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년을 맞은 아르헨티나제일교회의 지난 50년 역사를 돌아보며 놀라운 교회 부흥과 믿음의 인재를 양성하는 명문학교로 우뚝 세워진 후후이제일기독학교 뿐 아니라 또 하나의 빼놓을 수 없는 사역이 있음을 보았다. 바로 아르헨티나 국내 선교와 탄자니아 선교였다.
제일교회 성도들은 이미 4차례씩이나 탄자니아를 직접 방문해 교회 헌당과 우물 완공식을 통해 현지인들과 함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기자는 탄자니아를 직접 볼 수 없는 안타까움이 컸지만 지 교회를 돌아보고 교회가 제공해준 탄자니아선교를 담은 영상을 통해 사역소식을 들었다. 아울러 현지에서 헌신하고 있는 최광재 선교사의 간증도 들어본다.
아르헨티노를 위한 지교회 설립
1991년 아르헨티나제일교회는 처음으로 아르헨티노를 위한 선교의 문을 열었다. 당시 교회 장로님이 자신의 집을 헌납함으로 세워진 라누스제일교회가 지교회 1호다. 처음 교회가 세워졌을 때는 제일교회 사역자가 그곳으로 파송돼 교회를 개척하고 이끌었지만 2000년 새롭게 교회를 건축하고 현재 에드와르도 로하스 목사가 맡아 사역하고 있다.
이후로도 국내 선교는 이어졌다. 북쪽으로는 살따주 엠바르카시온(담임 움베르또 로뻬스 목사)과 인디오 마을 빠드레로사노(담임 훌리오 산체스 목사)와 휘지칼(담임 아빌라 전도사), 오란(담임 마리오 뽀르탈 목사)시에 지교회를 설립했고 서쪽 국경주인 산후안(담임 앙헬 까리소 목사)시와 산루이스(담임 마르셀로 목사) 시에 지교회를 설립하는 등 총 7개 지역에 새 성전과 함께 담임 사역자의 사택까지 신축해 제공함으로 각 지역마다 영혼구원을 위한 사역에 헌신하도록 돕고 있다.
아르헨티나 담을 넘어 아프리카로
제일장로교회는 여기에 머물지 않고 아르헨티나의 담을 넘어 케냐와 중국, 아프리카 탄자니아로 선교의 장을 펴갔다. 탄자니아 선교의 문이 열린 것은 지난 2013년부터다. 최광언 목사의 형인 최광재 목사가 현직에서 은퇴하고 늦깎이 선교사가 돼 탄자니아로 가게 된 것.
그로부터 탄자니아와 연결돼 13개의 현지인 교회를 건축하고 21곳에 우물을 팠다. 또한 열악한 환경으로 학업을 이어갈 수 없는 학교들을 찾아 재건축했다.
놀라운 것은 탄자니아 선교를 위해 제일교회 당회나 교회가 움직인 것이 아니다. 성도들이 깊은 은혜와 감동을 받아 개인이 교회를 하나씩 건축하고 우물사역도 맡았다. 학원선교를 위한 건축도 성도 개개인의 헌신으로 이뤄졌다.
가난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학교를 갈 수 없는 학생들을 위해 직업훈련학교를 새롭게 건축하고 봉제, 편물기계까지 설치했다. 샤킬라 중, 고등학교에는 과학실험실을 건축했다. 실험실 내부에 상수도 시설까지 함으로 실험을 하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하고 컴퓨터실도 마련하는 등 지역 유일의 과학실험실을 제공했다.
뿐만 아니라 은제쿠 중, 고등학교에 여러 교실들을 건축했고 카샤루 지역에 마지아차이 중.고등학교에는 700여명이 한 번에 들어갈 수 있는 강당 및 다목적실을 건축하고 있다. 올 10월 완공을 예정하고 있다.
교회와 학교 건축뿐 아니라 아프리카에서는 어쩌면 물이 더 우선일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해 교회와 학교를 중심으로 우물을 팠다. 우물 하나를 파려면 1만2천 달러 정도가 소요된다. 제일교회 성도 21명의 헌신으로 21곳에서 물이 솟아오를 때마다 탄자니아 현지인들은 환호와 함께 춤사위가 벌어진다.
이처럼 제일교회가 탄자니아의 영혼들을 위해 헌신할 수 있도록 다리가 된 건 최광재 선교사다. 다음은 최광재 목사의 간증이다.
세상 돌다 하나님 손에 붙잡힌 최광재 목사
최광재 목사에겐 수재에 가까운 형이 었다고 한다. 가족들은 해방이 되기 전 황해도로 가고, 형은 서울에서 경복중학교를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형이 아파 시골로 내려왔다. 병원을 다녀도 병명을 찾을 수 없고, 결국 그 동네 풍습대로 굿판을 벌이기로 했다. 3일 굿을 하니 동네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굿판이 벌어지던 중 형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런데 웬일일까? 굿이 끝나고 무당이 돌아가자 돌연 형은 정신이상 증세를 보였다. 유도복을 입고 머리맡에 두었던 성경을 갖고 동네로 나가 동생인 최광재 목사에게 그 성경을 크게 읽으라고 시키기를 반복하자 얼마나 창피했는지 모른다고 그 시절을 회고한다. 그렇지만 병세는 호전되지 않자, 이번엔 고모가 “목사님을 모셔서 기도를 받아보라”고 권했고 최광재 목사는 형을 위해 10리 밖에 있는 목사님을 모시고 왔다. 그 목사님이 들어오면서 ‘광섭씨’하고 부르니 그 길로 형은 소스라쳐 놀라며 울고불고 대성통곡을 하더란다. 그저 목사님이 이름만 불렀을 뿐인데....
그 일로 그 동네 사람이 다 예수를 믿는 기적이 일어났지만 그때도 최광재 목사의 마음은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는 서강대학교를 다니며 ‘신부가 돼볼까?’도 생각했지만 신부는 너무 전통만 내세우는 것이 맘에 안 들어 대학교 3학년 때 동국대로 옮겨가며 ‘스님이?’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불교는 종교가 아니고 철학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그는 ‘돈을 많이 버는 사업가’가 되기로 했다. 큰 사업을 꿈꾸며 자금을 가지러 가는 날 아침, 기침을 하는데 피가 쏟아졌다. 폐병 초기라고 하나 몇 날이 지나도 피가 멎지 않았다. 그 순간에 섬광처럼 스치며 떠오르는 말씀이 있었다.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눅12:19-20). 그는 그 자리에서 회개하며 “한번만 살려주면 교회 화장실 청소라도 하겠습니다”고 밤새 기도하며 인생의 방향을 바꾸었다고 간증한다.
늦깎이 선교사 최광재…뻥튀기, 붕어빵, 와플기계가 선교도구
1971년 영광교회 제 1대 교역자로 부임한 최광재 전도사. 당시 감신대 3학년 재학 중이던 그가 담임으로 부임해 목회를 시작했다. 그의 표어는 ‘오늘은 케냐, 내일은 아프리카, 모레는 세계’였다. 아마도 오늘의 최광재 목사를 예견이라도 한 것이었을까?... 전도사로 담임 사역자가 된 그는 40년의 사역을 마치고 2011년 원로목사로 추대되면서 현직에서 물러났다.
은퇴를 하면서 ‘농촌이나 지리산 쪽으로 가서 살아야지...’하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친분 있던 전도사가 생일 선물을 사들고 와서 “이제 은퇴했으니 탄자니아에 가서 선교나 하시죠”라고 던진 말이 씨가 됐다. 그 말을 들을 때는 “이 나이에 어딜 가냐?”고 웃어 넘겼는데, 앉으나 서나 “가”, “가”라는 음성이 맴돌아 결국 선교사의 길을 걷게 됐다고 말한다. 그때 자신의 표어 ‘오늘은 케냐, 내일은 아프리카, 모레는 세계’가 새삼 떠올랐다고 한다.
이런 표어 때문인지 최광재 목사는 목회 초기부터 선교에 열심히 있었다. 아프리카에서 사역하던 미국 선교사들이 사역을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갈 때면 한국에서 선교사를 추천해 파송하기도 했다. 그러던 그가 뒤늦게 선교사가 돼 탄자니아에 머물게 됐다.
이렇게 시작된 늦깎이 최광재 선교사의 선교도구는 뻥튀기, 붕어빵, 와플기계였다. 그곳 현지인들은 돈이 많은 자나 적은 자나 뻥튀기를 너무 좋아했다. 뻥튀기의 소음 때문에 경찰서에 미리 신고를 하는 것도 일과였다. 뻥튀기를 뻥뻥 튀기며 사람들을 모았고 그들에게 말씀을 전한 것이 탄자니아선교의 시작이다.
하나님은 늦깎이 최광재 선교사를 홀로 두지 않으시고 제일교회 최광언 목사와 성도들을 통해 더 큰일을 행하시도록 인도하셨다. 이 모든 열매들을 보며 최광재 선교사와 제일교회 최광언 목사, 그리고 제일교회 온 성도들은 ‘이 모든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입을 모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고 있다.
이 귀한 사역이 후대까지 이어져 땅 끝까지 복음이 전해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일에 큰 몫을 담당하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이성자 기자>
08.23.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