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직자
사도행전 8장에 시몬이란 마술사가 등장한다. 그는 사람들이 놀랄만한 큰 능력을 지닌 자였다. 사도들이 안수하므로 성령을 받게 하는 일이 일어난 현장을 목격한 그는 사도들에게 돈을 주고 초자연적인 능력을 사려고 하였다. 베드로는 시몬을 저주하며 하나님의 선물을 매매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큰 죄악이란 사실을 지적하였다.
중세교회에 마술사 시몬의 이름이 매우 부정적으로 언급되었다. 성직매매 때문이었다. 성직자들은 일정 교육과 훈련을 통해 전문지식을 가진 자들로서, 개인마다 출신과 전공이 달라도 교회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다. 이중적 소명, 즉 내적소명과 외적소명에 의해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한다. 그러므로 성직을 매매한다는 것은 그 직분이 하나님께서 위임하신 신성한 권한임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행위이다. 성직을 파는 사람이나 사는 사람 모두에게 해당된다.
9세기경부터 시작된 성직매매가 유행을 타고 큰 문제가 되었다. 심지어 교황이 직접 나서 이를 저지해야 할 형편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초대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성직을 맡는다는 것은 곧 고난의 십자가를 지는 일이었다. 특히 로마의 황제들의 조직적 탄압 속에서 목숨을 내놓고 성도들을 섬겨야 했기에 일사각오의 순종과 결단이 동반되었다.
그러나 국가적인 보호 속에서 신앙을 지니게 된 결정적인 사건과 함께 성직에 대한 근본적인 개념에 변화가 생겼다. 313년에 콘스탄틴 대제(Constantine the Great, 272-337)가 종교의 관용을 골자로 하는 ‘밀라노 칙령’을 발표한 것이다. 많은 변화가 찾아왔다. 이전에는 성도나 성직자 모두 가난한 삶을 당연시 하였다. 개인의 재산과 소유의 개념보다 서로 도우며 함께 생활하는 것을 기본개념으로 삼았다. 교회가 정기적 헌금과 재산 기부자들로 인해 많은 물질을 소유하게 되자, 교회의 재산 중 일부를 성직자의 생활비로 지급하게 되었다. 성직자는 교회가 지불하는 일정한 돈을 받으며 사역하는 자로 인식이 바뀐 것이다.
성직록
생계를 꾸려가려면 물질이 필요하다. 성직자도 예외가 아니다. 좀 더 정확한 표현은 교회는 성직을 맡은 자가 물질의 부족으로 인해 사역에 지장 받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배려해야한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성직자는 지나치게 풍요하고 사치스런 삶을 포기하고, 물질이 주는 달콤한 유혹의 손길을 과감히 물리쳐야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부르심을 받은 성직의 성격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활할 만큼의 물질이란 기준 자체가 매우 애매한 것이 사실이다. 개인마다 씀씀이가 다르고 각 성직자의 가정이 처해있는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13년 이후에 초대교회가 변화된 이후부터 실천되어왔던 전통적인 방법을 소개하자면, 교회가 성직자로 하여금 사역에 전무할 수 있도록 타당한 액수를 정하여 지불하는 것이다.
초대교회 이후 자연스럽게 성직자들 사이에 수직적 관계가 형성되었다. 로마교회가 전통적으로 베드로의 계승자로 여기는 로마의 주교였던 교황이 가장 높은 위치에 있었다. 교회의 최고사제인 교황 아래 고위 성직자인 주교들이 있었다. 주교들은 자신이 관할하는 교구를 대표하였고, 주교가 파견한 사제들을 감독하는 일도 책임졌다. 사제들은 주교를 협력하는 위치에서 미사를 집행하고 말씀을 선포하는 의무를 맡은 다수였다. 주교들이 교회의 재산을 맡았기에 사제들의 생활비도 그들이 지불하였다.
스위스 종교개혁자 칼빈은 아들이 사제가 되기를 원했던 그의 부친의 노력으로 로마가톨릭교회가 제공하는 특혜를 받았다. ‘성직록(beneficium)’으로 불리는 돈을 받은 것이다. 성직록이란 용어는 8세기경부터 봉건적 토지 보유 형태를 가리키는 것이었지만, 12세기부터는 교회에서 성직자에게 부여하는 물질적 혜택에 사용되었다. 칼빈은 11세부터 성직록을 수여받았지만 개혁적 마인드가 생긴 뒤에는 고향 교회로 돌아가 그것을 반환하였다.
중세교회가 실시하던 성직록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교구와 수도회는 각각 별도의 성직록을 수여하였다. 한 곳에 머물러 섬기는 자와 그렇지 않는 자를 위한 성직록의 구분이 있었으며, 영구적인 것과 이와 대조적으로 권리를 넘겨줄 수 있는 성직록 등 그 종류가 다양했다. 모든 성직자들은 평생 소득을 보장 받기 위해 노력하였고, 이를 결정하는 권한을 지닌 자에게 절대 복종해야 했다. 성직록은 성직자들 사이에 존재했던 수직적 관계를 더욱 견고하게 했다.
성직 매매
만일 성직자가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받는 위치에 있었다면 8세기부터 유행했던 성직매매가 가능하였을까? 값을 지불하면서까지 성직을 얻으려했던 이유가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성직자는 사회에서 존경을 받았으며, 성직록을 받아 안정된 삶을 살 수 있었고, 조금만 노력하면 부수입도 올릴 수 있는 위치였다. 그러므로 1074년, 교황 그레고리 7세(Gregory VII, 1015-1085)는 성직매매를 금지하는 칙령을 발표하였다.
그레고리 7세는 소명과 전혀 상관없는 자들이 성직을 차지하는 것을 저지하려 했다. 그는 성직자들이 자식이나 친척에게 세습하는 일과, 주교로서의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인격과 실력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자들에게 금전을 받고 자리를 허락하는 일을 큰 죄악으로 여겼다. 이로서 성직매매 금지와 함께 성직자 독신제도를 강력한 법으로 규정하였는데, 성직자가 가정을 가지고 자녀를 낳으면 재산을 축적하고 물려주려 한다는 것을 간파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그레고리 7세는 누가 성직자를 임명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예민한 사항의 개혁에 착수하였다. 주교들을 포함하여 성직자를 선발하는 과정에, 지역 유력자들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다. 심지어 성직자를 직접 세우는 일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레고리 7세는 성직자를 임명하는 일은 교회의 고유 권한임을 주장하였다.
결국 이 문제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하인리히 4세(Heinrich IV, 1050-1106)와의 ‘서임권 투쟁’으로 발전되었다. 하인리히 4세는 세속 제후들도 성직자를 임명을 할 수 있다고 반박하였다. 이 일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감정적 대립까지 이어졌다. 그레고리 7세가 고집스럽게 교회개혁을 시도한 것은 기득권을 지닌 세속 제후들이 교회 안에 깊숙이 침범하여 정치적 영향력이 행사하였기 때문이다. 그러한 상황에서는 교황을 포함한 모든 성직자들이 세속 제후들의 하수인 노릇을 하면서 성경의 진리대로 교회를 섬기지 못할 것으로 확신하였다. 교회의 세속화가 진행된 지 오랜 상황에서 그레고리 7세는 역부족으로 인해 그를 쫒아내려고 작정한 하인리히 5세에 의해 갇혀 지내다 1085년에 사망하였다.
성직 매매는 단순히 돈을 주고받는 행위보다 그 동기와 방법에 큰 문제가 있었다. 그러므로 그레고리 7세 이외에도 이 문제를 지적하고 개혁을 시도한 교회 지도자들이 있었다. 성실한 태도로 교회를 이끌었던 교황 레오 9세(Leo IX, 1002-1054) 역시 마인츠에서 모인 지역 공의회에서 이 문제를 심도 있게 다뤄 성직매매 금지와 성직자 독신제도를 강요하였다. 프랑스의 추기경 훔베르트(Humbert of Silva Candida, 1015-1061)는 1057년에 ‘3권의 성직매매 반박론’을 기록했다. 그는 성직매매를 사도행전의 마술사 시몬과 연결시키고, 교회 또는 속세의 실권자들에게도 성직매매가 허용될 수 없음을 설명했다. 나아가서 그는 주교를 백성에 의해 사제는 주교에 의해 선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성직 매매의 폐해
과연 11세기 이후 성직매매가 중단되었을까? 탐심을 지닌 성직자들과 세속 제후들이 지속적으로 이권다툼에 끼어들었다. 중세 후기로 시간이 흐를수록 매우 커다란 문제로 부상하였다.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교회 자체가 개혁을 시도하였지만 실패를 거듭함으로서 성직매매를 당연시 여기는 분위기로 전환되었다는 것이다.
종교개혁의 선구자였던 얀 후스(Jan Hus,1372-1415)가 바라본 교회의 모습은 매우 절망적이었다. 그는 1413년에 ‘성직 매매론’이란 글을 통해 그 당시 왕성하게 자행되고 있던 성직매매에 대한 즉각적 중단과 함께 성경적 개혁을 요구하였다. 그는 성직매매의 폐해를 지적하면서, 돈을 지불하며 성직을 얻는 행위를 이단으로 정죄한다. 이는 영적 나병에 걸린 자만 가능한 것이며, 이런 죄는 타인에게 신속히 전염되기에 반드시 중단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돈을 지불하고 성직을 얻은 자들 중에는 기본 신앙과 실력을 갖추지 못한 자들이 허다했다. 다만 성직을 얻으려고 지불했던 액수보다 더 많은 재물을 얻으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후스는 성직매매의 폐해를 분명하게 지적하였다. 성직자들이 교회에 대한 관심을 접고 호화스러운 삶을 만끽하는 동안 교회가 지녀야 할 거룩한 모습, 즉 영적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이 사라진 것이다.
성직매매의 대표적 인물은 이해관계 속에서 교황으로 선출된 이노센트 8세(Innocent VIII, 1432-1492)였다. 그는 누구보다 세속 정치에 깊이 관여하였기에 많은 정치 자금이 필요하였다. 교황청의 재정이 날로 악화되자, 교황청에서 일할 수 있는 자들의 자리를 많이 만들어 매우 비싼 가격에 판매하였다. 과감하게 성직을 구입한 자들은 반드시 부자들이 아니었다. 남으로부터 돈을 꾸어 그 자리를 차지한 자들이 대부분이었기에, 그들은 결국 빚을 갚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많은 금품을 끌어들이는 일에 집중하였다.
이런 악순환은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등장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개혁자들은 성직자의 자격 미달로 인해 교회가 겪어야 했던 폐해에 대해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었다. 그들은 성경이 가르치는 성직과 성직자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쏟았다. 그들은 성직자의 소명의 회복이 진정한 교회 개혁의 출발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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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9.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