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중세교회 1000년 - 어둠에 잠긴 구속역사의 현장 (39)

프라하의 봄 

얀 후스(Jan Hus, 1369-1415)는 영국의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1384)와 함께 16세기 종교개혁의 선구자로 손꼽히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1348년에 현재 체코의 수도인 프라하에 설립된 카렐 대학에 입학하여 인문학과 신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철학과 신학을 가르치는 교수로 활동을 하다가, 같은 대학의 학장직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그로 인해 카렐 대학이 체코 종교개혁의 근원지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다. 

후스는 1400년에 로마가톨릭교회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았다. 1402년부터 약 10년간 학교의 베들레헴채플의 설교자로 섬겼다. 그의 개혁적 설교가 학생은 물론 동료교수들에게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그곳에서 드려지는 예배는 그 당시 가톨릭교회와 매우 다른 점이 있었다. 먼저 라틴어가 아닌 체코어, 즉 예배를 위해 참석한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가 출간한 설교집을 통해 체코의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영향을 받았다. 나아가서 정사각형에 가까운 베들레헴채플 건물의 한 면 중심에 강대상을 자리하게 하였다. 예배를 위해 모인 모든 성도들이 동등한 신분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도록 하게 한 것이다.  

프라하의 어원은 ‘문턱’이다. 유럽대륙의 중앙에서 유럽의 동서를 잇는 교차로 역할을 하던 요지에서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프라하는 위클리프가 활동하던 런던과도 밀접한 관계를 지녔었다. 후스에게 가장 커다란 영향을 준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위클리프이다. 그와 그의 동료들이 위클리프의 글에 매료되었다. 후스는 성경을 중심하는 개혁적인 마인드를 지닐 수 있는 배경 속에서 성장하고 활동한 것이다. 영국에서 시작된 교회 개혁의 물결이 대륙의 체코로 건너갔다. 프라하의 영적인 봄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체코교회의 개혁 배경

후스의 개혁은 영국의 위클리프로부터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지만 체코라는 특수한 환경 속에서 이뤄졌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후스가 활동하기 전부터 이미 체코의 종교개혁은 성만찬을 중심으로 서서히 진행되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얀 밀리치(Jan Milic, 1305-1374)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신부로 활동하다가 교회의 부패를 참지 못하고 사임한 뒤 줄곧 중세교회의 세속화를 공격하면서 성경을 삶의 표본으로 삼을 것을 주장하였다. 그도 모국어를 사용하여 설교하였는데, 평신도들의 신앙을 위해 반드시 그들의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밀리치가 성만찬을 개혁의 중심으로 수용한 이유가 있다. 그가 교회의 개혁과 대중적 개혁운동을 같은 맥락에 두었기 때문이다. 그는 결단은 매우 과감하였다. 1372년, 프라하의 중심에 자리한 홍등가를 찾아가 창녀들에게 그들의 언어로 성만찬을 베풀었다. 그 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복음을 전해 듣고 이해한 여인들이 변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회심한 뒤 과거의 삶을 청산하고 개혁을 지지하는 위치에서 살아갔다. 과거 창녀촌을 새 예루살렘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밀리치가 창녀들에게 제공한 성만찬은 실제적으로 그들이 필요했던 매일의 양식이었다. 사회로부터 버려진 채 고픈 배를 쥐고 살아가던 자들에게 사랑의 손길로다가 선 것이다. 교회 안에서 상징의 옷을 입은 채 전통적 예전의 모습으로 자리매김한 성만찬을, 새로운 사회 건설과 연결시켜 초대교회 성도들이 경험했던 음식 공동체를 재해석한 것이다. 

1374년, 이단으로 선고를 받은 밀리치가 아비뇽에서 사망하였지만 그의 개혁 정신은 중단되지 않고 후대에 이어졌다. 야노보의 마테이(Matej z Janova, 1350-1393)가 그의 제자 중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 역시 성만찬을 중심으로 교회의 개혁을 이루려 하였다. 그는 교회의 타락을 불러온 성직자의 사치스런 생활이 가난한 사람을 낳았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그는 수시로 평신도들에게 성만찬을 베풀었으며, 그 결과 사회 변화의 통로가 되었다. 무엇보다 마테이를 통해 ‘이종성찬’이란 이론적 토대가 마련되었다. 참고로, 이종성찬이란 사제들에게만 포도주를 주던 전통을 깨고 평신도들에게도 빵과 포도주를 동시에 주는 것이다. 

 

바로 그 교회!  

위클리프의 개혁사상과 함께 체코교회 개혁 선구자들로부터 동시에 영향을 받은 후스의 가장 큰 고민은 성경적인 교회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중세교회 울타리 안에 가두어져 살던 자들에게 이러한 고민은 그 자체가 혁신적인 것이었다. 교회에서 태어나서 교회를 중심으로 잘 살다가 죽는 것보다 더욱 큰 소망이 없었기 때문이다. 후스도 중세교회가 가르치는 것을 배우고 그대로 실천하는 것 이상의 것을 생각할 수 없는 환경에 서 있었다. 

그러나 성경의 진리가 그의 눈과 마음을 활짝 열게 하였다. 당시 그가 경험하던 교회의 모습은 성경에 기록된 내용과 판이하게 달았다. 그는 성경 뿐 아니라 교부들과 다른 신학자들의 글을 광범위하게 섭렵하였다. 그 결과 자신이 발견한 참된 교회의 모습을 적극적으로 타인에게 알리기 시작하였다. 그가 선택한 방법은 ‘교회’라는 논문을 저술하는 것이었다. 파급 효과가 대단하였다.  

후스가 ‘교회’를 집필한 직접적인 계기가 된 사건이 있었다. 1413년, 프라하대학 신학부 소속 8명의 교수들이 로마가톨릭교회의 권위 앞에 고개를 숙였다. 프라하에서 면죄부를 파는 것에 동의한 것이다. 후스에게도 복종하고 동참할 것을 강압적으로 요구하였다. 후스가 그들의 요구에 대한 답을 위해 저술한 것이 바로 ‘교회’라는 논문이다. 위클리프의 교회론에 크게 의존하고 있지만, 성경구절을 대다수 인용하면서 성경이 말하는 ‘그 교회’의 모습을 드러내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교회’는 모두 23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흥미로운 것은 각 장의 제목만 읽어봐도 전체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1장부터 6장까지는 교회란 어떤 공동체인지에 대한 그의 진지한 고민이 잘 담겨져 있다(1장, 교회의 하나됨. 2장, 하나의 보편적 교회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3장,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의 구성원인 것은 아니다. 4장, 그리스도, 교회의 유일한 머리. 5장, 교회 안의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 6장, 그리스도, 선택받은 자들의 머리). 

이 부분에서 강조되고 있는 점은 그가 교회를 철저하게 그리스도 중심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교회의 하나됨과 보편성은, 오직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되시기 때문이다. 오직 그리스도로부터 구원을 받은 자만 진정한 교회의 일원이 될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오직 그리스도만 선택된 자들의 머리가 되신다는 그의 주장은 당시 교황이 교회의 머리가 되고 고위 성직자들이 교회의 몸을 이루고 있다는 주장을 전적으로 반박하는 일이었다. 

후스는 ‘교회’의 7장부터 10장까지 교회의 신앙, 기초, 권위 등을 서술하면서 교황권을 노골적으로 반대하는 내용을 기록하였다(7장, 로마교황과 추기경들이 보편교회는 아니다. 8장, 교회의 토대인 신앙. 9장, 반석이신 그리스도 위에 세워진 교회. 10장, 메고 푸는 권세). 후스는 교황과 로마교회를 그리스도와 사도들과 전혀 반대되는 집단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진정한 교회는 성도들에게 신앙을 가르치고 성장하게 하는데, 로마교회는 무조건 자신들의 교리를 받아들이고 복종하라며 맹목적인 신앙을 요구하고 있다. 교황이 베드로의 후계자라고 자청하면서 교회의 기초라고 주장하지만 교회의 근본은 오직 반석이신 그리스도이시다. 교회의 권세 역시 베드로 개인에게 준 것이 아니라 교회공동체에게 준 것이다. 

나아가서 후스는 11장에서 14장에서 ‘교회’를 맡은 자들의 신앙은 반드시 삶의 실천으로 연결되어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11장, 성직자의 권세를 옹호하기 위한 성서의 남용, 12장, 구원은 진정한 로마의 감독이신 그리스도에게 달려있다. 13장, 교황은 교회의 머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리인이다. 14장, 추기경들이 사도들의 진정한 계승자일 때). 교회에서 참된 권위를 가질 수 있는 자는 삶 속에서 열매를 드러내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세상의 일을 추구하면서 직분을 맞고 있는 자는 적그리스도의 고용인에 불과하다.  

마지막으로 15장부터 마지막까지는 교황과 지도자들을 향한 저항권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15장, 교황과 추기경들이 없이도 교회는 다스려질 수 있다. 16장, 하나님의 법이 교회의 판결 기준이다. 17장, 교황권에 대한 후스의 저항. 18장, 사도직 지위 혹은 베드로의 권좌. 19장, 언제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복종해야 하는가? 20장, 교회나 고위성직자들에게 언제나 복종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21장, 어떤 상황에서 고위성직자들에게 복종해야 하는가? 22장, 정당한 파문과 부당한 파문, 23장, 성직 정지와 금지). 한 가지 특이한 것은 후스는 면죄부는 물론 성직임명이나 성직록 등에 대하여 향후 종교개혁자들의 주장을 보다 강한 어조로 비판하였다는 것이다. 

 

거위와 백조 

로마가톨릭교회는 콘스탄츠 공의회(1414-1418)에서 후스를 이단으로 선고하였다. 원래 이 공의회가 모인 목적은 3명의 교황이 정통성을 다투는 사태가 벌어지는 상황을 종식하고 교회를 통일하기 위함이었다. 후스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지기스문트로부터 신변안전 보장을 받고 콘스탄츠로 갔지만 약속과 달리 체포당한 뒤 자신의 입장을 해명할 기회도 얻지 못하고 죄인으로 몰아갔다. 심지어 후스가 성부, 성자, 성령으로 이뤄진 4위격이라고 주장했다고 사실 무근의 죄목을 포함시켰다.  

1415년 7월 6일, 후스는 화형식이 벌어졌다. 교회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으려고 세속권력자에게 그를 사형에 처하게 하였다. 후스는 끝까지 자기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았다. 판결 이후 성직 박탈 의식이 행해졌다. 그에게 ‘이단의 주모자’라는 글과 마귀가 그려진 모자를 씌웠다. 후스는 팔을 벌려 시편 21편을 낭독했다. 그는 자신이 썼던 모자가 이단의 모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인 황금의 관임을 확신하였다. 

후스의 화형에 대해 체코인들이 격분했다. 결국 1419년부터 1436년까지 수스전쟁이 계속되었다. 이 전쟁으로 중유럽은 대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로마교회는 개혁자의 목숨을 빼앗아갔지만 그의 개혁사상은 힘차게 널리 퍼져나간 것이다.  

후스는 ‘거위’란 뜻이다. 거위를 키우는 마을에서 태어나 자랐기에 얻은 이름이다. 그가 순교전 남긴 유명한 말이 있다. “너희들은 지금 거의 한 마리를 불태우지만 한 세기가 지나면 태우지도 끓이지도 못할 백조를 만나게 될 것이다!” 정확하게 1세기와 2년이 지난 뒤인 1517년에 그가 언급한 백조가 나타났다. 그가 바로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이다.  .   

covenantcho@yahoo.com

Leave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