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란 무엇인가?
말은 ‘존재의 집’이라고 합니다. 즉 말은 의사소통 기능 그 이상의 기능이 있다는 것입니다. 말은 우리 사람들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으로 영적인 것입니다. 서양철학, 특히 플라톤은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 중심이었습니다. 상당히 실용적이고 실질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동양의 철학들은 영적이요 감각적인 것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종교가 동양에서 나온 것입니다.
특히 유식불교에 팔식이 있는데 눈, 귀, 코, 혀, 촉감, 뜻의식, 자의식, 무의식 이렇게 8가지 감각의식을 단계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단계 무의식의 세계에까지 들어가기 위해 도를 닦는 것입니다. 감각에도 의식이 있는 것으로 본 것입니다.
그런데 데카르트(근대철학의 아버지)와 그 뒤에 나오는 프랑스 철학자 데리다나 들뢰즈 같은 사람들이 드디어 음성이나 소리의 세계에 대한 성찰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성중심의 서양철학에서 음성중심의 새로운 철학을 펼치게 됩니다.
그들은 소리자체가 혁명적인 힘이 있다는 인식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소리가 오염이 되었다고 평가를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처음에 에덴동산에서 사용하던 음성이 오염이 되어서 그러한 파워가 소멸되었다고 저는 해석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사귀고 대화를 하였는데 어떤 말로 했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 언어는 하나님의 형상의 능력을 지닌 완벽한 언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하면서 저주를 받고 우리의 음성마저도 오염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이 하는 말은 아름다운 말보다 더럽고 추악한 말을 많이 하는 것을 보면 그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 2의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회복된 사람들은 그들의 말과 음성도 에덴의 언어로 회복되어야 할 것입니다. 처음 얘기한 것처럼 말은 존재의 집이라는 뜻이 우리의 속사람이 변해야 우리의 말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바벨탑 사건에서 인류가 여러 가지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한국 사람으로 태어나서 한국말을 모국어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모든 언어들이 각기 다른 음성학적인 특징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언어들이 가져야할 조건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최소한의 에너지로 자신의 메시지와 감정을 잘 표현하고 전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계의 주요 언어들을 공부하면서 이러한 조건들에 부합하는구나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국말은 라틴계열이나 중국어보다 목이 금방 피곤해지고 잠기게 됩니다. 그것은 한글이 발음이나 표기는 과학적인 언어인데 음성학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중국 발음 비슷하게 발음이 되었는데 일제강점기 1930년에 한글학회에서 주시경 선생이 발음을 완전히 일본식으로 정리를 하면서 더욱 더 목에 무리가 가는 언어가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1910년에 평양노회록을 보면 주기철 목사님이 쥬기철로 표기가 되어있습니다. 주와 쥬는 발음이 완전히 다릅니다. 주는 뒤로 먹으면서 목을 피곤하게 하는 발음이고 쥬는 호흡이 연결되어 목에 건강한 발음입니다. 이렇게 발음이 더 안 좋은 쪽으로 정리가 되면서 한국말은 세계적인 언어의 기준에 미달되는 말이 된 것입니다.
말이라는 것이 듣기만 해도 기분 좋고, 하는 사람도 자기 소리에 흥분되게 하나님이 주셨는데 한국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나빠지려고 하는 언어가 되었습니다.
말이 바뀌면 사람들의 감성이 바뀌고 국민성도 바뀐다는 확신을 저는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 마음을 온유하게 갈고 닦을 때 온화한 언행이 나오지만 좋은 테크닉에 의해 만들어진 음성은 음성자체로서 다른 사람을 기분 좋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온화하고 평안한 내면의 상태가 기분 좋은 음성을 만들고 또한 자기의 발성기관을 잘 사용하는 테크닉이 기분 좋은 음성을 만들어서 감정과 테크닉이 서로 상호작용을 통하여 우리의 음성이 완벽하게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다음호에 계속>
06.15.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