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치홍이 그의 부인과 아들과 함께 닙본 마루 편으로 1903년 4월 30일에 하와이의 호놀룰루에 도착했을 때 34세였으니 1869년경에 태어났다고 보면 되겠다. 하와이로 이주할 당시 그의 부인은 29세였고, 그의 아들은 11세였다. 하와이로 이주하기 전 그가 평산에 거주했다는데 평안북도 평산인지 황해도 평산인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그는 1905년에 가족과 함께 미국 남가주 리버사이드 인근으로 이주하였다.
윤문숙과 안경식이 1907년에 찬관사로 3개월 징역에 처했는데 한치홍이 김공제와 함께 150달러를 모아 안경식의 벌금을 대납하고 그를 석방하였고, 벌금을 물어도 윤문숙을 석방할 수 없었다고 하니 이에 신한민보가 한치홍의 의리를 높이 샀다.
한치홍이 1908년에 중가주 핸포드에서 거주하더니 이듬해에는 아이다호주의 아이드리아 수은광에서 일했다. 그가 1915년에 다뉴바에서 자농을 하였는데 당시 11인의 한인 동포가 농사하는 토지는 총 124.5에이커에 해당했다니 대단하다.
맨티카 한인감리교회 전도사
한치홍이 맨티카의 국민회 지방회 부회장이 된 때가 1916년 5월이었으니 그 이전에 맨티카로 이주한 모양이다. 1917년 3월에 미국 남감리교 감독 램버트 목사가 미국 남감리회 북가주 한인 지방연회를 소집하였을 때 한치홍은 맨티카 한인감리교회의 최능익과 함께 2인 대표 중 한 사람이었다. 이날 임정구 전도사가 순회 목사로 맨티카 한인감리교회에 파송되었고, 본 교회 전도사로 최능익을 임명하였다. 그달에 보고한 다뉴바 예배당 건축 결산보고서에는 그가 15달러를 헌금하였다. 이날 헌금 합계는 508달러 70센트였다.
한치홍은 한국학교와 한인사회에 힘을 쏟았다. 한동안 폐교하였던 한흥국어학교를 계속하기로 하고 양주은의 부인 양제현을 교사로 모시고 1918년 3월에 개학식을 할 때 한치홍은 본교 역사를 소개했다. 그해 9월 그가 이 걸의 병원비에 후원하였다.
한치홍은 예배당 건축에도 깊이 관여했다. 그해 8월 그는 맨티카 예배당 건축을 위하여 25불을 헌금하였다. 본 교회 재무였던 김원탁의 보고에 따르면 총 250달러 35센트를 모금하였는데 최고로 많이 헌금한 자는 31달러 85센트를 헌금한 미국 남감리교 감리사인 익톤 목사였고 그 다음이 한치홍이었다.
1918년 10월 10일에 상항 피췻저널의 백인 예배당에서 미국 남감리교 감독 뚜부스 목사의 사회 하에 미국 남감리교회 지방연회가 있었다. 이날 한치홍은 맨티카 한인감리교회의 전도사로 파송 받았고, 최능익은 재신임을 받았다. 그는 최능익과 함께 북가주 순회 목사였던 임정구 전도사가 맨티카를 방문하지 않으면 교회를 목회했다. 당시 임정구 전도사는 오클랜드, 스탁톤, 새크라멘토, 윌로우스 그리고 맨티카를 책임진 순회 목사였다.
최능익 전도사와 함께 한치홍 전도사의 사역 중에는 주일예배 인도 외에도 건축비 부채 상환, 대한여자전도회 활동 협력 그리고 국어학교 협력 등이 있었다. 김경보가 증정한 콜로라도 거리의 땅 위에 1,500달러의 건축비로 1918년 9월 22일에 예배당을 건축하였는데 건축으로 인한 300달러의 상환이 숙제였다. 맨티카 예배당 부채는 비단 맨티카교회 교인뿐만 아니라 인근 한인 동포들도 큰 관심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해 12월에 북가주의 맥스웰과 중가주 다뉴바에서 본 교회 건축을 위하여 헌금한 자가 53명에 이르고 총 85달러가량을 헌금하였다. 북가주 맥스웰은 맨티카에서 서북쪽으로 126마일이나 떨어져 있고, 중가주 다뉴바는 남동쪽으로 140마일이나 떨어져 있는 곳이다.
1919년 3월에 두 번의 모임이 있었다. 그달 1일에 문양목 교장의 취지 설명으로 시작된 국어학교 개학식에서 한치홍은 순서를 맡지 않았다. 그달 27일에 맨티카에서 조직한 대한여자전도회의 제2회 기념식이 있었을 때도 그는 순서를 맡지 않았다.
1919년의 보고에 따르면 출석 교인은 30명이었다. 1918년의 출석 교인이 56명이었던 점으로 보아 한인 동포의 이동이 많았음을 짐작된다. 이해의 총 한인감리교인수는 252명이었다. 이 해에 1,200달러의 건축비로 예배당 겸 사회관을 건축했다. 한인 교인들이 이 건축비를 헌금하였고, 다른 도움을 받지 않았다. 한치홍은 약 1년간 자비량 전도사로 사역하였다.
태프트
한치홍와 그의 가족은 다뉴바와 스탁톤을 거쳐 태프트로 이주했다. 1926년 9월 12일 오후 2시에 스탠다드 오일 회사 클럽 하우스를 빌려서 이곳 한인 남녀 24명이 모여 토마스 D. 맨스필드 박사의 환영회를 개최하였다. 만수필로 알려진 그는 1912년 캐나다 장로교의 파송으로 함경북도 회령에서 활동하다가 세브란스 의과 전문학교 재단 이사로 2년간 봉직하는 등 14년간 한국에서 사역하였고 도미 후 위의 오일 회사에 입사하였다. 그는 한국어도 매우 잘하였다. 이 환영회는 위영민의 사회로 일동이 제5장 찬미를 부르고 한치홍이 기도한 후에 임지성 부인이 애국가 한 곡을 부른 후 맨스필드 박사가 한국말로 귀를 기울여 들을 만한 말씀을 하였는데 일반 청중이 매우 재미있게 들었다. 이후 이병호가 답사한 후 일동이 찬미로 폐회하고 다과회가 이어졌다.
1927년 3월 1일에 있었던 제8회 삼일절 기념행사에서 한치홍은 기도순서를 맡았다. 16인 남녀 동포가 모여 태백중 광야에 가서 오후 1시에 기념식을 거행하고 각 가정이 준비해 온 음식을 차려놓고 점심과 저녁 등 두 때를 배불리 먹고 흥미 있게 놀다가 서천에 걸린 햇빛을 벗하여 각자 자동차로 집으로 돌아왔다.
당일 기념식은 회장 위영민이 개회한 후에 일동이 애국가를 부르고 국기 경례식을 한 다음에 한치홍이 기도를 하였다. 이후 신두식이 취지를 설명하였고, 제2절 애국가를 합창하여 일반의 정신을 새롭게 한 후에 소대도가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이병호의 연설과 송치은의 감상담으로 순서를 마쳤다.
귀국
태프트에 거주하던 한치홍과 그의 부인은 26년간의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1930년 10월 18일에 아사마 마루 선편으로 귀국한다. 그가 61세 때다. 귀국길에는 태프트의 박인선과 딜라노의 한유경과 김관형 그리고 1928년 도미하여 신시내티에서 신학을 공부한 동석기였다. 한치홍 내외는 사랑하는 아들과 며느리와 손자를 미국에 두고 떠나게 되어 이별의 애연한 정리가 특별하였다. 가시는 부모와 송별하는 자식 사이에 뜨거운 눈물은 상항의 푸른 물감을 더하리만큼 쏟아지는데 보는 자가 동정의 눈물을 금할 수 없었다. 그는 아래의 전별담을 기고했다.
-미국서 26년 성상 고락을 같이하다가 이제 서로 작별할 때에 섭섭하고 십분 눈물을 금할 수 없나이다. 이 세상에 작별이라는 것은 참말 무정하고 사정없는 것이올시다. 나의 사랑하는 아들 며느리와 어린 손자 손녀를 미국에 두고 고국을 향할 때 발길이 옮아서지 않고 정신이 아득하고 눈물이 옷깃을 적십디다. 그러나 여러분 형매님께 감사한 말씀을 몇 마디 드리고 떠나려 하나이다.
이 사람이 태프트에서 떠나올 때 먼저 임지성, 최창진, 이병호, 위영민 제씨댁과 또한 홀로 계신 여러분 형님들이 사랑의 전별 만찬을 베풀려 주시매 무한한 감사와 느낌이 있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박춘근 군은 귀한 물품을 30여 원어치 기념물로 주매 고맙게 받았습니다. 태프트라는 정든 곳을 잊을 수 없습니다.
나성에 계신 김원택 형님은 사업의 분주함을 불구하고 위정 태프트까지 오셔서 섭섭히 작별하였고, 김원도 누님은 사랑의 기념 예물을 주십디다. 사랑하는 조카 한영대 박사는 보신하는 약을 수십 원어치 기념으로 선사합디다. 나의 자식 상호는 서양 집에서 공용하기 때문에 시간을 자유롭게 볼 수 없음을 짐작하는 홍순택 씨는 자기 자동차를 태프트까지 타고 와서 우리 부부를 태워 딜라노까지 와서 여러 형제와 작별도 하고 전별 만찬도 감사히 먹었습니다. 하룻밤을 지나 다시 홍 씨의 차를 타고 다뉴바, 리들리 등지를 심방하였습니다. 오충국 씨의 부인 그 누님은 내 아내에게 명주 드레스 한 감을 기념으로 주며, 이치완, 오창곤 두 분 형님댁에서도 많은 사람을 받았습니다.
딜라노 한준상 씨 형님댁에서 풍성한 전별 만찬을 베풀어 주시고 동부인과 따님이 돈 30여 원을 내 아내의 옆 주머니에 슬그머니 넣어준 것을 발견하고 감사하기 마지않습니다. 홍순택씨 자동차로 스탁톤에 와서 내 자식 상호 집에서 쉬고 있을 때 박대일, 김필권, 박양태, 한교준 제씨댁에서 사랑으로 주신 파티는 잊을 수 없고 또한 월넛그로브에 계신 이유일 의사가 내 아내의 이도 고쳐주고 또한 주신 음식을 감사합니다.
상항에 총회장 백일규 씨가 23삭 전부터 나의 일을 성력껏 보아주심을 잊을 수 없나이다. 그리고 문양목, 전득부, 양주은 제씨댁에서 사랑으로 차려 주신 음식을 감사하게 잘 먹었습니다. 새크라멘토를 잠시 심방하였을 때 정동룡, 김신오 양 씨 댁에서와 박중만씨와 성대한 음식을 차려 주심으로 고맙게 잘 먹었습니다.
여러분에게 특별히 부탁할 것은 누구시나 귀국하시려거든 '인컴 택스를 예비해서 상항 와서 백일규씨와 의논하면 모든 것을 잘하여 드리나이다. 여러분의 참고가 될까 하여 이번 우리 일행 중에서 세금 물어준 것을 기록합니다. 나는 내외 가진 사람이로되 27원 50전, 황유경 씨는 136원 몇 전, 박인선 씨는 93원, 김관영 씨는 83원을 물었습니다. 이전보다도 심하게 받아낸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형매님들과 나의 자식들을 미국에 두고 명일 상오 12시에 상항 부두에서 마지막 작별을 할 생각을 하니 눈물이 앞을 가려 붓대가 돌아가지 않습니다. 오직 나의 희망은 본국 가서 장래 예비를 하고 나의 자식 상호의 식구들을 데려갈 생각을 한 즉 스스로 위로가 됩니다. 여러분 미국에 계신 동안 부디 평안히 계시다가 후일 다시 만나기를 바라나이다. 17일 한치홍 올림
damien.soh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