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승은 1888년 8월 9일에 평안도 평양 박석굴에서 출생했다. 그는 부모를 따라 1905년에 하와이 사탕수수밭으로 노동이민을 갔다가 호놀룰루 한인영어학원을 졸업하고 1912년 12월에 샌프란시스코(상항)에 안착했다. 그는 이듬해 상항 쿠퍼 의과대학에서 공부하였다. 그해 12월에 본 청년회의 전도 국장으로 선정되었는데 이듬해 4월에는 본회 회장이 되었고, 이듬해 3월에 개최한 계삭회에서 강영승이 상항 교회 유사로 선정되었다. 당시 강영소와 황사선과 정인과는 권사로, 그 외에도 양주은, 홍 언, 김필권, 정영수 그리고 조병옥이 유사가 되었다.
강영승은 상항을 떠나 남가주의 클레몬트로 이주했다가 1915년 여름에 중가주의 다뉴바로 이동하였다. 그해 11월 그는 다뉴바 동포를 위하여 농사가 한가한 때에 13, 4명이 모인 가운데 영어 강습소를 개설하였고, 노동이 있는 날에는 야학(夜學)을 하고 노동이 없는 날에는 약학(藥學)을 아울러 가르쳤다.
1916년 7월과 8월에 강영승이 법률 요령을 신한민보에 기고했는데 시카고의 하밀톤 법률대학의 통신교수생으로 소개되었다. 이듬해 본 대학에서 법학사를 취득했을 때 국민회 나성 지방회가 개최한 한인 학생 졸업식 축하회에서 그가 전한 아래의 답사를 통해 그를 좀 더 알 수 있다.
-오늘 저녁에 여러분께옵서 사분의 사랑과 공체의 사랑으로 우리를 위하여 이같이 모여 축하하시니 감사함을 말지 아니하나이다. 여러분이 모인 까닭을 깊이 생각하면 세계사회적 사원의 자격과 동족적 정의와 천국의 동일한 백성된 연유에 벗어나지 않을지라. 그러므로 여러분은 나를 위하여 축하하시고 나도 또한 감히 받는 바이외다. 나의 오늘 졸업은 그 과학에 대한 처음 걸음으로 관념을 가져 더욱 연구코자 하나니 곧 법학의 원리, 인생 생활의 진리라. 이 불평부정한 사회가 공평 정직되기까지 욕망이지만 우리 민족 사회의 공평 정직이 관일치 않으면 소망을 이루지 못할 바 나는 여기에 대하여 더욱 힘쓰려 하노라.
강영승은 1917년 여름에 장리욱과 임 초와 함께 클래몬트 학생양성소에서 문을 연 유년 하기 국어강습소의 교사로 활동했고, 이듬해 1월에는 위의 장소에서 10여 명의 신도학생을 대상으로 영어 강습소를 개교하였다.
강영승이 위의 시카고 법률대학에서 석사에 이어 ‘증거를 세우는 새 규칙’이라는 논문으로 1920년 7월에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의 연설을 그해 8월 중가주 맥스웰에서 듣는다. 그달 8일 저녁에 맥스웰 부근 각 농장의 한인 60여 명이 타운홀에서 그가 한 시간 50분간 연설한 ‘공화민국의 자격’을 듣고 쇠락한 흉금을 헤치고 우리 민국 백성의 절대 필요한 깨달음을 얻었다. 그해 11월 한승곤과 최능익, 김창민, 신영철 그리고 조울림이 발기인이 되어 다뉴바에서 4, 5삭 동안 강영승을 초빙하고 영어속성과를 개교하였다.
강영승은 1921년 3월 상항에서 있은 독립경축회에서 ‘오늘’이라는 주제로 연설했다. 1919년 3월 1일은 인생의 용감을 처음 보인 날이고, 선언서에 서명한 여러분은 위대하고 정당한 우리 독립의 영웅들이며, 오늘은 전사 영웅의 제삿날이고, 이날에 우리는 우리의 직분을 더욱 극진히 할 것이며, 국가 독립은 한인의 독립 자유에 있음을 알고, 권리보다 정의를 먼저 할 것이며, 사람마다 천직을 이행할 것이고, 싸워서 다음날 용감으로 전진할 것을 역설했다. 그해 그는 대한인 국민회 총회장이 된다.
전도사
1928년 9월 3일 오후 2시에 상항 부쉬 스트리트 백인교회당에서 샘 헤이 감독의 사회로 개최한 미국 남감리교 동양인 교회 구역대회에서 황사용과 함께 강영승은 상항 한인감리교회 전도인으로 선임되었다. 본 교회 담임이었던 이대위 목사가 그해 6월 17일 소천함에 따라 황사선 목사는 담임이 되었다. 이해 본 교회의 주소는 옥 스트리트 1053번지였고, 전화번호는 7041번이었다. 10월에는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하던 김상돈을 청하여 약 한 시간 반 동안 ‘방탕하든 자식의 회개와 부활’이라는 제목으로 그의 설교를 듣고 일반 교인들이 많이 감동했다.
11월에 본 교회에서 개최한 계삭회에서 데이비스 목사를 초청하여 ‘사람은 세계를 정복하는 자’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들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자기 비슷하게 만드셨음으로 이 우주 간에 오직 사람이 모든 역경을 정복하고 인류의 문명을 향상하는 동시에 사람의 신령적, 도덕적 발전이 향상되고 사람이 착한 만큼 악하므로 착한 자는 하나님께서 더 착하게 하며 악한 자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를 통하여 구원을 얻는다고 하였다.
이날 본 교회 임원을 선임하였는데 권사에 하상옥과 강천명, 유사에 신경애와 장인환과 강천명, 평신도 인도원에 양주은, 주일학교 교감에 양제헌, 그리고 엡웟 청년회 회장에 하명원이었다. 그해 11월에 상항에 심한 유행성감기가 도는 가운데 이달 22일 신한민보에 추수감사절 경축 광고가 났다.
“1년에 한 번씩 만나는 이 감사절은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 맡음을 느껴 감사한 예배를 드리는 이 날에 우리 일반 교우들은 가득히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하십시다. 순서 중에 아름다운 풍악과 감동할 만한 설교가 있습니다. 시간은 당일(금월 29일) 하오 8시 정각이오니 여러분께서 공수로 오시기 섭섭하시거든 좋은 과일이라도 사서 가지고 오시옵소서.”
본 교회 임원 일동이 위의 광고와 함께 “옷 벗은 동포에게 옷을, 덜덜 떨고 있는 이를 생각”이라는 제하의 글을 통해 함경남도 동포를 위하여 “겉옷이나 속옷이나 어른의 것이나 아이의 것을 무론하고... 오는 12월 10일까지 전으로 도달케 하심을 바라나이다”고 알렸다.
그해 12월에 정남수 목사를 모신 세 번에 걸친 집회를 통하여 교인들의 신앙심이 다시 돈독해졌고, 그가 성탄 축하식에도 초청되어 큰 은혜를 끼쳤다. 그는 한인 종교계에 빌리 썬데이로 미국인 교회에 명성이 자자한 자였다고 한다.
1929년 중가주 리들리 교회의 아동 가극대가 상항을 방문하여 큰 반향을 일으킨 두 달 후인 5월에는 다양한 일들이 있었다. 김춘하의 부인이 귀국하였고, 이순복은 서양 식당을 개업하였고, 낙상 후 비관하여 배를 찔러 이선범이 자살하였고, 이천용과 마애나가 이혼을 하였고, 황사용 목사 사모가 수술하였고, 이응목의 부인 이신환이 사망하였고, 박창순의 부인 박애나의 장례식이 있었다. 그러나 6월과 7월에는 특별 강사를 초빙하여 영적 잔치가 있었다. 6월에는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귀국하는 윤하영 목사를 모셨고, 7월에는 예일대학에서 종교철학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는 김영희 박사를 모셨고, 김 박사는 웹웟 청년회에서도 초대를 받았다.
1929년 9월 17일 오전 9시에 상항 버클리 웹웟 남감리교회당 응접실에서 샘 해이 감독의 주관으로 모인 미국 남감교 연회에서 강영승이 상항 교회의 전도사로 연임되고, 본 교회 담임 황사선 목사도 연임된다. 이날 주일학교 공과는 만국 주일학교 통일 공과를 쓰기로 하고, 국어학교 교과서는 조선어 독본을 쓰기로 가결했다. 이날 보고된 대로 상항 한인교회의 출석 교인은 81명이었다.
10월에 개최한 계삭회는 상항 교회의 임원을 선정했다. 권사에 하상옥과 최우실, 속장에 양제현, 유사에 장인환, 신경애, 황재건, 평신도대표에 양주은 그리고 주일학교 총무에 조웅철이었다. 11월 추수감사절에서는 상항 장로교 신학생 조웅철이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설교를 하였고, 몇 분의 감상담이 있어 감사의 마음이 한층 더 했다. 그해 성탄절에서는 내지 동포 구휼금을 거두어 30달러를 조국으로 보냈다.
1930년 새해 1월에 상항에 다년 거류하던 박승구와 전진주가 고등 재판소에서 걸혼식을 거행하여 한 가정이 탄생했으나 류태경이 환국하고 최웅선은 나성으로 이주하여 섭섭함을 금치 못했다. 이런 가운데 상항 예배당 건축을 위한 재정위원이 조직되어 한인사회에 큰 관심을 이끌었다. 상항뿐만 아니라 오클랜드, 스탁톤, 새크라맨토, 리들리 등에 재정 모집위원을 두었고, 서기에 양제현을, 재무에 백일규를 선임했다.
상항 한인감리교회
2월에는 상항 어린 학생회가 나서서 동회 회장 문덕소 이하 남녀 학생들이 본 월 13일 저녁 한 끼를 단식하고 고국에서 철창 감옥에서 고통을 당하는 학우들에게 동정을 표했다. 그해 3월 남감리교회 지방회 보고에 따르면 상항 한인교회의 재적은 84명이었고 출석은 45명이었고, 5명의 세례 교인이 추가되었고 헌금은 805달러에 달했다. 이날 강영승은 품행을 통과하고 전도사 직책을 계속하게 되고, 양주은이 새로 전도사로 선임되었다.
상항 예배당을 준공하고 6월 1일 하오 2시에 상항 시내에 계신 동포는 물론 부근에 계시는 모두를 초청한 가운데 낙성 예배를 드렸다. 헌금한 총액은 1160달러 25센터였고 7달러 51센터를 남기고 지출했다. 지출 항목에는 예배당 의자, 강대상, 강대의자, 주일학교 의자, 사무실 책상, 난로 카펫, 문밖 방석, 찬미가, 미국기, 성찬기, 연조 기명, 방바닥 칠, 순반비, 인쇄비, 통신 및 문방구비, 잡비 등이 있었다. 7월에는 상항 교회가 한인들의 우체국이 되기를 자청하여 새 예배당 주소를 통신 번지로 하여 다음과 같이 광고했다: “금후 본 교회에 관한 모든 통신은 이하 번지로 하시면 지체없이 신속 배달되겠습니다. 황사선 목사. 메이슨 스트리트 1321번지 샌프란시스코, 캘리포니아.”
강영승은 2년간 전도사로 사역하였다.
강영승은 나성의 할리우드에서 30년간 한방원을 경영하면서 ‘동양의학의 현대적 적용’이라는 영문서적을 발간했다. 그는 1987년에 작고했으니 향년 99세였다. 2016년, 한국 정부는 강영승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이듬해 그의 어머니 황마리아에게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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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