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는 뜨거운 기도로 널리 알려져 왔다. 그 중에 하나가 기도원을 찾아 기도하는 것이다. 주로 기도원이 위치한 곳이 산이기에, ‘산(山 )기도’라고도 부른다. 특별한 기도제목이 생기면 개인 또는 단체로 산을 찾아서 밤새도록 철야를 한 후, 그 다음날 정상적으로 출근하는 일이 빈번했다. 중병에 걸린 성도들은 아예 기도원 처소에서 상주하며 기도에 전념하기도 하였다. “소나무를 몇 그루 뽑았다”라는 재미있는 말도 이런 상황에서 생긴 것이다. 지금은 어떤가? 소위 말씀을 중시하는 신앙이 소개되면서, 교회에서 뜨거운 기도가 사라져가고 있다. 특정한 교파의 전유물이 되어가고 있다. 현대교회는 개인의 성향을 따라 말씀과 기도의 균형이 깨진 신앙을 수용하고 있다.
질문: 경건한 삶을 위하여 하나님께 간절히 드리는 기도생활의 비중이 얼마나 클까?
1) 교회 역사를 보면...
■ 초대 교부와 수도사
수도사의 신앙과 삶에 대해 관심을 가진 교부들이 있었다. 제롬과 아타나시우스이다. 이들은 초대교회의 신학적 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운 교부들로서, 교회의 전통을 세우는 일에 크게 이바지한 인물들이다. 우리는 그들이 남긴 글을 통하여 초창기 초대교회 수도사의 삶과 수도원의 모습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제롬(Jerome, 347-420)은 4세기에 널리 활동했던 위대한 라틴 저술가이다. 그는 로마에서 최고의 학문을 연마한 수재로서, 히브리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등 후대 교회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 인물이다. 그가 동방을 방문할 기회를 갖게 되었는데, 특히 안디옥 근방에 있는 사막을 방문한 후에 그의 신앙노선이 크게 달라졌다. 광야에서 독거하던 수도사들의 삶을 접하게 된 것이다.
제롬은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위하여 세상의 유혹을 버리고 고독한 곳을 찾은 그들에 대한 지극한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최초의 수도사의 삶을 서술한 “바울의 생애”라는 짧은 작품을 남겼다. 사도 바울이 아닌, 341년에 사망한 수도사를 가리킨다. 또한 제롬은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96-373)가 저술한 “안토니의 생애”를 라틴어로 번역하기도 하였다. 만일 바울이 최초의 수도사라면, 안토니(Anthony, 251-356)는 바울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본격적인 수도사의 전통을 세운 인물이다. 그는 개인적으로 수련을 하던 인물들을 모아 수도원의 기초를 세운 것이다. 나아가서 제롬은 수도생활의 창시자인 파코미우스(Pachomius, 292-348)가 제정한 규율을 라틴어로 번역하였다.
제롬은 당대에 뛰어난 학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는 일을 중요시 한 것이다. 학문성이 뛰어난 것이 신앙의 전부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삶을 드리는 헌신에 대한 갈증을 지녔던 것이다. 당시 수도원의 산실이었던 이집트를 찾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결국 마지막 여생을 베들레헴에 있던 자신의 수도원에서 마쳤다. 제롬은 학문과 경건의 조화, 또는 기도와 말씀의 균형에 대한 가능성과 필요성 후대에 보여준 좋은 예가 되었다.
아타나시우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았다. 동방의 정서에 익숙하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아리우스주의에 대항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학을 정립한 인물이다. 이 과정에서 아리우스주의자들이 정치적 힘을 얻어 아타나시우스를 제거하기 위한 음모가 꾸며졌다. 생명의 위협을 받고 피신해야 하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하였다.
알렉산드리아 주교직을 맡았던 그는, 이미 지역의 교회를 방문하면서 교회 지도자 및 성도들과 두터운 친분관계를 쌓아두었다. 특히 파코미우스를 포함하여 이집트의 수도사들과 가까이 지냈다. 356년 황제의 군대가 예배를 인도하던 아타나시우스를 제거하기 위해 교회를 습격하여 여러 성도들을 죽이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집트 사막에 있는 수도사에게로 장시간 피신하기도 하였다.
수도사들과 수도원에 대하여 호의를 지녔던 아타나시우스는 “안토니의 생애”를 저술하였다. 안토니라는 한 개인의 경건한 삶이 어떠하였는지를 널리 알리려는 그의 의도가 잘 드러나 있다. 안토니는 금욕주의적 신앙을 가진 자이다. 쉬지 않고 기도를 드리는 것을 생명으로 삼았기에 영적전쟁에서 마귀의 다양하고 지속적인 유혹을 물리칠 수 있었다. 그는 매우 경건한 수도사였다.
제롬의 “바울의 생애”와 비교하자면, 아타나시우스의 “안토니의 생애”는 매우 길고 세부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안토니가 기도에 전념하였던 것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그에게 신비한 능력이 있었다는 사실도 거침없이 증거 한다. 그가 귀신들린 사람을 내쫒는 일, 병자를 고친 일, 환상을 본 일 등을 비교적 상세히 기록하였다. 아타나시우스가 안토니를 신비주의적 인물로 표현하는 경향이 있었음을 거부할 수 없다. 이러한 신앙의 성향은 향후 동방종교의 특징 중에 하나로 자리매김을 하게 된다.
■ 개인에서 신앙공동체로
초기에 광야를 찾은 수도사의 삶의 뿌리는 구약성경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광야생활의 통하여 얻은 유익을 얻으려 하였다. 다윗과 같이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광야에서 영적 성장을 하였다는 것을 기억하였다. 나아가서 그들에게는 그리스도께서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시며 하나님과 밀접한 교제를 나눈 것도 좋은 교훈으로 삼았다.
수도사들은 초기에 개인적으로 활동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대략 세 가지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첫째는, 계속 홀로 거주하면서 수도에 전념한 것이었다. 둘째는, 홀로 거주하다가 주일이 되면 함께 모여 공동체로 예배를 드린 후에 다시 자신이 사는 곳으로 돌아가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다. 셋째는, 개인의 삶을 포기하고 함께 모여서 신앙공동체 생활을 하는 것이다.
제롬의 “바울의 생애”는 최초의 수도사 바울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그 시작에 등장하는 인물은 안토니이다. 제롬의 관심은 바울로부터 안토니로 이어지는 수도사의 전통이다. 바울은 그 당시 엘리야와 요한을 닮기 위해 광야로 나간 많은 수도사의 삶을 시작한 인물이라면, 안토니는 이들을 대표할 수 있는 전형적인 수도사이다. 바울이 안토니에게 가르친 경건할 삶의 내용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결국 수도사들의 초점이 기도생활에 있었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광야를 찾았던 수도사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첫 번 모습에서 세 번째 모습으로 변해갔다. 이유는 분명하다. 독처하면서 개인적으로 신앙을 지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식주 문제보다 더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정신적 고독과 싸우는 것이었다. 그들은 함께 모여서 서로 격려하는 삶을 선호하였다. 공동체를 통해서 유익이 많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변하지 않았던 것이 있다. 함께 모여서 살면서도 개인의 경건을 가장 중요시 여겼다는 것이다. 비록 시간이 지나면서 변색되어갔던 것이 사실이지만, 적어도 초창기에는 개인의 경건을 위해 공동체가 최선이라는 결론에 마음을 함께한 수도사들이 모여 수도원이 세워졌다.
파코미우스는 수도사들에게 엄격한 규율을 강요하였다. 많은 수의 수도사들이 같은 공간에서 거주하는 상황 속에서, 타인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 범주에서 수도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인 자신의 경건에 집중할 수 길을 모색한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 그 후부터였다. 공동체가 지닌 성격과 지향하는 목표가 잘못 설정될 때에, 말씀과 기도의 조화가 깨질 수밖에 없는 형편이 되었기 때문이다.
2) 성경이 보인다 - 마태복음 26:36-46, 요한복음 9:31, 갈라디아서 4:6, 디모데전서 4:5
신앙인에게 기도는 생명과도 같다. 기도는 자신의 신앙을 지키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다. 기도는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영적 눈을 지닌 성도에게는 특권으로, 그렇지 않은 성도에게는 짐으로 여겨질 수 있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셨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삶을 한 마디로, ‘기도의 사람’이라는 표현으로 요약할 수 있다. 기도로 공생애를 준비하였고, 기도의 힘으로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훌륭하게 이루셨다. 우리의 기도생활은 결코 그리스도의 기도생활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에게 기도는 경건한 삶의 원동력이었다. 기도 시간에 무엇을 구하고 얻는 사무적인 일과 비교가 되지 않는 소중한 것을 경험할 수 있다. 하나님 아버지와의 영적 교제이다.
기도는 자녀가 아버지를 향해 달려가는 시간이다. 그 분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다. 허심탄회하게 마음을 나누는 시간이다. 아버지에게 나의 현 상태를 알리고, 그 분의 말씀을 듣는 시간이다. 기도가 경건생활의 필수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경건은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로서 가능한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편이다. 기도를 대치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기도의 불이 꺼져있다면 다시 살려야 한다. 하나님을 의식하고 사는 성도들에게, 기도는 견고한 평안의 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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