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개혁의 땀방울- 무엇을 기대할까? (10)

반교권주의

 

하나님의 섭리 속에 일어난 16세기 종교개혁은 일이다. 중세사회로부터 근대사회로 탈바꿈하던 시기에 다양한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생겨났고 진행되었다. 교회는 세상 안에 존재하기에 세상이 변화를 경험할 때에 교회도 영향을 받게 된다. 그러나 직접적인 원인은 그 당시 로마가톨릭교회가 개혁이 필요한 상태에 놓여있었다는 것이다. 

교회는 빛과 소금의 역할, 즉 세상을 향해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보존해야 할 의무가 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주어진 사명을 져버리고 잘못된 길로 빠지게 되면, 교회 안으로 세속의 요소가 강하게 침투하여 부패가 시작된다. 중세 말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상 속에 두신 근본적인 목적을 망각한 듯하였다. 대부분 성직자들의 관심은 매우 인간적인 일들에 대해 자신들의 욕구를 채우는 일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서유럽의 각 도시마다 성당과 수도원이 있었다. 신자들은 출생부터 사망까지 전 생애에 걸쳐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삶의 패턴 속에 살아갔다. 자연히 그들은 형식적이며 피상적인 신앙을 지니게 되었다. 신앙의 중세를 마감하고 근대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생겨난 사회 전반의 혼동은 기독교 세계관에 사로 잡혀있던 그들에게 영적 도전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신실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다 하던 성직자들의 영향 아래 있었던 신도들은 위로와 격려를 받을 수 있었다. 이에 반하여 이미 성직자들에 대한 기대를 포기한 신도들은 그들을 향하여 노골적으로 반기를 들었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성직자들의 부패를 지적하고 알리자, 그들 사이에 번져있던 ‘반교권주의’ 또는 ‘반성직주의’가 일종의 대중운동으로 번져나갔다. 

중세교회 성직자들과 신자들의 관계는 전통적으로 철저한 수직 구도에 놓여있었다. 교황, 주교, 그리고 사제 모두 하나님의 입장에서 죄인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방편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성직자들이 어떤 인격을 지녔고 어떤 삶을 사느냐는 2차적인 문제이고, 일단 그들이 지닌 영적 권한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유익이 무엇인지가 가장 중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수직 구도를 비평 없이 받아들였던 대중이 변했다. 성직자들이 교회의 전통과 교회법을 앞세워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취하는 동시에, 신도들을 억압하고 있다고 확신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반발심이 확산되고 고조되면서 성직자의 권위적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 신앙의 자유를 얻으려는 열망이 생겨났다. 

 

총체적 타락 

 

성직자는 마태복음 19장 10-12절에 근거하여 결혼 포기라는 의무를 지켜야 했다. 이는 복음 전파 사명에 전무하기 위함이었다. 중세를 지나면서 초대교회부터 지켜온 불변의 교회법을 어기는 성직자들이 생겨났다. 중세 후기를 맞자, 성직자들의 결혼이 매우 흔한 일이 되었다. 또한 내연관계로 빚어진 비윤리적 행태도 심각한 수위에 이르게 되었다. 물론 비밀스럽게 진행되었지만, 결국 총체적 타락상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교회 자체적으로 이러한 행위를 중단시킬 수 있는 통제력을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성직 매매와 세습을 통해 소명과 상관없이 고위직을 맡은 성직자들은 성경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과 교회를 정화시키려는 의지가 전혀 없었다. 그들은 교황으로부터 시작하여 정치적으로 유리한 입지에 서는 것과 더 많은 물질을 소유하는 일에 매달려 있었다. 

개인에 따라 차이가 있었지만 많은 성직자들이 미사에 사용하였던 라틴어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 뿐 아니라 성경에 지식이 없는 관계로 가르치는 업무를 기피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일부는 아예 대리사제에게 업무를 맡긴 채 사역 장소를 떠나 사치스런 삶을 즐기는데 몰두하였다. 그 중 막강한 힘과 재력을 지닌 고위 성직자 중에는 각종 오락을 즐기고 여성들을 가까이하는 자들도 있었다. 대부분의 주교직을 귀족들이 독점한 이유를 쉽게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중세교회의 신앙적 바탕이 되어왔던 수도원은 이런 상황에 어떻게 반응하였을까? 이 질문의 정당성은 중세 수도원운동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10세기부터 교황이하 성직자들이 온갖 부패와 악행을 저지르면서 교회가 타락하자, 교회의 개혁을 부르짖던 자들이 수도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청빈과 검소, 그리고 선행을 강조하였던 수도원은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교회개혁에 큰 힘이 되었다.    

그러나 중세 말기 수도원은 이전과 달리 매우 심각한 수준으로 타락한 상태에 놓여있었다. 수도원은 이전에 지녔던 거룩한 모습을 오래 전에 상실하였다. 부가 축적되기 시작하면서 수도사의 엄격한 규율과 규칙적인 생활이 나태하고 탐욕적인 삶으로 대치되었다. 일부 수도사들과 수녀들 사이에 출생한 유아들을 살해하는 일도 벌어졌다. 대형 수도원은 봉건 사회의 경제 중심지로 탈바꿈하였다. 귀족들이 수도원을 재산 도피 장소로 사용하였고, 수도원장은 지역의 권력자와 밀착하여 이권을 챙기기도 하였다. 수도원이 운영하는 학교와 병원 등은 봉사의 차원보다 수익을 목적하는 등 세속 기관으로 변질되었다.  

중세 말 교회의 총체적 타락이 불러온 진정한 문제는 영적 무감각이었다. 죄악을 제어하는 힘을 상실한 교회는, 성직자들에게 자신들을 정당화 할 수 있는 제도를 고안하였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면 법으로 금지된 사실을 알면서도 비밀스레 결혼한 사제들은 정기적으로 ‘속죄비’를 지불하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교회는 성직자의 결혼을 금했지만, 돈을 지불하는 자에 한하여 용서할 길을 열어준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들 사이에 정해진 가격이 있었으며, 제 시간에 그 금액을 지불하지 않으면 죄를 용서받지 못하여 결국 정직 당하게 되는 우스운 일이 벌어졌다. 

중세 말 교회의 총체적 타락은 영적 무감각의 문제
구텐베르크성경과 우신예찬 통해 개혁자들 힘 얻어 

인쇄물  

 

목판과 활판 등의 초기 인쇄술은 대부분 동양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대량인쇄물 출판은 1445년에 독일의 요하네스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 1400-1468)가 금속활자를 개발한 이후에 가능해졌다. 그는 인쇄업을 운영하면서 원근반환 소송에 매달려 파산을 경험하면서 풍요로운 삶을 살지 못했다. 또한 자신이 이뤄낸 엄청난 역사적 발명으로 인해 어떻게 역사가 바뀌었는지도 모르는 채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 후로 세상이 달라졌다.  

독일을 포함한 유럽 전역에 많은 인쇄소가 설립되었다. 넘쳐나는 인쇄물로 인해 많은 지식이 빠르게 전파되면서, 유럽의 질서에 근본적으로 변화가 찾아왔다. 이전에는 대부분 책이 필사되었기에 값이 비싼 이유로 오직 수도원이나 갑부만 책을 장만할 수 있었다. 그러나 책이 다량 생산되면서 개인도 소장할 수 있게 되었다. 개인의 생각을 담은 글이 보급되면서 지식의 교환이 활발하게 이뤄지게 되었다.  

1452년부터 3년에 걸쳐 ‘구텐베르크 성경’이 인쇄되었다. 그의 인쇄술로 인해 가장 큰 도전을 받은 것은 교회의 성직자들이었다. 그들은 성경 지식을 교회의 전유물이라고 간주하고 자신들의 체제를 유지하는데 사용하였다. 교회의 전통과 교리를 독점한 상황에서 자신들의 입장에 맞도록 해석하고 가르침으로서 신도들을 우매한 대중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쇄된 성경이 대량으로 보급되면서 개인들이 성경의 진리를 직접 대할 수 있게 되었다. 루터와 칼빈과 같은 대표적인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자국민이 읽을 수 있는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기술 발명은 인터넷 시대의 도래와 버금가는 역사적인 변환이었다.  

 

우신예찬  

 

성직자들의 타락으로 인해 무엇보다 종교 자체가 가장 큰 타격을 받았다. 교회가 제 몫을 감당하지 못하자 기형적인 신앙이 성도들을 현혹시켰다. 중세 말 유럽에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엄청나게 많은 숫자가 사망하자 매사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사람들을 공포에 떠밀어 넣는 일이 있었다. 세상의 종말이 도래했다고 외치는 자들이 생겨났다. 또한 세상이 주는 두려움을 이겨내는 방법이라며 광적인 신앙으로 유혹하는 자들도 있었다. 미신적 신앙이 판을 쳤고, 신자들은 성인축일, 성인숭배, 성지순례 등 피상적 신앙에 매료되었다.  

성직자의 무관심, 무지, 그리고 무능으로 인해 위기를 맞고 있던 교회를 향해 개혁을 부르짖는 자가 나타났다. 데시에라위스 에라스무스(Desideraius Erasmus, 1466-1436)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지성적인 인물로 인정받고 있었던 인문주의자였다. 그는 그리스도를 닮은 내적 경건을 강조하였던 것은 ‘공동생활형제단’의 영향을 받았으며, 사제였던 그는 자신이 신학자임을 언제나 잊지 않았다. 교회는 반드시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확신하며 1516년에 그 유명한 ‘헬라어 신약성경’을 출판하기도 하였다.  

그는 자신이 속물이라고 여기던 성직자들의 부패와 타락상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그 결과 1511년에 ‘우신예찬’이란 연설 형식의 책을 저술하였다. 그는 노골적인 표현대신 풍자적으로 실상을 고발하였지만, 성직자들의 죄악상을 주저하지 않고 비판적으로 지적하였다. 가톨릭이 금서목록에 올려놓은 이 책은 에라스무스의 풍부한 지식과 천재성을 담고 있다. 

그는 교회의 타락을 바라보며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시기적으로 그의 앞에는 두 갈래 길이 놓여 있었다. 그는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걸었던 길에 동참하기를 거부하고, 구교를 떠나지 않았다. ‘우신예찬’ 그대로 표현된 것처럼 관용과 중용을 중시하던 사상가였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다른 초기 개혁가들과 힘을 합치지 못한 아쉬운 부분이 있지만, 그는 자신의 위치에서 타락한 중세 말 교회의 개혁을 위해 훌륭한 업적을 남긴 자이다. 무엇보다 그가 저술한 ‘우신예찬’을 통해 성직자의 총체적 타락상이 급속도로 유럽 전역에 퍼지게 되었다. 이미 반교권주의의 확산으로 인해 흔들리던 대중은 종교개혁자들이 성경적 교회와 신앙의 회복을 주장하며 외치는 소리를 환영하였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 개혁의 땀방울을 흘렸던 주연과 조연, 겉으로 드러난 자와 그렇지 않은 자, 교회 안의 일과 밖의 일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이는 역사의 주인공이신 하나님께서 세상을 주관해 나가시는 방법이다. 

covenantcho@yahoo.com

05.23.2020

Leave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