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 미북감리교가 시카고한인감리교회 목사 파송 1년 재직
학위취득 후 1934년 귀국 교수직, 일제말 기독교 일본화 추진
갈홍기(葛弘基)는 1906년에 기독교 교육자 가정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강형대는 항일 운동가였던 이동휘와 함께 강화 보창학교와 통진 분양학교를 설립하고 교육에 종사했다. 갈홍기는 4월 14일에 태어났다고도 하고 6월 1일에 태어났다고도 하는데 그의 출생지도 인천 또는 강화도로 소개된다.
배재 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갈홍기는 1928년에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했다. 연희를 졸업한 그해 7월 6일 김관식을 단장으로 한 20여 명의 주일학교 대표단의 일원으로 도미했으나 그의 목적은 유학이었다. 그는 시카고의 노스웨스턴대학교에서 공부하고 문학사 학위를 취득한 후 개렛신학교에 입학했다.
설교자와 전도부원
한승곤 목사가 1928년 말 사임한 후 본 교회는 장기간 담임목사가 없이 예배를 드렸다. 이 기간 개렛 신학생들이 설교를 인도했다. 갈홍기도 그중에 한 사람이었고, 그와 함께 설교한 신학생은 조승학과 김영문이 있었다.
이 무렵 하와이의 한인동포 6, 70명이 시카고 부근으로 이주하여 시카고의 한인동포는 150여 명에 이르렀다. 그리고 1922년 일제 조선총독부의 ‘문화정책’으로 도미한 ‘신도 유학생’이 시카고에만도 50여 명이었다. 그래서 약 200명의 한인이 시카고와 인근에 거류했다고 한다. 그런데 1930년 연방 인구보고서는 일리노이의 한인이 총 76명이었고, 그중 시카고 시내에 64명이 거주한 것으로 파악했다.
당시 예배당은 웨스트 옥데일 820번지에 있었다. 2층 아파트 건물로 미국 북감리교 내지선교회가 구매하고 한인회중이 월세를 냈다. 교회당 아래층에는 왼쪽으로 사교실이 있었고 오른쪽에는 침실과 부엌이 있었으며, 2층에는 중앙에 예배실이 있고, 그 좌우에 침실 3개가 있었다. 아래층에는 사찰이었던 천세헌 가족이 거주했고, 침실 하나에 2, 3명의 한인 유학생들이 거주하였는데 매주 3달러씩 숙박비를 냈으나 수입이 없는 경우 면제해 주었다.
언제나 만원이었는데 홍난파가 그 바른쪽 방에서 유숙했고, 여름방학이 되면 지방에서 취업차 모여든 학생들로 붐볐다고 한다. 주일예배 후에는 천 씨가 준비한 국수와 호배추 김치로 점심을 대신했는데 한 그릇당 50센트였다.
담임목사 선택이 곤란하여지자 1931년 2월 시카고한인감리교회 이사부는 이사부 부장 염광섭을 임시 담임교역자로 선정하였고, 행정부를 신설하고 6개 분과를 조직했다. 갈홍기는 전도부 부원의 한 사람으로 선정됐고, 설교자로 지정된 것이다.
시카고한인감리교회 담임목사
갈홍기는 1931년 6월 개렛신학교를 졸업하고 신학사학위를 취득한 후 그해 가을에 그는 시카고대학 신학과의 박사과정에 진학했다.
1931년 7월 미국 북감리교는 갈홍기를 시카고 한인감리교회 목사로 파송했고, 그달 19일에 성대한 취임식이 있었다. 한승곤 목사에 이어 그는 본 교회 제2대 목사가 되었다. 본 교회 초기 예배자 수가 20여 명이었는데 반해 그 두 배가 넘는 평균 50여 명이 매주 예배에 참석하였다고 한다. 목사 사례비는 월 40달러였으나 제대로 지급됐는지는 모른다. 그가 목회하는 동안 김인준과 장세운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갈홍기에 따르면 “언어장벽 및 인종 차별뿐 아니라 이역에서의 보장 없는 생활 타개를 위하여 한인들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신앙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정신적인 위로와 격려였는데 그들의 공동생활에 유일의 중심인 교회가 이들에게 바로 이 정신적인 힘을 제공하여 현실에서 부닥치는 모든 장애물과 저항요소를 극복할 수 있게 해 주었던 것은 우리 교회가 이바지한 최대의 업적이었다.”
그리고 유학생들은 취업이 엄격히 규제된 상황에서 김 경, 강영소, 천세헌, 박 필 등 본 교회 교인들이 경영하는 식당에서 요리사, 웨이터, 잡역 등의 일자리를 구하여 고학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예배당의 침실이나 교인이 경영하는 식당 부엌구석의 감자포대 위에서 잠을 자며 생활할 수 있었다. 그리고 교회는 교포의 취직 및 정보교환의 중심이어서 1930년대에 최세창, 한장호, 임 초 등이 교회를 통하여 사업정보를 나누었고 사업체를 인수하였다.
1931년 12월 31일에 송구영신을 맞아 그날 저녁에 모인 자리에서 특별히 만주병란 중에 먹을 것과 입을 것과 덮을 것이 없어서 추위와 죽음을 무릅쓰고 헤매는 동포들을 생각하고 동정금을 거두었는데 교인들이 헌금한 돈은 10달러 7센트였다. 그리고 김 경, 황보익준, 천세헌, 하희옥, 강정근, 강영상, 염광섭, 오한수, 이선두, 이보민, 나재원, 변준호, 정한경, 현 철, 배민수, 배동선, 윤 림, 윤기성, 강영문, 강영대, 김명선, 김경찬, 김지수, 위혜진, 장세운, 김태선, 김봉성, 홍난파, 갈홍기, 이재백, 오영철, 박태현, 이병권 등이 총 53달러 7센트를 따로 만주 동포를 위하여 헌금했다. 위의 한인 명단은 대부분이 시카고한인감리교회 교인이었다.
1932년 3월 삼일절 기념식은 배동선의 사회로 시작됐다. 목회자였던 갈홍기는 기도와 촌감의 순서를 맡았다. 그날 순서는 갈홍기가 기도한 후 국기경례, 애국가 합창, 배동선의 식사, 김봉성의 선인시 낭독, 만세삼창, 김메세와 윤기성의 합창, 홍영후의 연설, 묵도, 갈홍기와 장세운의 촌감 그리고 광고에 이어 폐회했다. 촌감을 맡은 갈홍기는 삼일절의 의의와 역사적 유래 그리고 그에 대한 구명동이 있어 장래 어떠한 관련으로 삼일절을 지킬 것을 간단하면서도 조리 있게 소감을 말하였다.
1932년 시카고대학 인터내셔널 홀이 문을 연 후 매주 일요일 오후에 학자와 정치가 등 유명 인사들의 강좌에 이어 토론하고 만찬을 나누었는데 본 교회는 이 일요일 만찬에서 한국의 날 행사를 마련하고 한국을 알려 독립운동을 위해 찬조를 받을 목적을 계획했다. 첫 프로그램에 ‘초가집’의 저자였던 뉴욕주립대학교 영문학과의 강영일 교수를 초청했다. 그 후 본 교회에 출석하는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주말의 ‘인터내셔널 나잇’ 행사를 마련하고 한국을 알리는 기회를 추가했다.
1932년 7월에 제14회 북미한인유학생 대회가 있었다. 제3일이 되던 그달 10일 오전 11시 30분에 시카고한인감리교회에서 유학생 중서부연회 주최로 주일예배가 있었다. 본 교회 목회자인 갈홍기의 사회로 한국에서 방문한 김창세 박사가 설교하여 많은 감동을 주었고, 김메세가 특별 찬송을 하여 큰 성황을 이루었다. 그해 갈홍기는 북미한인유학생회의 총회 회장으로 선정되었다.
1932년 7월 31일 주일 오후 예배 끝에 교인대회를 개최하고 일반 사무처리와 금후 교회발전책을 논의한 후 몇 가지 결의하였다. 김지수, 하희옥, 천세헌, 나재원, 배동선, 장세윤, 김 경, 강영소 그리고 염광섭을 이사로 선정하였고, 갈홍기 목사를 재임토록 결의했고, 평신도 대표로 염광섭과 김매세를 선임했으며, 전형위원으로 염광섭, 윤기성 그리고 나재원을 선택했고, 교회 사찰로 천세헌이 재임토록 하였으며, 새해 재정예산은 이사회에 위임했다.
그해 9월 29일자의 ‘신한민보’에서 시카고한인감리교회의 갈홍기 목사에 대한 근황을 듣는다. “시카고한인교회의 목사요 시카고대학에서 사회철학학위를 위하여 연구하며 더욱이 장래 우리 사회의 유망한 혁명청년 중에 하나인 갈홍기씨가 인터네이셔날 하우스에서 사무를 집행하게 되었다. 갈홍기씨의 민첩하고 진정한 활동의 결과 수십인 한인학생들이 국제회관에서 무료로 기숙하게 되었다. 그런 동시에 국제적 회합이 매일이라고 한다. 장래 우리 한인학생에 대하여 특별한 대우가 있으리라고 한다... 특별히 갈홍기씨는 청년목사인 동시에 경제적 불경기로 인하여 물질적 부조를 불고하고 희생적 교역자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교역기간 교인이 증가되어 행정부를 조직을 보강했다. 윤기성 서기, 김지수 재무 외에 가옥 관리원으로는 나재원, 하희옥, 김 경, 예배위원으로 강혜림, 김베세, 장세운, 배민수, 염광섭, 음악부장은 김베새, 엡윗청년회장은 강혜림, 평신도 대표는 김베세, 염광섭이었다.
갈홍기는 박사학위 공부와 국제학생회 업무 등 여러 가지로 분망하여 1932년 10월 23일 주일 시카고한인감리교회 목사직을 사면했다. 그는 약 1년간 담임목사로 사역한 셈이다. 이듬해 2월 전경무를 전임 전도사로 청빙하고, 이에 신구 목사의 이취임식이 시카고한인감리교회 예배당 사교실에서 5, 60명이 모인 가운데 있었다. 김 경의 사회로 개회하고 ‘우리 교회가 갈홍기 목사의 과거의 정신적 물질적 충실한 교역을 항상 기억할 것이며 더욱이 새로 취임하신 전경무 전도사와 만사에 협동하여 시카고 교회가 특별히 기독의 정신 즉 사랑과 자유와 평등주의와 인권보존 등을 발휘하도록 노력하여 우리 한인교회와 사회에만 행복을 보급할 뿐 아니라 온 인류 사회의 행복이 되도록 노력하자’는 말로 김 경이 사회사를 대신했다.
교회 이사장 장세운의 가슴이 터지는 송별사와 환영사에 이어 염광섭과 배민수와 백인 킹 씨 및 전경무 부인 등의 간단한 감상담이 있은 다음에 갈홍기 목사의 고별사가 있었다. 갈홍기는 그의 고별사에서 특별히 국가와 교회의 분치합작운동과 경제운동과 사회운동과 혁명운동을 우리 한인교인들은 각각 의무분담원칙에 의하여 충실히 하되 국가가 종교보다 근본적 정치 사회 집단권력 기관이 되는 것을 역설하였다.
그런데 시카고한인연합감리교회의 ‘선교수첩’에는 1934년 6월까지라고 적혀있어 갈홍기가 담임목사로 사퇴한 후 설교 등으로 교회를 섬겼을 것이다. 1933년 최경식이 소천했을 때 갈홍기가 장례식을 주례함에서 그의 교회 섬김을 보게 된다. 최경식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시카고대학 대학원에서 사회학박사과정에 있었다. 그의 죽음은 이곳 한인사회의 최초의 장례로 꼽혔다.
귀국
갈홍기는 1934년 6월 본 대학을 졸업하고 철학박사학위를 받은 직후 귀국했다. 그는 그해 모교인 연희전문학교 교수가 되었고, 1939년 이후 기독교조선감리회 중부연회에서 목회도 하였다. 일제말기 기독교의 일본화를 논하고 학병지원을 권유하기도 했다. 해방 후 숙명여자대학교 교수와 주일대표부 참사관, 외무부 차관, 주말레이지아 대사 등을 역임했다. 은퇴한 그는 도미하여 1989년 8월 25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롱비치에서 소천했다.
damien.sohn@gmail.com
10/05/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