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리파
12월 25일 성탄절을 앞두고 다양한 장식물이 등장한다. 신앙을 지닌 성도들은 무엇보다 아기예수 탄생과 관계된 마구간 전시물에 가장 큰 관심은 가질 것이다.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아, 그 옆에 서 있는 요셉, 그리고 말구유와 몇 마리의 동물들을 전시해 놓은 것을 발견하면 마음이 좋아진다. 물론 그 전시물 자체를 신성시 하거나 경배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절대로 금해야 한다. 단지 언제부터 무슨 이유로 이런 전통이 생겨났는지를 알게 된다면 마구간 전시물을 좀 더 잘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12세기에서 14세기까지 남프랑스와 북이탈리아, 그리고 저지대와 라인란트에서 활동한 이단 종파 중 하나인 카타리파(Cathars)를 소개하려 한다. 카타르라는 헬라어의 뜻은 ”순수함“이다. 이들을 알비파(Albigenses)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 분파의 중심지 중 하나였던 프랑스 남부 도시 알비(Albi)에서 유래하였기 때문이다.
중세 로마가톨릭교회는 초기부터 카타리파를 매우 성가신 대상으로 간주하고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다. 마구간 전시물 자체가 논쟁의 중심에 있던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이해를 도울 수 있는 좋은 사례가 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카타리파는 예수님의 인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이 인간의 육체 자체를 악한 신의 창조물로 여기는 교리를 지녔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단적 가르침이 확산되면서 그리스도 탄생의 지닌 의미가 얼룩지게 되었다. 이로서 마구간 전시물을 만들어 시청각교육을 통하여 성도들로 하여금 예수의 육체적 탄생이 역사적 사실임을 믿도록 하게 한 것이다.
위험한 도전장
중세 로마가톨릭교회는 교회의 전통을 중시하였다. 그들은 초대교회가 출범한 이후 교회를 도전하던 이단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지녔던 만큼 항상 경각심을 늦추지 않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이미 부를 축적하고 절대 권력을 추구하는 교회의 모습과 대조적으로, 가난과 청렴을 추구하는 자들의 모범적인 삶이 대중의 인정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12세기 초반부터 청빈한 삶을 살면서 설교하던 자들의 입술로부터 교회를 향한 쓴 소리가 잦아졌다. 교황과 그를 따르는 지도자들의 탐욕스런 삶에 대한 도전이 이뤄질수록 그들을 향한 존경심이 사라졌으며 그들을 향한 반항심이 생성되었다.
교회는 이단들을 바라볼 때 단순히 신학적 오류를 지닌 자들로 간주할 수 없었다. 도리어 자신들을 향해 무모한 도전장을 던지는 위험한 단체로 규정하였다.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그들의 뿌리를 제거해야 한다는 결론을 짓고 그대로 실행에 옮겼어야 했다. 1209년에 결성되어 1229년까지 활동한 ‘알비 십자군’을 통해 중세 로마가톨릭교회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십자군운동은 서방교회가 성지를 탈환하기 위해 결정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교황 이노센트 3세(Innocent III, 1161–1216)는 카타리파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십자군을 결성하여 이들을 토벌하라는 명령과 함께 출정시켰다. 그 당시 느슨하면서도 그들을 하나로 묶어놓을 만한 조직력을 지녔던 카타리파는 사투를 벌이며 저항하였다. 그러나 십자군은 졸속 종교재판을 통해 수십만 명을 처참하게 살해하였다.
이단의 출현에 대하여 이토록 민감하게 반응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사실 카타리파의 신학사상 안에 성경이 가르치는 기독교의 기본교리를 전면으로 부정하고 도전하는 내용이 다분하였다. 그들의 신학사상이 누룩과 같이 퍼져 물들게 하지 못하려는 시도였다.
카타리파의 이원론
카타리파의 신학사상의 근본은 이원론이다. 그 중심에는 선과 악, 정신과 물질, 영과 육, 천상과 세속 등으로 나누려는 시도가 있었으며, 그 뿌리에는 악한 신과 좋은 신에 대한 이원론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원론은 영지주의로부터 시작하여 초대교회 이후 반복적으로 나타났던 문제였으며 이 시대에도 지속적으로 커다란 골칫거리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두 종류의 신, 즉 악한 신과 좋은 신의 대조는 세상을 바라보는 근본적인 태도에 대한 독특한 관점을 갖게 한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창조된 물질은 모두 악한 것이라고 결론을 짓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들이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선명하게 구분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태복음 7장 17절에 근거하여, 물질세계는 선하신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의 육신과 세속 세계를 만든 것은 천상의 존재였다가 타락한 사탄이다.
결국 카타리파의 이원론은 전통신학의 여러 부분을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들은 창세기에 기록된 창조기록을 인정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구약성경 자체를 거부하였다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구약에 등장하는 신은 악한 신이며, 그를 대변하는 선지자 또는 그 시대에 나타난 기적을 부정하였다. 다시 말해서, 구약을 인간 저자에 의해서 만들어진 거짓 증거라고 규정한 것이다. 이에 반하여 신약은 좋은 신의 주도하는 내용을 담고 있기에 받아드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의 이단성은 결국 구약의 핵심교리인 원죄의 개념에 대하여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에덴동산에서 최초의 인간이 죄를 지은 것은 악마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자유의지를 따랐기 때문이다. 그로 인하여 인간은 원죄를 지니고 태어나는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카타리파는 자신들의 이원론에 근거하여 원죄 자체를 부정한다. 원래 구약시대는 악한 신에게 속하였다는 것이며, 이로서 인간이 자유의지를 지닐 수 있었던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악한 신이 주장하는 상황에서 벌어진 악한 행위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인간에게 돌릴 수 없다는 결론이다.
흥미로운 것은 카타리파가 원죄를 부정하고 육신 자체가 부정하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성관계를 사탄의 작용이라고 이해하였고, 그 결과로 낳은 자식이 이 세상에 탄생한 순간부터 육체에 갇히는 운명에 놓이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성적 금욕을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앞서 언급한 마구간 전시물과 관계하여,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정한 이유도 결국 카타리파의 이원론에 근거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것을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마리아로부터 받은 육체를 악한 것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그들은 초대교회의 유산인 삼위일체 교리를 거부하였다.
카타리파는 자신들의 교리를 엄격하게 지키는 ‘완전한 자’들과 그렇지 못한 ‘일반신자들’로 구분하였다. 완전한 자들이란 정직하며 금욕과 독신, 나아가서 채식주의를 통해 구원을 담당하는 책임을 진 자들이었다. 일반신자들은 완전한 자들에게 기도를 요청할 수 있었다. 이때 손을 얹고 기도하는 것을 콘솔라멘툼(sonsolamentum)이라고 불렀다. 성령의 능력으로 그들에게 ‘위로’를 베푼다는 뜻으로, 견진성사와 버금가는 의식이었다.
카타리파에 대한 대응
카타리파의 이단교리가 확산되었다. 대중이 그들의 교리를 매력적으로 느꼈기 때문이라고만 볼 수 없다. 그 당시 이미 로마가톨릭교회에 대한 반감이 증폭되고 있던 상황에서, 그들의 도전에 박수를 보내는 자들의 수가 증가된 것이다. 또한 카타리파가 이미 교회를 중심으로 중앙집권체제가 굳혀진 곳에서는 심한 도전을 받았으나, 정치세력이 파편화된 지방에서는 쉽게 자리를 잡아갔다.
카타리파는 기본적인 사상을 공유하였지만 크게 온건파와 강경파로 나눌 수 있었다. 또한 그들이 정착한 지방의 형편에 다양한 형태를 지니게 되었는데, 영주들이 반응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아예 그들의 신학 사상에 대하여 관심조차 없던 영주들이 있었는가 하면, 교회로부터 영향을 받아 그들을 억압하려는 자들도 있었다. 그 중에는 아예 카타리파와 우호적인 관계를 지니고 있던 영주들도 제법 있었는데, 이런 지방에서는 가톨릭 사제들과 신학토론을 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기도 하였다. 카타리파의 영향력이 확산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로마가톨릭교회가 침묵할 수 없었다.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는 그들의 신학사상 때문이었다. 창조주에 대한 부정과 함께 구약을 거부하는 행위, 자유의지와 원죄를 부정하는 행위, 그리고 그리스도의 인성과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행위 모두 전통신앙으로부터 벗어난 것이었다. 나아가서 그들의 교리가 종말론을 거부하고 일종의 윤회설을 추구하면서 비성경적인 금욕주의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위험성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마가톨릭교회가 카타리파의 확산을 중단하려고 노력하였던 것은 단순히 신학적인 이유 이상이었다. 그들이 주된 관심은 그 당시 절대적인 권위를 지니고 있던 자신들의 위치를 보존하는 것이었다. 중세교회는 교황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을 통해 하향적인 체제를 구축하여 왔다. 이에 맞서 카타르파의 교리가 악한 물질세계를 초월하여 천상의 신과의 합일을 최고의 선으로 간주하였기에, 교회의 권력과 교회를 통한 구원에 대한 주장을 거부하였다. 어떤 사제라도 타락하면 그 자리를 포기해야 한다는 카타리파의 주장은 그 시대의 상황 속에서 대단한 도전이었음에 분명하다.
나아가서, 카타리파의 주장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도전하는 것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정한다면 7성사 중 성체성사, 물세례, 나아가서 십자가 경배를 거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뿐 아니다. 그들의 수입원을 보장했던 성사와 성인숭배, 그리고 연옥 등에 지대한 영향을 불러온다는 것을 두려워했다. 순수 교리보존을 위한 노력 이외에 작용한 숨은 원인들이 로마가톨릭교회를 매우 잔인하게 만든 것이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카타리파가 그 당시 로마가톨릭교회의 타락을 지적하고 청렴한 삶을 주장한 것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교회를 분리하고 떠난 것은 광적인 자만심과 잘못된 열정 때문이었다고 지적하였다. 여기에 이 시대 교회가 귀를 기울여야 할 귀한 교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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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6.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