오도록 하는데 초점을 두고 치유하셨다. 부정하다고 여겨지던 나병 환자들을 만져 깨끗하게 하신 후 공동체로 돌려보내시고, 부정하다고 여겨지던 혈루증 앓던 여인이 자신의 옷을 만지고 병이 나은 것을 믿음의 행동으로 칭찬하셨다. 뿐만 아니라 병든 친구를 위해 네 명의 친구들이 지붕을 뚫고 모임에 들어온 것을 보시고 행동으로 표현된 믿음을 칭찬해 주셨다. 예수님은 이처럼 몸의 질병보다 사회적 격리를 더 안타까워하셨다. 병이 낫는 것을 넘어 관계를 회복시켜 주신 것이다.

코로나19로 인해 사람들은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고, 관계의 귀중함을 다시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많은 사람이 감염되고 죽어 가는데 아직 내가 건강하게 살아 있는 것은 내가 무엇을 잘해서가 아니다. 아무리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고 위생규칙을 잘 지켜도 감염되어 죽는 사람이 있다. 게다가 다른 이들을 치료하고 구하려다가 죽는 사람도 많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코로나19로 죽지 않아도 언젠가는 죽게 된다. 그러나 누구라도 고독하게 죽어서는 안된다. 예수님은 몸만 죽이고 영혼을 죽이지 못하는 그 어떤 것, 예를 들면 코로나19와 같은 전염병을 두려워하지 말고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보내실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하신다(마10:28). 

성경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표현은 하나님을 무서워한다는 뜻이 아닌, “하나님에 대한 경외”(이르아트 아도나이)를 표현하는 “예배를 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코로나19 때문에 격리된 이들이 외롭지 않게 그들도 하나님을 알고, 예배하며, 영광 드릴 수 있도록 돕는 일이 이 시대에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몫이다. 

그런 의미에서 많은 교회가 미디어를 통해 예배를 드리는 것은 오늘날의 코로나19에 대응하는 것을 넘어, 여러 이유로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다시 돌아와 예배를 드리고, 공동체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온 인류가 두려움에 떨고 고독에 잠겨 있는 이 때,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헌신을 통해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고, 공동체 관계 속에 서로를 돌봄으로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했던 이들을 다시금 예배로 초청하는 기회로 삼는다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그리고 이것이 코로나19를 만난 우리가 그것을 대하는 성경적인 자세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이 글의 일부는 https://ephesiology.com/blog-post/coronavirus-and-history/를 참조한 것입니다.] 

 

코로나19와 주일예배

 

코로나19 확진자를 통해 집단 감염과 지역사회 감염이 확산되는 가운데 정부의 행정 명령에 따라 미국 대다수의 교회가 문을 닫았다. 미국 뿐 아니라 세계 교회들이 주일예배를 인터넷과 가정예배로 대체하였고 한국에서도 각 교단 총회차원의 대응 지침과 성명서들이 쏟아져 나왔다. 주일예배와 관련하여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지 목회자들과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며, 이번 사태가 진정된 이후에도 “교회와 예배”에 대한 신학적 논쟁은 계속될 것 같다.

 

1. 공적 예배의 중요성

주일예배에 있어 강조되어야 할 내용은 크게 3가지이다. 그것은 주일예배가 공적 예배라는 점과 공동 회집 그리고 장소성에 있다. 안식일로서의 주일은 다른 날과는 구별된 날이고, 기억하여 거룩히 지켜야 할 날이다(출20:8).

주일은 주중 하루의 전체를 하나님을 예배하며 거룩히 지키는 날이다. 이것은 적절한 정도의 시간을 따로 구별하는 자연의 법칙과도 모순되지 않는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1장 7항). 개혁교회들과 청교도들은 주일성수를 강조해왔다. 또한 주일예배는 공동 회집의 예배이다(예배지침 2장 4조). 주일예배는 사적 예배나 개인 예배가 아니다. 모든 교회의 구성원들이 함께 모이는 공적 집회의 예배이다. 

다음은 장소의 문제이다. 공동회집 예배는 반드시 장소가 관계되어 있다. 물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장소에 따라 더 잘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신약의 예배는 영과 진리 안에서의 예배이기 때문이다(요4:24). 그럼에도 하나님은 공적 예배의 모임을 명하신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1장 6항).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안식의 날인 주일에 제가 부지런히 하나님의 교회에 나아가 하나님 말씀을 듣고 성례에 참여하며 주님께 공적으로 기도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기를 명하십니다”라고 답한다(103문답).

이처럼 신앙생활에 있어서 공예배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구체적인 한 장소에 모여서 유일하시고 참되신 삼위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동체가 교회이다(신4:10). 주의 이름으로 모인 곳(마18:20), 즉 말씀이 선포되고 성례가 시행되는 곳에 교회가 있다. 따라서 성도는 모이기를 폐하지 않고 힘써 모여야 한다(히10:25). 신앙고백서도 신자는 어느 곳에서나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고, 또 할 수 있지만, 공적 집회에서 더 엄숙하게 예배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집회를 임의로 소홀히 하거나 저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친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1장 6항). 성도는 질병 혹은 감염의 이유로 발생한 다양한 상황 속에서도 마음으로는 모여 예배하는 것을 더욱 사모해야 하며 혹여 예배에 참여하지 못하더라도 이를 안타깝게 생각해야 한다.

 

2. 불가피한 상황과 부득이한 일

공예배가 지극히 중요하지만, 신앙고백서가 가르치고 있듯이 공예배를 절대화시키는 위험에 빠져서도 안 된다. 무지와 미신에 빠져있었던 중세시대의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지켜주실 것이라고 믿고 예배당으로 몰려들기도 하였지만, 그것이 오히려 전염병을 더욱 확산시켰던 역사적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종교개혁가들도 주일성수에 대하여 매우 엄격한 입장을 취하였다. 하지만 전염병이 돌았을 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규범을 벗어나지 않는 한 피신은 가장 지혜로운 방법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용한 방법이라고 생각하였다. 비록 칼빈이나 루터와 같은 목회자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남아있는 환자들을 돌보기도 하였지만 성도들이 예배당을 떠나 피신하는 것을 금하지 않았다.

교회가 추가 감염을 예방하고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해 성도들을 일정기간 격리시키는 것은 성경에도 근거한 것이다. 레위기 11-15장의 정결법은 부정하게 된 사람이 성막과 공동체를 더럽히지 못하도록 진영 밖으로 격리시키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규정들은 히브리서 10:19-22에서 말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과 믿음과 회개를 통해 성도들이 제의적으로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정결한 몸과 마음을 얻게 됨으로 근본적으로 성취되었다. 하지만 레위기 15:31, 민수기 5:2-3, 19:20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공동체를 전염병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정결법 제정의 목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적용될 수 있다. 교회와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해 감염병에 걸렸거나 감염이 의심되는 성도들의 예배 참여를 제한하는 것은 위의 말씀들을 적절하게 실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영상이나 예배문으로 예배를 대체하는 것은 본래 공예배의 원리와 목적에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예외가 될 수 있다. 소요리문답은 “안식일을...공적으로 개인적으로 예배하는 데 사용함으로써 거룩하게 지킬 수 있습니다. 다만 불가피한 일과 자비를 베푸는 일은 예외로 합니다”라고 쓰고 있다(60문답). 대요리문답도 “부득이한 일과 자선 사업에 쓰는 일을 제외하고”(117문답)라고 했다. 부득이한 일은 피할 수 없는 일, 다른 날로 연기할 수 없는 일, 집에 화재가 발생했거나, 응급환자가 발생했거나 강도가 들었다면 그 일을 먼저 처리하는 것 등은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상황이 과연 불가피하고 부득이한 일인가? 일반적으로 확실히 작금의 상황은 비상적이다. 그러나 이런 비상적이고 심각한 상황조차 일반화의 오류를 저지를 위험이 있다. 모든 지역의 상황이 동일하게 일반적이지 않고, 모든 교회의 상황이 동일하게 일반적이지 않다. 따라서 그 대처와 조치 역시 각각 달라야 한다.

 

3. 당회의 직무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아주 부득이한 상황 속에서 교회가 공예배 외에 다른 형태의 예배를 시행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난다고 볼 수 없다. 하지만 이와 같은 예배들이 공예배의 중요성을 약화시키지 않도록 매우 제한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 점에서 당회의 중요성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교회정치 121조 2항은 교회의 제반 예배를 주관하는 것을 당회의 직무로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공예배 외의 특별한 형태의 예배들은 편의적이거나 자의적으로 시행되어서는 안 되며, 당회의 결정과 감독에 따라 질서 있게 시행되도록 해야 한다. 당회는 바르고 신속한 결정을 통해 성도들이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하며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지 않는 한 당회의 결정에 순종하고 따라야 한다.

 

<다음호에 계속>

05.23.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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