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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해방 전 한인 선교사

67. 최능익(1889-1976)

최능익은 1889년 11월 24일에 평안남도 강서군 성태면 현곡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교회사역에 많은 경력이 있었고 일반 사회에 열심이 많은 인사였다. 1916년 1월 그는 27세의 나이로 조국의 독립과 항일투쟁을 목적으로 도미한다.

 최능익

 

맨티카 한인감리교회 전도사

1917년 3월에 감독 램버트 목사가 북가주 한인 미국남감리교 지방연회를 소집하였을 때 최능익은 한치홍과 함께 맨티카 한인감리교회 대표로 참석하였다. 이날 임정구 전도사가 순회 목사로 맨티카 한인감리교회에 파송되었고, 본 교회 전도사로 최능익을 임명하였다. 

그해 4월 맨티카 노동소는 번창했다. 한인의 경영하는 각 농원은 그동안 약간의 풍재를 받았으나 장래의 희망이 없지 않았다. 김원택의 노동소는 150여 명이 모였는데 그가 온 때 한인이 43명이었고 노동은 5월 그믐까지 계속되었다.

최능익의 사역 중 급선무는 예배당 건축이었다. 이에 건축위원회를 조직하였는데 회계에 김원택과 김필권이었고 수전위원에 최능익이 선출되어 건축비 의연 모금은 위의 세 명이 담당했다. 

김경보가 광이 25척에 장이 100척인 콜로라도 거리의 땅과 식수를 10년간 한정하여 기부했으므로 600달러의 건축비로 100명이 앉을 큰 예배당을 지을 예상으로 300달러가 모금되면 공사를 착수하기로 하였다. 그동안 맨티카에서 총 240달러를 모금하였고 최능익이 그해 12월 16일에 상항 한인 예배당을 방문하여 75달러를 모금하여 총 315달러가 되자 1918년 2월 15일에 흙갈이 식을 거행할 예정이었다. 

최능익이 신병으로 병원에 입원하여 수술을 받은 후 퇴원한 때가 1918년 3월이었는데, 그해 4월에 건축공사가 끝날 것을 예상했다. 그러나 총공사비가 예상 금액의 두 배인 1,200달러가 필요했고, 이 중 900달러가 모금되고 300달러를 채용하여 그해 9월 22일에 예배당 헌당식을 거행했다. 김원택이 보고한 맨티카 예배당 건축을 위한 연조 보고서에 따르면 익톤 목사와 다른 2명의 서양인도 있었다. 

1918년 10월 10일 오후 3시에 감독 뚜부스 목사가 북가주 한인남감리교회 지방연회를 상항 피취저널 예배당에서 소집했다. 이날 최능익은 맨티카 한인감리교회의 전도사로 재신임을 받았고, 한치홍이 새로 본 교회의 전도사로 파송했다. 당시 임정구 전도사는 오클랜드, 스탁톤, 새크라멘토, 윌로우스, 맨티카를 순회 목회를 하였고, 최능익은 한치홍과 함께 그의 지도하에 있었다. 최능익은 한치홍과 함께 북가주 순회 목사였던 임 전도사가 맨티카를 방문하지 않을 때 교회를 목회했다. 

 


맨티카 한인감리교회, 1918년

 

시카고 한인감리교회 전도사

1919년 4월 21일에 국민회 시카고지방회의 신형모 회장이 사면함에 따라 최능익이 회장직을 이었음으로 최능익이 그 이전에 시카고로 이주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시카고에 한인동포가 7, 80명에 달하였는데 영업상 골몰로 인하여 교회를 설립하지 못함을 유감으로 생각하던 중 그곳 재류 동포가 교회를 설립하였다. 

그해 6월 11일 미국 북 감리교 내지 선교 이사회는 한인 개척교회를 인수하기로 하였고, 그해 8월 30일에 미국 북감리교감리회 감리사 태틀 박사가 거당예식을 거행하고 최능익에게 전도를 주장하게 하였다. 많이는 80명까지 모였고 적게는 35명이 모였다. 그는 예배 인도 외에 심방을 하였을 것이다.

최능익이 1919년 10월 3일에 국민회 시카고지방회 회장직을 사면하였고 부회장 강영승이 이었으니 그가 이때까지 전도사직을 이어갔다면 약 4개월의 사역이 되고, 이후 몇 개월 더 교회 사역을 하였을 수도 있다. 

1919년 3월 1일 평안남도 강서군 사천시에서 독립시위운동을 진행할 때 왜적과의 충돌로 독립군 수십 명이 살상되고 순사 3명이 즉살되었다는 후문이 있었는데 강서군은 그의 고향이었다. 그해 10월 4일에 최능익의 동생 최능진이 신한민보에 기고한 한국에서 온 편지를 따르면 삼일운동으로 최능익의 친족은 중역에 처했고 가산은 몰수당했다. 유학생이었던 최능진은 그 후 평양 숭실 전문대의 운동 교수로 가게 된다. 

이런 가운데 최능익은 1920년에 노백린 등이 중국 내 항일독립운동을 후원할 목적으로 북가주 윌로우스에 설립한 비행사양성소에 입소한다. 그해 3월 12일에 신한민보에 아래의 '전술이 필요하오'라는 글을 기고했는데 이 글에서 그가 속죄 구령의 교회 전도사에서 민족독립의 사관학생으로 변신하게 된 동기가 하나님의 뜻임을 알게 된다.

 

“오늘 우리는 찬란한 식장 안에 앉아서 마음대로 기운대로 뛰놀고 기뻐합니다마는 오늘을 당한 우리 내지 동포들은 오직 그 가슴속에 피로써 단장하고 눈물과 죽음으로써 지날 터이외다. 여러분 저 충의단을 보십니까. 죽은 사람, 죽는 사람과 죽을 사람을 위하여 저 충의단이 있는 것을 생각하시오. (박장) 나는 사관 학생 중 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혹 이렇게 생각하실까 합니다. 저 사람들이 태평양 이편에서 군술을 수련하니 위 금지 추에 어찌 적용할까 함입니다. 아니올시다. 여러분이 노백린 각하가 우리 독립전쟁의 선봉장인 줄 아시거든 우리도 제때 죽을 놈들인 줄로 인정하여 주시오. 나는 몇 날 전까지 교회일 보던 자이올시다. 동족의 속죄 구령에 힘을 다하는 일이나 총과 칼을 배우는 일이 다 하나님 뜻에 합당한 줄로 생각하였습니다. 또는 여러분이 충의로써 우리를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마는 우리는 동포의 원조를 믿고 나선 사람이 아니고 우리 손으로 벌어 먹어가면서 우리의 책임을 다하려 합니다. 우리 독립 사업에는 죽는 일이 도리어 쉽습니다. 시간이 망속하여 결론치 못하나이다.”

최능익은 북가주 윌로우스 지방 대학에 입학했고, 1920년 4월에는 윌로우스 지방 대표로 상항에서 개최한 학생총회 결성대회에도 참가하였다. 

 

다뉴바, 나성 그리고 시카고

재정문제로 윌로우스 비행사양성소가 문을 닫음으로 최능익은 중가주 다뉴바로 이주하였는데 1922년에 한국에 있던 아내가 별세하였다는 부음을 받고 큰 고통에 처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주일학교 교장으로 사병순 목사의 다뉴바 한인장로교회를 섬긴다. 주일학교 학생 수는 3, 40명이었고, 송매지가 7세 이하 2세 이상의 유치반의 20여 명의 학생을 가르쳤다.

나성으로 이주한 이듬해인 1924년에 최능익은 한승곤 목사의 주례로 김연실과 약혼하였고 그 이듬해 나성한인감리교회에서 결혼하였다. 약혼주례를 한 한 목사의 나성한인예수교회에서 1927년 5월에 황성택과 함께 그가 본 교회의 웨스트 37가 길 1548번지의 예배당 건물 관리인으로 활동했다. 

출석 교인이 5, 60명에 달해 수백 명이 앉을 수 있는 나성 사우스 버드롱 애비뉴 3573번지로 예배당을 옮기면서 친목회를 계획하고 그가 김혜원 등과 나성한인예수교회 상설 사교위원이 되어 친목회 광고를 냈다. 한 목사가 시카고로 전임하던 그해 12월 그는 교회 유지발전을 위한 12명 위원회와 교회 제반 사무 처리와 발전책 진행을 위한 7인 임원회에서 활동했다.

1928년 7월에 만국주일학교 한국대표들이 나성을 방문했을 때, 연합환영대회 준비회를 조직할 때 나성 한인예수교회의 최능익이 만찬회 위원과 순서제령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런데 그해 8월 나성한인예수교회의 간사직에서 면직되고 김창만이 보임된다.

1931년 1월에 황사용 목사의 나성한인감리교회의 버드롱 예배당에서 미국 남감리교 감리사 데이비스 목사가 소집한 본 교회의 계삭회에서 최능익은 평신도대표로 선임되었고, 그해 10월에 큰 예배당을 빌렸는데 한인사회의 집회 편의를 위한 예배당관리자로 그가 보임되더니 이듬해에는 본 교회 재무를 맡았고, 1932년 9월에는 7인 교회 임원 중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고, 1934년에는 서기로 활동했다.

1934년 5월 최능익은 시카고로 다시 이주한다. 그해 7월에 시카고 한인감리교회의 이사로 선정되었고 그해 10월 이사회 재무가 되었다. 당시 본 교회 목사는 노스웨스턴대학교의 철학박사학위 과정을 공부하던 조승학 전도사였는데 그의 사임으로 최능익은 목사 청빙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937년경 최능익은 다시 나성으로 이주하고 황사용 목사가 시무하던 나성한인감리교회에 출석한다. 그해 나성 삼일국어학교 교사로 자청하였는데 그해 웨스트 36 플레이스 1446번지로 이전한 교회는 그를 권사와 유사와 서기로 임명하였고, 그해 12월 성탄절 축하준비위원으로도 활동했다. 1938년에 그는 15,000달러의 본 교회 예배당 건축 예산위원과 국문 서기로 선정되었고 이듬해에는 권사, 서기, 예배당건축위원 그리고 찬양대 위원이 되었다. 

최능익은 1976년 12월 21일에 향년 87세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국민회, 나성공동회, 중국 피난민후원회,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 조선의용대,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지부 그리고 재미 한족연합위원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면서 독립운동에 관여한 그에게 한국 정부는 1995년에 애국장을 추서했다. 

damien.sohn@gmail.com

 

 

02.23.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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