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나를 돌보는 시간’(김유비/규장)을 읽고

우수상 김화성(영국 에이처치)

세계한인언론협회 주관 제5회 신앙서적 독후감 공모 수상작

 

불과 지난주는 흙먼지를 머금은 바람을 맞으며 요르단의 작열하는 와디럼 사막을 달렸는데  이곳 런던에서는 생뚱맞게도 잔뜩 찌푸린 비구름 추적이는 사무실에서 쌓여있는 메일을 쳐내느라 눈코 뜰 새가 없다. 잠시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처럼 무지개 그라데이션의 양 끝을 가로지르듯이 묘한 색감의 대비를 이루는 유난한 10월 가을을 일필휘지처럼 지나게 하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목숨과 가족을 드려 완강한 이슬람 국가에서 시리아 난민과 무슬림을 위해 위험을 감내하는 선교사님들은 웬만한 일에는 상처입지 않는 철인들로 여겼고 그러한 생채기는 나같이 비교적 안전지대에 머물며 교회 생활을 하는 ‘약골들’을 위한 부산물이라는 고정관렴이 중동 현장에서 산산이 부서질 무렵, 김유비 목사님이 쓴 ‘나를 돌아보는 시간’ 이라는 책을 만나 그 연유를 더듬어 알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되었다.  

옆에서 속삭이듯이 조분조분 이야기하는 어투가 그대로 활자로 녹아들어와 다소 건조할 수 있는 ‘치유’라는 화두가 마치 따뜻하고 정겨운 차 한 잔을 마주하고 만난 선후배처럼 서둘지 않고 평안한 위로의 여정을 정겹게 따르게 하였다.  

저자이신 김유비 목사님은 세상이 그토록 추구하는 ‘성공신화’와 ‘영향력’에 매몰되지 않고 재능과 자격으로 쓴 자랑이 아닌, 저자 자신처럼 상처 입은 ‘한 사람’, 그러나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한 영혼’ 섬기는 것에 의미를 발견하면서 오롯이 주님의 관심을 말씀으로 붙좇으며 안정적 사역공간을 마다하고 주님의 이끄심에 따라 “간을 보지 않고" 무작정 내일을 보장받지 못하는 사이버 공간으로 뾰족한 대책 없이 믿음의 발걸음을 내디딘, 다소 무모한 목사님이란 인상을 받기에 충분했지만, 책을 열면서 엄청 고민 많고 겁 많은 ‘소심남(小心男)’이셔서, 마치 핑계 많던 모세와 입다를 쓰시는 하나님의 위트와 위대함에 발견하게 되었다. 

세상과 크게 다르지 않게 기독교 안에서도 드라마틱한 미담과 축복의 증명들이 북새통을 이루는 요즘, 그렇게 위대한 간증들처럼 살아지지 않아 의기소침하며 어두운 무대 뒤로 몸을 숨기는 그런 ‘가나안 성도’들에게 치유하는 능력은 누가 꿈에서 보았다는 ‘예수님의 얼굴’이 아니라 나의 낡은 성경 안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이라는 고백은 읽는 나로 하여금 복음과 말씀을 추월하려고 했던 얄팍한 조급함과 열패감을 내려놓고 ‘약해도 괜찮은 나’, ‘약해도 평안한 나’가 되어 믿음의 여정을 평생 신실하게 걷기를 다독이고 있었다.   

책의 대화 중 절 반 이상이 가족에 관한 눈물과 위로로 채워진 것은 이 시대가 치열하게 생존하고 자신을 방어하느라 자신을 돌보는 시간조차 낼 수 없었던 뼈아픈 우리 시대와 교회의 자화상이면서, 동시에 김유비 목사님 자신이 아픈 손가락 같은 가족과 함께 지나온 골짜기에서 만난 하나님을 알고 경험한 여정이 결코 우연히 아니라 작은 소자인 우리가 주님의 ‘큰 그림’ 속에서 숨 쉬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는 것이리라.  

우리가 직면하는 아픈 가족들은 나쁜 부모나 자녀, 이상한 배우자여서가 아니라 어린 시절 많은 거절들로 인해 자신의 표현방식을 포기하기에 이르러 대개 “대화를 피하려고 참는 것”을 ‘희생’과 ‘인내’로 대체하고 합리화하게 되는데 실상은 못된 사람이 아니라 서툰 사람, 나쁜 사람이 아니라 무딘 사람으로 ‘타인이 얼마나 힘든지’와 심지어는 ‘자신이 얼마나 힘든 상태인지’에 무덤덤하게 되지만 이것은 자신이 예수님이 되려는 시도를 포기하고 주권자의 보좌에서 내려와 예수님과 하나되어 올바른 방식으로 가족과 마주 하게하는 ‘돌봄이 필요한 시간’이 되었음을 일깨워주었다.

‘아빠의 무관심’은 남편 집착이 되고, ‘아빠의 외도’는 남편 감시가 되며, ‘아빠의 학대’는 남편 무시가 될 수 있지만 자신이 자라온 환경은 자신의 선택과 원함이 아닌 그저 주어졌듯이 변화시킬 수 없는 기억과 고칠 수 없는 과거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주님의 눈으로 바라보는 시선과 의미를 통해, 그 아픔과 상처의 자리에 분명히 함께하셔서 눈물 흘리며 아파하셨고 나를 위해 모든 의미와 뜻을 예비하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누릴 뿐 아니라 나와 같이 아픈 또 한 영혼을 치유하는 ‘a Wounded healer’가 되기를 바라시는 듯 했다. 하나님은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하신 분인 까닭이다(시138:16).

모든 책임을 부모 자신에게 돌리는 ‘내가 죄인이다’라는 자의적 겸손과 미덕(?)은 연약한 많은 사람들에게 모든 불행은 ‘나 때문’이라는 기승전 자아비판과 비하를 통해 “자녀에게 자신의 상처가 전해지지 않을까?”하는 강박과 죄책감의 짐을 지게 하지만 나에게 잠시 맡겨주신 자녀를 예수님께 의탁하며 평안 가운데 우리의 자녀들에게 ‘예수님께 기도하는 아름다움’, ‘예수님을 닮아가는 나’를 통해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고 흘려보내기를 원하심을 깨닫게 된다. 

행복하게 살고 하나님의 은혜를 크게 느끼지만 자신이 여전히 외로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그렇게 지으셨기 때문임에도, 그동안 우리는 너무도 많은 이상적인 신화와 높은 이상을 신봉하며 살아서 당연히 모범적인 신앙으로 규정한 가시적인 성과와 칭찬에 목을 매며, 짐짓 ‘썩 괜찮은 평판’과 ‘믿음의 슈퍼히어로’가 될 것을 은연중에 스스로 채근하고 증명하려하지만 가족과 부부, 관계와 사역에 남아 있는 여전한 ‘외로움’에 당황해 하곤 한다. 군중과 관계, 심지어 친구와 가족 사이에서도 외로운 이유는 혼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이 더 필요한 존재’이기 때문이며 그것은 ‘내가 혼자라고 느낄 때’ 주님을 더 만나야하고 ‘내가 나와 대화해야하는 시간’임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들어야했다. 

‘자신을 잘 돌봐주는 시간’을 따로 떼어 가지면서 적어도 내 배우자가 내 옆에서는 외롭지 않도록 돌아보아야 한다는 음성을 읽고 듣게 되는 것은 바로 ‘내가 나와 대화하는 방식’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대화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상처가 힘든 이유는 거대한 성(城), 거짓의 방에 갇혀서 왜곡을 경험하기 때문인데 그 아픔의 닫힌 방으로 돌아가서 거짓 팻말을 부수고 문을 열어 빛을 비추는 과정을 통해 자유와 회복이 일어난다는 프로세스는 가장 기본적이고 순전한 복음이 내면화되는 전인격적인 과정을 설명한다. 선악과 사건 이후에 생존의 문제로 골몰하게 된 사람들은 자신을 스스로 지키는 방어능력을 키우게 되었고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방어기재가 자신의 진실에 눈멀게 하고 생수의 근원된 하나님을 등지게 하며 새로운 웅덩이인 대체물을 마련하게 하는 거듭된 악수(惡手)를(렘2:13) 두게 하였다. 마침내 숨겨진 애착과 부끄러운 기대가 침해당할 때마다 석연치 않은 분노를 사명 혹은 정의로 포장하며 생존을 확보하고 자기를 보호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 것이 ‘뼛속까지 죄인’인 가면 뒤의 ‘나’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젠 내 마음의 커튼 위에 숨어있어 가끔 수줍게 고개 내미는 한 아이가 시키는 대로 살지 않고 용기를 내어 뒤를 돌아보고 다가가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생명을 주셨으니 더 이상 생존을 위해 숨어서 조정하거나 유도할 필요가 없다”라고 말해주어야 할 시간임을 느낀다. 

그 아이는 들키면 수치스러워하고 화를 내며 생존하려고 몸부림치며 무언가에 꽂힐 때는 정신을 잃고 탐닉하는 아이이니 잘 위로하고 다독여주며 예수님을 소개해주련다. 때로는 그 아이는 기발해서 하나님마저 생존의 도구로 이용하고 신앙을 놀이터로 사용하기도하며 상담 받을 때 자신의 생존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해서 존재를 숨기기 때문에 찾기가 어려울 수 있을게다. 숨어서 욕구를 유도하여 성취하려는 태도가 더 이상 필요 없다는 것을 알려주련다. 그래서 그 아이가 예수님과 함께 행복하다면 나를 만나는 모든 사람도 예수님을 알게 되겠지. 너무 신령해도 아플 수 있고 순교자의 반열에 들어도 상처 입을 수 있으니 이젠 부끄러워하지 않고 ‘나를 돌아보며’ 가야하리라. 

최근 한 지인에게 들었던 “사명자의 길을 가기위해서는 배우자를 고려해야한다”는, 다소 내가 수용하기에는 약간 불편했던 말을 되뇌며 책갈피를 잠시 덮어 가슴에 품고 눈을 감게 된다. 이제 그 왠지 모를 불편함과 가슴 허한 빈 공간을 채우고야 마침내 내 마음 한편이 평안해지는 것을 느낀다. 

“사역은 가정의 헌신을 뛰어넘을 수 없고 그러기에 가정은 더 충만해져야하고 더 배려되어야하는 영역”이라는 것을…, 또한 “그 가정이란 너무도 소중한 공간에서는 바로 내 자신도, 내 마음의 아이도 절대적으로 포함된다”라는 것을....  

이 글을 끝맺을 무렵, 언제 그랬냐는 듯 비가 그치고 가을 하늘이 한 순간 청명해졌다. 

복있는 사람은.., …좆지 아니하며, …서지 아니하며, ...앉지 아니하고(시1:1). 그 분 안에 더 머물러야겠다. 

 

02.22.2020

 

Leave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