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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교회 1000년 - 어둠에 잠긴 구속역사의 현장 (33)

종교개혁의 불씨  

 

개신교의 역사는 16세기 종교개혁과 함께 시작되었다. 마르틴 루터와 요한 칼빈과 같은 개혁자들은 교회의 역사를 새롭게 기록한 장본인들이다. 그 후 로마가톨릭교회와 개신교는 전혀 다른 길을 걸어왔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겨났을까? 가장 간단하면서 분명한 답은 중세교회는 1000년이란 긴 세월을 지내오면서 개혁이 필요한 상황에 봉착하게 된 것이다. 갑작스런 일이 아니었다. 개혁을 통과하지 않은 채 이상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종교개혁사’가 16세기의 인물과 사건을 다루는 일부터 시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역사적 종교개혁의 시작을 1517년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중세교회 말기에 교회 안에서 개혁을 외쳤던 소수로 개신교의 출발이 가능하였기에 그들이 지녔던 사상이 어떠하였는지 소개하는 일을 중요시 다룬다. 

종교개혁의 불씨가 되었던 대표적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코 영국의 존 위클리프(John Wycliff, 1320-1384)이다. 그의 개혁 사상은 향후 체코의 얀 후스(Jan Hus, 1372-1415)와 틴데일(William Tyndale, 1494-1536)과 같은 개인들과 롤라드파(Lollards)와 같은 복음적인 신앙운동 단체에게 계승되고 실천하기도 하였다. 

위클리프의 개혁적인 사상은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글과 가르침에서 쉽게 발견된다. 종교개혁이 개신교 운동으로 시작되었던 시기보다 약 150년 전에 교회를 향해 당당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14세기 개혁자  

 

위클리프를 종교개혁의 불씨, 종교개혁의 새벽별, 또는 광야의 선지자로 간주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 그러나 그의 사상과 생애를 16세기 종교개혁의 관점에서만 해석하는 것은 그가 끼쳤던 교회사적 공헌을 경시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위클리프는 14세기 영국이 처하였던 독특한 상황 속에서 교회개혁에 대한 열망을 갖게 되었다. 그가 자신의 지녔던 문제에 대한 답을 성경과 어거스틴과 같은 교부들의 글을 통해 얻었지만, 개혁적인 정신을 지내게 하였던 의문점은 그가 처했던 상황 속에서 생겨났던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는 요크셔 지방의 소영주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수월하게 학업에 임할 수 있었다. 특히 그가 옥스퍼드 대학에서 학문적 훈련을 받았는데, 그의 명석함으로 인해 학자로서의 주목을 받아 장학금을 받아 공부하기도 하였다. 1363년 석사학위를, 1372년에는 박사 학위를 받은 뒤 동 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시작하였다. 

위클리프의 개혁적 사상 배경에는 철저한 철학적 훈련으로 무장된 실력이 있었다. 그가 활동하던 당시 유명론과 실재론으로 대조되어 있었으나,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 또는 윌리엄 옥캄(William Occam) 등으로 대표되는 유명론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초기에는 위클리프도 유명론을 따르고 있었지만, 결국 그는 자신의 철학적 견해를 바꾸어 실재론자가 되었다. 

이런 변화의 중심에는 하나님에 대한 그의 신앙적 확신과 고백이 있었다. 그는 유명론자들이 실재에 있어서 오직 개별자만 유일하다고 주장하는 동시에, 보편개념과 일반 개념을 무시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다시 말해서, 위클리프는 모든 존재들은 하나님 존재의 일부이며, 따라서 영원하고 불멸하다고 확신하였던 것이다. 

그 당시 개인 구원과 사죄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보다 교회의 권위를 강조하는 교리가 보편적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위클리프의 실재론은 그의 개혁적 사상 중,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 사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는 이 세상의 모든 실재들과 사건들이 하나님의 예정 안에서 이뤄지는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교황과 사제들의 위치가 절대적인 시기에, 그는 어거스틴의 사상을 따라 교회의 일원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하나님의 예정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 

종교개혁 불씨 위클리프, “모든 존재들은 하나님 존재 일부...따라서 영원불멸 확신”

                   종교개혁자 사이서도 이견 낳은 성찬관으로 축출 당해

 

지배론과 성찬론

 

위클리프가 교수생활을 하던 옥스퍼드 대학은 당시 지적 활동의 중심지였다. 지식인으로서 자유롭게 사고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대학까지 영향력을 끼치며, 자신들의 유익에 위배되는 사상을 적극적으로 제재하는 일을 주저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교황과 교회의 입장에서 위클리프의 사상을 자신들에게 위협적이라고 판단을 내리게 된 동기는 그의 철학적 사고에 기초된 ‘세속 지배론’과 ‘성찬론’ 때문이었다. ‘세속 지배론’은 모두 3권으로 작성된 그의 논문에 잘 드러나 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은 자만 세상의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지배자의 권위와 하나님의 은혜를 같은 맥락에 두었던 그의 지배론은 결코 새로운 사상이 아니었다. 전통적 중세의 원리인 ‘신적 의’를 다시 강조한 것이다. 교황이나 성직자를 불구하고 인간을 지배하는 위치에 있는 자들은, 그들의 권위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목적을 위해 주어졌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즉, 교황이나 세속 왕의 의도에 의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 자리와 권위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실행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나아가서 교황의 수장설과 무오설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위클리프의 사상은 매우 개혁적이었다. 성도들을 섬기도록 권한을 부여한 지배권과 전혀 상관없이 개인의 유익과 부를 축적하는 일에 몰두하였던 교회의 지도자들에 대한 도전이었다. 1377-78년 사이에, 그는 3번 유죄 판결을 받고 교권에 의해 탄압을 받기 시작하였다. 1377년, 종교회의에 출두하도록 소환장을 발부 받았다. 나아가서 교황 그레고리 11세는 켄터베리 대주교, 런던 주교, 영국 국왕, 그리고 옥스퍼드 대학 총장에게 각각 편지를 보내 위클리프 사상을 경계하라고 고하였다. 나아가서 그의 가르침이 퍼지지 않도록 철저히 주의할 것을 명령했다. 

성찬 논쟁은 1380-1382년 사이에 벌어졌다. 그 결과 위클리프는 결국 이단으로 정죄 받았으며, 1382년에는 옥스퍼드에서 축출당하기도 하였다. 1215년에 교황 이노센트 3세가 교권확립을 위해 정통교리로 자리하게 한 화체설(transubstantiation)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였기 때문이다. 성찬관은 16세기 종교개혁자들 사이에서도 이견을 낳은 매우 민감한 사항이다. 

위클리프가 주장한 성찬론은 축성 후에도 빵과 포도주의 실체가 지속된다는 것이었다. 스코투스의 스콜라 철학을 뒷받침한 화체설은 양이 물리적으로 외부의 형태를 보존하는 힘이 되기에 본래의 실체를 유지시키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위클리프는 실체가 없이 외양이 존재할 수 없으며, 화체설은 어거스틴의 전통교리에 미신적 요소를 첨가한 것이라고 일축하였다. 

성찬 논쟁은 철학적 사고의 차이로 출발되었지만 대단히 커다란 논란을 불러왔다. 사제의 축성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만드는 것이 아니며, 저급한 우상숭배를 조장하는 일이라는 그의 주장은 교회 지도자들을 크게 자극하도고 남았다. 

 

개혁을 향한 외침

 

위클리프의 개혁 사상은 그 당시 그가 경험하였던 교회에 대한 신앙적 반응이었다. 14세기 영국은 사회적 과도기를 맞아 큰 변화를 경험하였다. 봉건제도가 소멸되고 중산 계층이 성장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교황 중심의 강력한 중앙집권적 모습을 고집하던 교회의 제도가 자본주의 경제의 힘찬 걸음을 방해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이었다. 

100년 전쟁과 흑사병으로 인해 유럽의 각 국가에 새로운 의식이 심어졌다. 그것은 절대 권력으로부터 독립하고자 하는 열망이었다. 노력하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사고 역시 유럽 전역에 퍼졌다. 동시에 교회를 향한 기대를 저버리기 시작하면서, 그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가 계속되기도 하였다. 영국을 배경으로 일어났던 가장 대표적인 것은 1381년 농민반란이다. 백년전쟁으로 인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인두세를 부과하자, 농민 봉기가 전국적으로 확대된 것이다. 

비록 왕의 군대가 반군을 봉쇄하였지만 아직까지 영국인들 사이에는 절대적인 힘을 대항하는 정신이 깊이 새겨진 역사적인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위클리프는 그가 1780-81년 사이에 작성한 3개의 작품- ‘성직 매매에 관하여’, ‘배교에 관하여’, ‘신성모독에 관하여’-들에 근거하여 농민 봉기의 배후라고 정죄를 받았다.  

위클리프는 옥스퍼드에서 축출을 당한 뒤 사망할 때까지, 레스터셔의 작은 마을에서 안전하게 머물면서 계속적으로 개혁적인 글을 남겼다. 그의 사상이 시민들에게 큰 영향력을 끼친 것이다. 교황도 그를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옥스퍼드 대학 안에서도 다수가 그의 사상을 추종하였다. 

그는 1382년 12월 31일, 미사를 드리는 가운데 뇌일혈로 인해 사망하였다. 그러나 1415년 5월에 개최된 콘스탄스 회의(Council of Constance)에서 그가 작성한 글에 나타난 260개의 전제를 정죄하였다. 1428년 3월, 중세 가톨릭교회는 그의 시체를 파내어 형을 집행하였다. 뼈를 태워 남은 재를 스위프트 강에 뿌렸다. 왜 그리해야만 했을까? 위클리프의 사망한 후에도 개혁에 대한 외침이 그치지 않고 지속되었다는 반증이다.   

covenantcho@yahoo.com

 

05.11.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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