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신구(白信九)는 1873년 10월 6일에 평양에서 서당 훈장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평양 신학교 교장 사무엘 마펫(마포삼열) 선교사의 한국어 교사였고, 그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그는 평양신학교에서 공부했지만 졸업하지 않았는데 장녀 메리는 목사안수를 받았다고 하지만 미주 한인사회에서 그를 목사로 지칭한 적은 없다. 그러나 마포삼열이 그를 자비량 전도자가 될 것을 권했을 것이다.
백신구는 가족 3명을 데리고 일본 고베에서 시베리아 선박에 의지해 1905년 5월 8일에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한 후 오아후섬 에바 농장에서 괭이질하며 잡초를 뽑았다. 이곳에 에바 한인감리교회가 있었다. 1904년 말 본 교회에 56명의 교인이 있었는데, 이듬해 12월에 김영식이 교역자로 부임했을 때 135명의 등록교인에 출석교인은 200명이어서 하와이 한인교회 중 가장 큰 교회였고, 1906년 5월에 건축한 에바 예배당은 최초의 자체 예배당이었다. 백신구는 설교자가 없는 주일에 설교했다.
백신구는 가족을 데리고 1906년 12월에 상항을 거쳐 남가주 리버사이드로 이동했다. 그는 여름에는 오렌지, 레몬, 그레이프푸르트를 따고 가을에는 호두를 따고, 그 외에는 리버사이드 시멘트 공장에서 노동했다. 그의 부인은 30여 명의 남자 한인 노동자에게 하루 세끼 음식을 제공하는 식당업을 하였다. 이곳에 한인교회가 있었다. 미국 북장로교가 파송한 남가주 순회 선교사 방화중이 방문하지 않는 날은 교인들이 모여 성경을 읽고 토론하였는데 백신구가 설교하였다.
1909년 4월에 본 지방회에 가입하던 날 그와 함께 평의원으로 선임된 김린수, 이치환, 김기만, 김윤각 등 네 명과 그달 13일에 백신구가 부회장과 서기로 선출되었을 때 회장 차정석도 교인이었을 것이다. 다음 달에 본 지방회가 지식을 교환하기 위하여 토론회를 조직할 때 백신구가 학무로 피선되었는데 회장 윤진오도 교인이었을 것이다. 그해 4월 25일에 백신구가 김성삼과 이응호와 함께 신한민보에 기고한 아래의 글 “고국 함경남도 문천군 기근에 대하야 의연 모집하는 취지서”에서 그의 목회적 마음을 읽게 된다.
사람의 가장 참혹한 재앙은 흉년에서 더 심함이 없다 할지라. 수화의 큰 재난이라도 한번 지나가면 그만이 되어 불행한 자만 불행하거니와 흉년이 한번 지낸 곳에는 곡형 채식이 들에 차며 아표 강시가 구학에 가득하여 그 참혹측단한 형상을 차마 눈으로 볼 수 없으니 즉금에 우리가 내지 통신을 열람하건데 함경남도 문천군에 기근이 지심하여 주려 죽는 자가 연속부절하고 살아있는 자 기갈이 자심하여 천백 명 동포가 그 얼굴의 누른빛이 우리 눈앞에 암암한지라. 우리가 이 소식을 들으매 어찌 먹고 입는 것이 편안하다함이오. 현금 내지에서 의연을 모집하여 구휼을 행할지라도 우리 해외에 있는 자 마땅히 조력이 없지 못할지라. 연전 상항 진재와 작동 이탈리아 진재에는 각국 사람이 의연을 모집하여 수다한 전곡을 보내었거든 하물며 우리의 동족이 참혹한 재앙을 당하여 주려 죽는 지경에 임한 것을 생각건데 어찌 우리가 안연히 있으리오. 그런고로 우리 등이 임시 특별회를 열고 당장 의연한 돈이 30여불 이옵고, 또한 의론하였으되 의연금 수합소는 상항에 우리 국민회 총회로 정하여 의연금의 수취한 도수를 5월 안으로 내지에 부치기로 기약하였사오니 인인 군자의 동포 제군은 더 내지 문천군 기천기백의 호호 천연하는 정경을 그윽이 생각하여 다소를 아끼지 마실지어다.
크레어몬트로 이주하던 1910년까지 약 4년간 백신구가 리버사이드 교회를 섬겼다고 보면 된다.
식당일에 지친 아내의 건강회복방법은 이주였다. 1910년에 백신구는 가족을 이끌고 대학촌 크레어몬트로 가서 통조림 공장 너머 철로 옆에 살면서 아파트 빌딩 청소원으로 취직했고, 그의 아내는 손빨래하며 돈을 벌었다. 크레어몬트에도 한인장로교회가 있어 낡은 건물에서 예배를 드렸다. 위의 방화중 선교사가 방문하지 않는 주일은 백신구가 본 교회를 섬겼다.
학생양성소 겸 예배당 건축을 위한 5인 건축위원회에 백신구가 방화중, 이상규, 임동식, 정등엽과 위원이 되었다. 본 건물은 2층 양옥으로 2인 기숙 방 8개, 온수가 나오는 목욕탕, 식당, 주방, 20여 명이 앉을 수 있는 포치도 있었고, 8, 90명이 앉을 수 있는 예배당이 있었다.
목사안수는 받지 않았지만 교회예배에서 목사가 없을 때 설교 맡아
자비량 전도자로 고국 기근에 후원금 독려, 예배당건축에 적극협력
1911년 11월 15일 자 신한민보에 게재된 건축헌금 명단 중 크레어몬트 거주자는 본 교회 교인으로 보면 된다. 그들은 임동식, 김윤욱, 김종옥, 김종혁, 이상규, 변기현, 김기만, 김창률, 백신구, 이건승, 김관유, 임정구, 한삼봉, 정락선, 정원석, 박부인, 이인영, 강영대, 정등엽, 서예순, 한기갑, 김원택, 환원석인데 총 121달러 50센트를 헌금했다. 백신구가 크레어몬트 지방회 회장으로 선임되던 1911년 가을까지 그의 사역은 길어야 2년간이다.
생활고에 백신구는 1911년 가을에 중가주 콜루사로 이주했다가 이듬해 로벗 아일랜드로 이주하여 감자농사에 뛰어들었으나 감자 값이 폭락하는 바람에 친구 이병준의 소개로 1913년에 수은 광산이 있던 중가주 아이드리아로 이주하였다. 그는 광산 용광로에서 노동했다.
이곳에서도 예배를 인도했다. 1914년 5월에 서간도 동포 기황구휼금을 낸 명단이 교인이 아닐까 싶다. 기부한 자는 이병준, 한준상, 한치홍, 강병림, 김호식, 임석현, 임선봉 그리고 김채환이었다. 백신구는 체중이 급격히 빠져 더는 중노동을 할 수 없어 1916년에 델라벤으로 이주한다.
세계 1차 대전으로 쌀값이 폭등하여 벼농사 경험이 있는 한인들에게는 이만한 사업이 없었다. 백신구가 1917년 초에 북가주 델라벤에서 75에이커에 벼농사를 경영했던 이유다. 가장 크게 한 자는 1030에이커의 김종림이었고, 박영순의 240에이커, 이진섭의 150에이커, 황명신의 80에이커, 임지성의 80에이커 순이었다. 1918년 9월에 한인들이 김종림의 농장에 모여 국치기념식을 가진 후 총 99원의 국치기념적립금을 의연했다.
의연한 사람은 백신구, 박영순, 이상길, 신광희, 김종림, 사덕순, 임선봉, 음대영, 마춘봉, 송 철, 최능진, 이재수, 김두호, 문양목와 그의 부인, 이흥민, 윤 홍과 그 부인, 염치택, 노종철, 황치옥, 임남조, 이석원, 양주은, 강희중, 정동호, 이성환, 신달원, 김기후, 강대근, 최능익, 이치완, 전득부와 그 부인, 최봉민, 이인신, 송오균, 유도보, 백일규, 윤응호, 최창진, 윤 혁, 김당연, 임치호, 김경보, 음재원, 오림하, 장한조와 그 부인, 김주회, 강형섭 등 51명이었다.
이들 중 델라벤에 거주한 자는 백신구의 예배에 참석했을 것이다. 같은 달에 맨티카 한인감리교회 건축헌금 모금에 백신구가 2달러 50센트를, 그의 부인 백광선이 1달러를 헌금했으니 부부의 교회 사랑은 남다르다.
백신구는 북가주 멕스웰로 이주했다. 1918년 10월에 백신구는 500에이커를 경작했으니 벼농사에 함께한 한인들이 그의 교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들 외에도 김종림의 1,800에이커, 박영순의 700에이커, 신광희의 500에이커. 이진섭의 250에이커, 김인수의 200에이커, 송덕용의 50에이커의 한인 노동자들이 예배에 동참했을 것이다. 그해 비가 뿌려 실망했던 백신구와 한인 농주에게 의외로 풍작이었는데 그해 추수감사절은 풍성했겠다.
그 후 백신구는 월로우즈로 이주했고 시 외곽 철로에서 한 블락 떨어진 곳의 중국인 소유의 오래된 집에 세 들었다. 이 집이 윌로우즈 한인교회당이 되었다. 주일에 7가정이 모여 오르간 없이 찬송을 부르고 그가 간단하게 설교했고, 그의 부인은 점심을 대접했다고 장녀 메리가 적었다. 아이들은 옛 친구를 만나는 주일날을 기다릴만했다. 그러나 헌금시간은 없었다.
한인들은 그에게 상담했는데 그의 큰딸 메리가 통역하여 저들의 어려운 일들을 해결해 주었다. 그의 아들 어니스트가 11살에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지역 신문 ‘더 윌로우즈’가 개교 이래 가장 어린 학생이라고 대서특필하여 한인들의 기쁨이었다. 그런데 그 기쁨도 잠시였다. 1918년 11월 16일에 이인서의 부인이 5살 딸을 남겨두고 멕시코 독감으로 홀로 별세했다.
이튿날 17일 주일 하오에 한인 10여 명과 동 지방 백인 남녀 내빈 36명이 모인 가운데 백인감리교회에서 까트 목사의 주례로 장례식을 한 후 발인하여 장지로 나가는데 3척의 자동차와 무수한 생화와 및 백인 부인 찬미대가 호상하여 산상에 이르러 백신구와 한인들이 땅을 파고 백신구의 사회로 하오 4시 30분에 하관 예배를 드린 후 안장했다. 이듬해 1월 1일에 백인 윌로우즈장로교회에서 백신구의 딸 메리와 이흥만이 결혼하여 교인들은 다시 기쁨을 찾았다.
윌로우즈에 홍수가 나서 벼농사에 실패한 백신구는 워싱턴주 약기마카운티 내 이스트 와파토로 이주하여 색션 25지구의 벼농사 노동자가 되었다. 그는 퍼스트 스트리트 607번지의 약기마 지방회관에서 예배를 인도했을 것이나 15마일 떨어져 있어 매주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1920년 3월 1일에 그의 사회로 삼일절 제20주년 기념식이 있었는데 순서 담당자들은 예배에 참여했을 것이다. 국기가를 부른 이은성, 기도한 임단일,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정기연, 독창한 최히송, 헌법을 낭독한 김춘호, 경축사를 한 유희찬, 독창한 현혜신과 조경지, 연설한 이성로. 이듬해 삼일절 기념식에서 백신구가 연설했는데 이날 순서 맡은 사람 중에 새로운 이름이 보인다. 사회자 김순호, 기도한 이근성, 개회사를 한 김성하,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이형태, 창가를 한 김애니와 이춘자, 연설한 김영근 등도 교인일 것이다.
백신구는 1926년에 유타주 트리몬톤의 카운티 로드 선상의 토지를 임대하여 농사에 뛰어들었다. 이곳에는 그의 가족 10명을 포함하여 김응규와 김영근의 가족이 있었으니 백신구가 예배 인도를 잊지 않았고, 한국어를 가르쳤으니 그가 교사였을 것이다. 그런데 1928년 7월 9일에 떼취 앞에서 놀다가 김영근의 2살 반 된 넷째 자녀가 실족하여 사망하는 참상이 있어 백신구는 그의 가정을 심방하고 위로하였다. 이듬해 2월 백신구의 장남 명선이 결혼하여 기쁨을 회복하였다.
백신구는 나성 인근 휘티어로 이주하여 농업에 종사했다. 1936년 11월에 본국 수제 구제금을 낸 명단에 백신구가 있었다. 이듬해 11월에 본국에 계신 부친께서 노환으로 별세하셨다는 부음을 받고 애통망극했다고 한다. 부친 별세 2년 후인 1939년 10월 24일에 마포삼열이 몬로비아에서 소천한 비보에 이어 신한민보에 본보 주필 동해수부(홍 언)가 기고한 1939년 11월 9일자 신한민보의 “서세를 애도함”에서 백신구가 또 한 번 애통망극했으리라.
1941년에 그의 7남 3녀 중 네 아들이 자원하여 입대하였는데 ‘결혼한 장남 랄프가 동생들이 미국과 한국을 위하여 충성하는 것을 보고 형이 되어 집에 편안히 있을 수 없다 하여 부모는 누이와 아내에게 맡기고 왜적과 싸우는 전선에 나설 터라 하니 5형제의 종군은 전시 한인의 진화로 전할만한 일’이라고 신한민보는 적었다.
해방된 지 2년 후인 1947년 7월 20일, 백신구는 휘티어의 자택, 웨스트 하드리 스트리트 1005번지에서 향년 74세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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