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엘리자베스(ElizabethI, 1558-1603)의 중용(Via Media) 정책
1558년 피의 여왕 메리가 죽자 그의 여동생 엘리자베스가 왕위에 취임했다. 그녀는 1559년 헨리 8세가 1534년에 발포한 수장령을 다시 반포하면서 교회와 국가를 동시에 다스리는 강력한 군주가 되고자 했다. 그것이 곧 당시 제국주의자들이 바랬던 이른바 황제교황주의(Caesaropapism)였다(서청원, 청교도 신학과 신앙, pp. 33-34).
그녀는 45년간 재위하면서 종교중용(Via Media) 정책을 펼쳤다. 즉 교회 예전과 의식은 가톨릭교회 입장을, 신학은 칼빈주의적 전통을 추구하였다. 이에 루이스 스피츠는 종교개혁사 (The Reformation)에서 “이 기간 동안 영국은 완전히 프로테스탄트가 되었을 뿐 아니라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의 지도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고 했다.
1559년 그녀는 수장령을 선포하여 자신이 영국교회의 머리라고 선언하였으며, 1549년에 출판된 공동기도서를 영국 교회가 받아들일 것으로 명하고, 에드워드 6세의 제 2기도서를 수정하여 발행하였다. 여왕은 1563년 42개조 신조를 개정하여 39개조 신조로 만들었고, 1571년에는 설교 지침서를 간행하여 설교자들의 설교 모범으로 삼게 했다. 예배 참석을 국민의 의무로 간주하여 주일이나 성일에 시행되는 교회의식에 한 번 빠지면 누구나 노동자의 일주일 임금에 해당하는 1실링의 벌금을 물도록 했다.
영국교회는 헨리 8세 때, 수도원의 몰수와 종교적 기관의 해체로 인하여 그 하부에 감독이나 교권에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교회를 장악하지 않고는 국사를 제대로 운영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영주들이 가진 교권을 감독들이 소유하게 하여 교권을 중앙 집권화 함으로써 교회를 장악하고자 했다. 이러한 여왕의 정책은 교회의 지도자들과 귀족들의 반발을 사서 리스터의 백작(Earl of Leicester), 월터 마일드메이 경(SirWalterMildmay)과 프란시스 윌싱햄 경(Sir Francis Walsingham)과 같은 고위층들은 여왕의 교회정책을 비판하는 반면에 종교개혁자들을 후원했다(오덕교, 청교도이야기, pp.16-17).
엘리자베스 시대에 카트라이트(Thomas Cartwright)는 장로주의를, 로버트 브라운(Robert Brown)은 분리주의(Separatism, 회중파 청교도)를 제창했다. 메리의 박해를 피해 대륙에 피신하였던 800여명의 개혁자들이 대거 귀국했다. 그들은 대륙교회, 특히 칼빈의 제네바 교회를 모델로 하여 교회와 사회 전반을 하나님 말씀으로 개혁하고자 하였다.
토마스 풀러 박사(Dr. Thomas Fuller)는 그의 역작 ‘교회사’에서 청교도란 말이 최초로 사용된 연도를 1564년으로 추측했다. 그 이유로 교회법으로 영국의 감독들이 기도서와 의식들, 그리고 교회의 규율에 서명하도록 강조하자 거부한 사람들을 악명 높은 청교도라고 낙인 찍은 데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까다로운 사람들’(Precisian), ‘청교도’(Puritan), ‘장로교도’(Presbyterian)라는 용어들은 모두 대감독 파커(Parker)가 이 당시에 그의 문헌들 속에서 똑같은 한 집단을 각기 다른 별명으로 부른 용어들이다(James Heron, 청교도 역사, p. 26). 성공회 당국은 이와 같은 성경 중심적인 개혁운동을 전개하던 이들을 까다로운 사람들(Precisians), 또는 청교도(Puritans)라고 칭했다.
1570년대 청교도 운동은 구체적인 영국 국교회(성공회) 개혁으로 눈을 돌렸다. 즉, 청교도들은 교회개혁의 우선순위를 영국 국교회 안에 남아 있는 미신(迷信)적인 요소를 제거하는 것으로 삼았다.
그들은 영국교회 안에서 시행되는 십자가 성호를 긋는 행위, 산파에 의해 유아세례, 견신례, 성찬상 앞에서 무릎을 꿇는 행위, 성찬식에 사용한 떡을 치료제로 환자에게 주는 것, 해산 후 여인의 정결예식, 사제나 사면과 같은 단어의 남용, 성자들의 날을 기념하는 것, 예수라는 이름이 불려질 때마다 무릎 꿇는 행위는 미신적이요, 인위적이요, 비성경적이라 주장했다.
이와 같이 청교도운동이 강화되고, 감독(주교)주의가 몰락하자 위협을 느낀 엘리자베스 여왕은 목회자의 복장제도를 강화함으로써 교권을 회복하기 위해 켄터베리 대주교에 매튜 파커(Matthew Parker)를 임명하고, 모든 성직을 맡은 자는 성직자 복장을 착용하라 명령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목사들이 이에 반대하므로 엘리자베스의 감독(주교)주의 복원 노력은 실패했다. 이렇게 개혁에 대한 청원이 계속되자 여왕은 대주교 파커에게 청교도 박해를 다시 명령했다. 그 결과 많은 청교도 목사가 목회지를 잃었고, 박해를 피하여 다시 대륙으로 피신하였다.
1575년에 매튜 파커가 사망하자 엘리자베스 여왕은 에드먼드 그린달(Edmund Grindal)을 켄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했다. 청교도들은 그린달을 동지로 보고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뜻 깊은 교회개혁의 때가 왔다고 믿었다. 청교도주의에 대한 엘리자베스의 혐오에도 불구하고 그는 성직자의 설교 기능을 장려했고, 제네바 성경(Geneva Bible, 파커는 제네바성경의 칼빈주의적 주석을 싫어했다)이 영국에서 인쇄되었으며 그린달은 목사의 교육 수준을 향상시키는 데에도 열심이었다(Allen Carden, 청교도정신, pp.19-20). 이와 같이 그는 청교도들 집회의 교육적 가치를 인정하고 매우 호의적이었다.
특히 그는 여왕이 “그(청교도)들을 탄압하라”는 명령을 거부했다. 대신 그는 여왕에게 “기억하십시오, 여왕 폐하! 당신은 생명이 유한한 존재이며… 그리고 비록 당신이 막강한 군주라 해도 하늘에 있는 그 분은 더욱 막강하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라고 썼다. 그린달이 이렇게 여왕을 비판하자 여왕은 그린달로부터 대주교권을 박탈했다(배한극, 미국 청교도의 사상의 기원과 변천, p.67).
1583년 존 윗기프트(John Whitgift)가 그린달을 대신하여 켄터베리 대주교가 되자 런던의 주교 존 에일머(John Aylmer) 등과 함께 감독주의를 내세워 또 다시 청교도를 박해가 시작된다.
특히 1587년 엘리자베스가 로마가톨릭 편에 섰던 스코틀랜드 메리 여왕을 처형하자, 메리 여왕의 남편이었던 스페인의 펠리페 2세(Felipe II de Habsburgo)가 영국에 전쟁을 선포하면서 영국과 스페인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었다. 1588년 7월 19일 스페인의 무적함대(The lnvincible Armada)가 초승달 모양의 진을 이루며 도버 해협으로 향하여 진격하던 중 강풍으로 진영이 분산되자 그 틈을 타 영국(함대)군이 공격함으로써 대승을 거두었다(오덕교, 청교도이야기, pp.20-21).
마치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이 연상되듯 영국 함대가 세계최강 스페인의 무적함대(The lnvincible Armada) 130척을 격파, 대승을 거두면서 영국이 대서양의 해양권을 사실상 장악한다. 그 이후 해양 대국 스페인의 지위는 크게 흔들렸고, 유럽에서의 주도권도 상실해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 전투 후에 다음과 같은 비문이 적힌 대형 메달이 만들어졌다. “신이 입김을 불자 그들은 흩어졌다”(God blew and they were scattered). 엘리자베스는 이렇게 스페인과의 전쟁 대승리 후 그 자신감으로 도취되어 교회를 장악하기 위해 청교도에 대한 박해를 더욱 강화하였고 수많은 청교도 지도자들이 숙청되었다.
1588년 리스터 백작, 1589년 월터 마일드메이 경, 1590년에는 프란시스 웰싱햄 경이 관직을 잃었고, 토마스 카트라이트와 10여명의 청교도가 체포되어 고등종교법원에 서게 된다. 이와 같은 고난의 시기에 캠브리지대학교의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가 앞장서서 청교도 운동을 이끌어 발전시켜 나갔다.
알렌 카든(AllenCarden)은 “종교문제에 대해 철저하게 무관심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만족할 수 없는 중용(Via Media), 또는 엘리자베스 결정(Elizabeth Settlement) 등으로 다양하게 알려진 신앙타협이었다. 영국은 1570년 엘리자베스에게 교황이 파문을 내릴 정도로 신교적이었으나 독실한 개혁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는 너무도 로마교회적이었다”고 황제교황주의(Caesaropapism)를 추구한 정치가 엘리자베스 1세의 종교정책을 평가했다(Allen Carden, 청교도정신, p.18).
한편 여왕은 엘리자베스 1세 시대를 국민문학의 황금기로 만들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의 문학과 경험론 철학의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이 이 시대의 대표하는 지성이요, 성과였다. 당시 영국 민중들은 집안에 악기를 갖추어 문화 활동을 즐길 정도로 엘리자베스 1세 시대의 영국문화는 꽃을 피웠다. 또한 처녀 여왕(The Virgin Queen) 엘리자베스 1세는 “태양이 지지 않는 나라”라는 세계 최고의 대영제국을 건설하며, 아메리카를 포함하여 해외 식민지를 계속 확장했다.
아메리카 대륙에 독신인 엘리자베스 1세의 이름을 딴 버지니아라는 이름의 식민지를 개척하였고, 후에 일본의 동양척식주식회사(Oriental colonization Company)가 모방한 것으로 알려진 식민지 경영기관인 동인도회사(최초로 1600년에 영국 상인들이 연합 창설)를 통하여 그 세력을 전 세계로 뻗어나갔고, 잉글랜드 왕국이 강성한 대영제국으로 발전하는 데 큰 발판이 되었다. 역사가들은 이 시대를 ‘엘리자베스 시대(Elizabethan era)’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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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3.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