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과는 1888년 1월 9일에 평안남도 순천에서 태어났다. 평양 숭실중학교와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교사로 잠시 활동하다가 미국으로 유학차 1913년 7월 9일에 몽골니아 선편으로 샌프란시스코(상항)에 도착했다.
삭도 교회
정인과는 그해 10월에 새크라멘토(삭도)에 안착했다. 당시 서양 교사를 초빙하여 김홍균의 집에서 매일 야학을 열었는데 정인과는 이곳에서 황사선, 김홍균, 김병규, 윤응호, 장경애, 김석은 등과 함께 공부했다.
1913년에 삭도에 교회가 세워졌는데 그해 가을에 한국에서 유학 온 신학생들이 삭도에 많이 이주함으로 교회가 날로 흥왕하였다. 11월에 정인과는 황사선과 함께 삭도에서 주일 예배와 삼일 예배를 인도하였다. 당시 교인으로는 위의 야학생과 삭도의 한인 학생이었을 것이다. 삭도 한인 학생으로는 중학교 1학년 박봉렬과 소학교에 다니던 7학년 이순복, 4학년 이순형, 1학년의 이순경과 이남애 그리고 유치원에 다니던 이태디가 있었다. 정인과가 삭도에서 행한 예배 인도는 길어야 2달가량이었지만 자비량 선교사였다.
상항 한인교회
1914년 초에 정인과는 상항으로 이주했다. 그가 그해 1월 8일의 신한민보에 기고한 아래의 “새해를 환영함”에서 그의 사람됨과 조국의 자유 독립의 메시지를 듣는다.
-나, 이 외로운 몸이 적적히 책상을 의지하고 은은히 앉아 왕사와 미래를 생각하는 중에 무한한 감상이 일어나는 것이 마치 한 조각 흑운이 서산을 좇아 일어나 홀연히 백일청천을 가리는 것 같도다. 알지 못거라 이 웨인 연고인가 다만 이 날이 때의 분각이 나의 사상을 이처럼 착란케 하도다. 청컨대 묻노니 오늘이 무슨 날이오. 이상타 문전 시가에서는 수를 헤일 수 없는 황백인종이... 온 장안을 진동하여 사람에게 정신을 어지럽게 하도다.
이같이 황황적적할 즈음에 한 친구를 맞는 즉 송구영신하는 기도를 시작한다기에 의복을 엄숙히 하고 예배당을 찾아 들어간즉슨 몇 분이 돌아앉아 있는데 기쁨도 없고 슬픔도 없으며 또 슬퍼하는 것 같기도 하고 기뻐하는 것 같기도 하여 마치 외딸을 출가시킨 가정과 방불하더라.
이날이 때를 당하여 만국 사람은 오직 기쁨으로 신년을 맞는데 다만 우리 동포는 영신하는 외형내정이 이상하고 별 하여 능히 측량치 못하겠도다... 오직 우리 민족은... 다만 신년만 환영케 되므로 희열이 상반된 줄 아노라.
이렇듯 ... 우리의 극히 사모하고 바라는 바 조국을 참극 무도한 그물에 벗겨 환영하며 천층 무저항에 들어 사망이 경각에 달린 조국 동종 구원하기를 원하는 바라. 이를 하고자 하면 인물과 재정을 환영하여서 되나니 인물은 말로만 영웅이란 자를 원치 아니하며 은은히 실행하는 사람 원하며 또 스스로 지혜 있는 체하여 모든 사람을 지휘하고자 하는 자를 원치 아니하며 복종하며 참사람으로 일하는 사람을 원하노라. 재정은 자기의 체면 타인의 권면 혹 청연 요구를 불피하여 내이거나 또 술 먹고 아편 먹고 잡기하고 좀 남는 것 있으면 내어볼까 하는 그런 재정은 천만 원이라도 불원이오. 오직 자기 의무로 알고 조국을 회복하고 동포의 생명을 구원하고자 하여 먹고 남은 것을 바치는 그 돈은 일 푼이라도 심히 원하는 바라. 동포 동포여 어서 어서 힘쓰고 힘써 우리가 사모하고 고대하는 바를 환영하기를 천만번 축수하나이다.
그해 1월 19일부터 정인과가 상항 한인 예배당에서 아이들을 모아 매일 한 시간씩 국한문을 가르친 것이나, 그가 그해 3월 19일 자 ‘신한민보’에 기고한 ‘자유독립촛점’이나 모두 ‘한국의 역사와 지리와 국어를 가르쳐서 자유 독립의 초점이 되는 소학교 정신교육을 통한 조국의 독립’에 있었다. 이런 가운데 정인과도 낮에는 상항에 있는 성경학교에서 공부하고 밤에는 서양 사람이 운영하는 야학교에서 공부에 힘썼다.
정인과는 1914년 2월 12일에 개최한 계삭회에서 상항 한인교회의 권사가 된다.
나성
1917년 6월에 정인과는 로스앤젤레스(나성)의 지금의 바이올라대학인 나성성경학원을 졸업하였다. 국민회 나성지방회가 1917년 6월 22일에 그해 졸업한 민찬호, 강영승 그리고 정인과를 위하여 졸업축하회를 개최하였을 때 신학사를 받은 정인과의 답사에서 그의 수양을 듣는다.
“우리를 위하여 축하회를 여신 여러분의 후의를 감사합니다. 나는 수양에 대한 방법을 간단히 말하나니 하나는 자연계요 하나는 문학계라. 위에 대한 진행은 관찰, 묵상 그리고 실행의 삼종이 있으니 예로 말하면 모세가 애급 황궁의 영광으로 문학과 철학의 지식이 있지마는 동족이 원수의 편책 받는 것을 관찰하는 동시에 원수를 치고 미디안으로 도망하여 가서 40년간 양을 치면서 홍해를 평지같이 시내산을 평원같이 묵상하다가 가나안에 들어감을 실행하였나니 여러분은 수양 상에 이처럼 관찰하시고 묵상하시고 또 실행하시기를 바라나이다.”
임시의정원 부의장과 외무차장
정인과는 귀국하려던 걸음을 멈추고 상항 인근 샌 알셀모에 있는 장로교신학교에 입학했다. 삼일운동 직후인 1919년 7월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될 때 북미지역에서는 안창호를 특파원으로 하여 정인과와 황진남을 수행원으로 파송했다. 이때 안창호는 임시정부의 내무총장을 맡았고, 정인과는 황진남과 함께 미국 교민대표로 임시정부 의원으로 임명되었고 이후 임시의정원 부의장과 외무차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런데 그는 1920년 모든 직을 사임한 뒤 도미하였다.
상항 한인교회
상항으로 돌아온 그해 10월 24일 주일에 정인과는 상항 한인교회에서 전도시간을 맡아 원동 방면에 대한 진상을 보고하였고 일반 청중들은 새 정신을 발휘하게 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그해 11월 25일 하오 8시에 있었던 추수감사절 예배 순서에서 그는 본 교회 담임목사인 이대위 대신에 권설(설교)도 담당했다.
귀국
정인과(제임스 정)는 1921년에 상항 장로교신학교를 졸업한 후 이듬해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신학사를, 그 이듬해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문학사를 취득하였고, 뉴욕의 콜럼비아 대학교에서 교육학을 공부했다.
1924년 유럽을 거처 한국에 귀국한 정인과는 목사, 교육가, 사회사업가로 활동했고, 해방 후 ‘대한의 가룟 유다’라는 별명이 붙은 채 한때 새소망 고아원 원장을 역임하긴 했으나 교계를 완전히 떠나 숨어 살다가 1972년에 사망했다. “정인과와 그 시대”의 저자 민경배는 교회를 수호하고 민족정신을 이어가다 조용히 역사 속으로 사라져간 그에게서 묵묵히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간 예수의 모습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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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1.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