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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염광섭(1895-1981)

염광섭은 1895년 12월 5일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는 휘문의숙을 졸업하고 1914년 유학차 도미하여 1916년에 미국 미시시피 주 메리안의 메리안 대학에 입학하여 문학과 피아노를 전공하다가 켄터키 주 윌모어에 있는 아쉬버리 대학에서 수학했고 1919년에 조지아 주의 애틀랜타에 있는 에모리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이해 여름 아이오와주 드모인에서 열린 선교 자원봉사자 대회에 참석했을 때 동족 유학생들끼리 연락 유대를 가지고 있음을 안 후 한인 유학생 모임을 구상하면서 시카고를 방문하였다.

 

시카고 기도처 인도자

 

에모리 대학에서 신학공부를 마친 염광섭은 한인유학생회를 구상하면서 1922년에 시카고대학에 입학했다. 이 무렵 그는 레인 팍 에비뉴 39가의 김일선 부부가 경영하던 셋집의 방 하나를 무상으로 얻어 타 지방에서 학비를 벌려 시카고에 오던 한인 유학생들의 취업 알선을 위한 학생센터를 꾸미고 이 방에서 기도회를 시작했다. 

이 기도회는 교역자 없이 진행되었으나 신학을 공부한 염광섭의 지도하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듬해 시카고 북쪽 링컨 애비뉴의 강영소의 집에서 또 다른 기도회도 있었는데 염광섭은 황창하와 현정염과 함께 참석하기도 하였다. 염광섭은 1923년에 본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시카고 한인교회 전도사

 

1923년 10월 북쪽 기도회 주최로 공동회가 열렸을 때 시카고에 한인교회 설립을 결의하고 이를 위하여 111달러의 헌금을 모았다. 그때 북미 유학생 총회장이었던 염광섭은 거금 25달러를 헌금했다. 이듬해 3.1독립만세운동의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김창준 목사가 유학차 시카고에 도착하자 교회를 설립하려는 의논이 실천되었다. 

염광섭이 사전에 교섭한 후 7월 23일에 그가 김 경, 강영소, 이태성과 함께 락 리버 연회의 선교총회 회장이자 게렛 신학교 교장이었던 호겔트 박사를 만났을 때 오는 주일부터 예배를 시작하되 목사의 사례비는 선교부가 책정하기로 하였다. 

1924년 7월 27일 오후 2시에 서부 청년회 강당에서 교회 설립식이 있었다. 그런데 본 교회는 락 리버 연회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었다. 찬미 224장을 부른 후 사회자였던 염광섭이 기도했다. 그 후 강영소의 교회 설립취지, 김예택의 주악, 연보, 차의석의 성서낭독, 광성학교 교장 김득수의 설교, 오한영의 솔로 그리고 하와이청년회 총무 이태성의 축사에 이어 시카고한인교회 설립을 공포했다. 이후 일동의 140장 찬미, 각 단체 대표자의 축사, 일동의 3장 찬미로 마쳤다. 예배 후 행정부와 이사부를 조직했다. 

염광섭은 장세운과 함께 전도사로 피선되어 담임목사 김창준과 전도목사 조희염과 함께 교회를 섬겼다. 그의 전도사직은 1928년 말까지였으니 3년 5개월간이었다. 

1926년 1월 1일 하오 6시에 이사 김 경이 경영하는 워싱턴 카페테리아에서 7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신년축하회가 있었다. 애국가를 부른 후 양 득과 김 경이 개회사를 한 후 염광섭이 ‘객지에 당하는 송구영신’이라는 제목으로 연설을 하였다. 이날 연설에는 황에스더의 ‘신년 신월 신일’과 김창준 목사의 ‘내 동포’도 있었다. 독창 등 음악순서도 있었고, 여흥회도 있었다.

그해 9월 4일 슈츠 감리사가 설교하고 성만찬을 집전했다. 이는 본 교회에서는 처음 있는 성만찬이었는데, 염광섭에게도 처음 있는 성만찬이었을 것이다. 이전의 김창준 목사는 한국에서 목사안수를 받았지만, 시카고한인교회 시무 당시 미국 감리교단의 정회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성만찬을 할 수 없었는지 모른다.

그달에 시카고대학 박사원에서 다년간 종교철학을 연구하는 염광섭이 주미 학생회 회장으로서 학생들의 전도를 위하여 상항과 나성을 방문하였다. 이로 보건대 그는 학생회를 위한 전도사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음을 본다. 

염광섭이 결혼한 1927년의 12월 2일에 본 교회 영접 위원이었던 그는 다른 세 명과 함께 시카고 서북 정거장에 나가 김창준 목사의 후임으로 온 한승곤 목사를 영접했다. 한 목사는 감리교단의 파송 목사였다. 

이듬해 이사회 이사의 한 명으로 염광섭이 선임되었다. 그런데 그해 3월 30일에 그의 부인 문로라가 임신 중 독감에 아기와 함께 세상을 영별했는데 신한민보의 보도대로 “염광섭군의 고분지탄도 동정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자 없었다.”

 

시카고 한인교회 목사

 

1930년 4월에 이화전문학교 교장 아펜젤러가 본 교회 예배시간에 조선 여자 교육에 대한 강연을 한 다음 날 저녁에 만찬회에서 염광섭이 정한경과 박로영, 김명선과 함께 감상담을 말했다. 그해 7월 시카고 대학에서 심리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염광섭을 위한 박사 축하회가 본 교회에서 성대하게 열렸다. 그해 9월에 2년 임기의 본 교회 이사로 선임되었다. 

목회자 선정이 어려운 가운데 1931년 2월 본 교회 이사부 부장 염광섭이 임시 담임 교역자로 선정되었다. 당시는 담임 교역자를 목사라고 칭하기도 했다. 그는 교인 중심의 교회를 만들기 위하여 교인의 정식 입교식을 거행하였고, 행정부를 두고 그 안에 전도부, 예배 유사부, 교회 기사부, 엡윗 리그부, 음악부 그리고 교인 모집부를 두어 일반 교우들과 같이 모든 교역을 협동하기로 하였다. 

1931년 현재, 유학생으로는 시카고대학의 장세운, 최경식, 위해진, 길진주, 김메리, 서북대학의 김명선, 김 훈, 이복원, 갈홍기, 정경옥, 황보익, 루이스 대학의 양일태, 김태선, 김창순, 김봉성, 김호철, 이웅영, 이종숙, 이재백, 박정우, 남궁탁, 노스팍 대학의 한세광, 김옥문, 백낭봉, 맥코믹 장로교신학교의 강택모, 이규용, 김인준, 문찬규, 사범학교의 위웰렌, 미술학원의 박영직, 미션 체육 대학에 김근명, 넥뷰의 임캐롤라인, 김헬렌, 전헬렌, 아메리칸 음악대학의 윤기성 등이 있었고, 재학하지 않은 학생으로 임기선과 조봉환과 차의불렌 등이 있었다. 이들 모든 유학생은 본 교회 교인으로 보면 될 것이다.

염광섭의 목회 기간 가장 뛰어난 업적은 예배당 마련이었다. 미국 북감리교회가 옥데일 애비뉴 가옥을 14,000달러에 매입하고 이를 시카고한인교회가 사용하였다. 광이 35척, 장이 150척의 대지에 2층 붉은 벽돌집인데 상층에 예배실, 침실 4간, 목욕실 1간이 있고 하층에 사무실 1간, 침실 1간, 도서실 1간, 식당 1간, 주방 1간이 있었으며, 식당 뒤로 침실 3, 4간을 더 들일만 한 공간이 있었다. 이로써 염광섭이 한인 유학생에 대한 사랑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다. 

한인교회는 그해 5월에 이 건물의 수리비 7백 달러를 미주 동포에게 헌금해 줄 것을 이사부 부장 염광섭과 위원 7명의 이름으로 아래와 같이 호소했다. 

“...원래 교우가 소수인 중 과반이 학생이므로 재정 구비의 능력이 심히 잔핍하여 원근에 계신 일반 부모 형제자매의 은혜로운 방조를 불가불 청케 되었습니다. 잊지 마실 것은 전무후무할 이것이 한 번이올시다. 우리 직원 일동의 열망도 생각하시려니와 우리 시카고 형제의 터를 잡아주시는 그 일에 한 분이 되시기로 유념하시어 다소간 동정해 주심을 깊이 믿고 바라나이다. 

1931년 4월 23일”

6월 14일 하오 2시에 엡웻 청년회 주최로 성대한 예배가 진행됐다. 회장 강제순 여사의 사회 하에 일동이 찬송가를 부른 후 조윌람의 나팔 독주, 방창덕의 독창, 위혜진의 설교, 김베세와 라수사나의 듀엣, 일동의 찬송, 염광섭의 지방학생 소개, 수전, 박영애의 독창, 광고가 이어졌다. 폐회 후 부인들이 곱다랗게 말아온 냉면을 먹었다. 그달 22일 저녁 에반스톤에 있는 전태우의 집에 도상을 갔다가 돌아오던 중 갑자기 폭풍우가 쏟아져 전신주와 정면으로 충동하여 약 3주간 치료의 중상이었는데 다행히 1주일 만에 회복되었다고 한다. 

그해 7월 교회 강당 수리에 착수하여 번쩍한 흰 벽과 천장, 그리고 전에 없던 강대를 새로이 설계하여 교회당의 외면을 일신하여 보는 사람들의 마음이 새로워졌다. 그달에 새로 피선된 이사로는 염광섭이 3년 임기로 선정되었고, 기타 3년조, 2년조, 1년조로 구분하여 8명이 더 있었다. 그해 8월 본 교회 갈홍기 목사가 시카고한인교회 담임목사로 피선되어 염광섭의 목회는 6개월간이었다. 

 

서울대학교 교수

 

염광섭은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시카고대학 심리학과 도서실장으로 근무하다가 1943년에 본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1947년 2월에 그는 국무성의 알선으로 미군정 고문이 되어 미군 수송선으로 인천항에 도착했다. 그해 3월에 유억겸과 안동원이 영보 그릴에서 그를 위한 환영회를 개최하였고, 두 달 뒤 그가 서울대학교 대학원 정신분석과 교수가 되어 ‘멘탈테스트의 수학적 기초’라는 영어강좌를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 오전 9시부터 11시까지 강의했다. 그해 8월 18일부터 23일까지 서울과 경기도 내 중학교 교장과 교사 50여 명을 상대로 입시제도 개량 신방법 강습회가 매일 오전 8시 30분부터 정오까지 서울 문리대 심리학 교실에서 열렸는데 강사는 염광섭이었다.

그 후 염광섭은 아내 트레바 글소니클과 도미하였고, 1981년에 향년 86세로 시카고 인근에서 별세했다. damien.sohn@gmail.com

 

06.15.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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