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순(玄楯)은 1878년 3월 28일 서울 옥인동에 사는 역관 가문에서 태어났다. 1895년 을미사변 이후 의병활동에 가담했던 그는 이듬해 역관 양성을 목적한 육영공원에 입학하여 G. W. 길모어, D. A. 벙커, H. B. 헐버트 등의 미국인 선교사로부터 영어와 기독교를 학습했다. 그런데 1897년 육영학원은 폐교되었다. 그즈음 독립협회 지도자 17명이 구속되는 사건에 그의 아버지 현제창도 연행되었는데 그도 독립협회 회원이었다. 1899년 현 순은 일본 동경에 유학하여 근대학문을 공부하던 중 1901년 친구 심의성의 전도로 침례교 선교사인 C. H. D. 피숴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크리스천이 되었다.
하와이
학비를 마련할 길이 없어 귀국한 현 순은 신문광고를 통해 동서개발회사의 통역으로 취직했다. 그는 장경화 등 본 회사의 한인 직원의 권유로 용동(내리)교회에 등록한다. 1903년 3월 현 순은 두 번째 이민단을 인솔하고 그의 부인 이 칭과 함께 하와이로 이주한다. 그는 오하우섬 가후꾸와 농장과 와이알루아 농장에서 환란상제와 고락동고를 목적한 동회를 조직하고, 야간학교를 세워 영어를 가르쳤다. 그리고 홍치범, 임정수 등과 교회를 개척했다.
감리교는 1905년 조합교회와의 협약을 통해 한인교회는 감리교가 관할키로 한 후 감리사 피어슨 목사의 지도하에 호놀룰루한인감리교회 설립에 현 순이 참여했다. 1906년 제 1회 하와이 연회에서 그는 카와이섬의 ‘리후에’와 ‘하나마루’ 등의 지역 한인교역자로 파송된다. 한편 그는 와이드만 감리사의 지방회 목사 교육반에 등록하고 홍치범 등과 공부했다. 그는 한인 이주자를 돌보고 예배를 인도하며 예배당을 건축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인 지주의 도움으로 자녀들을 위한 학교와 기숙사도 건립했다. 한 달 사례비가 30불이었는데 한인 노동자의 14불에 비하면 많았지만 가족이 달린 그에게는 힘들었는데 워드만 감리사의 보고대로 현 순은 1907년 가정 사정으로 돌연 귀국하게 된다.
서울
평양 대부흥으로 전국 교회가 비약하던 1907년, 현 순은 배재학당에서 총교사로 재직하면서 정동 교회에서 사경회를 인도하기도 하였다. 그는 1908년 집사목사로 안수 받은 후 정동교회 부목사가 되어 최병헌 담임목사를 돕고, 주일학교를 창설했다. 그 해에 하와이 한인 이민생활을 쓴 ‘포화유람기’를 간행한다.
1909년 제 1회 협성신학교를 졸업하면서 현 순은 장로목사가 되었다. 서울 서부지역 전도목사로 임명받아 1911년 경성, 인천, 해주에서의 백만 전도운동에서 많은 심령을 복음으로 인도했다.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가 일본이 날조한 ‘사내 총독 모살 미수사건’(일명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고문을 받는 중 건강 악화로 연회는 1911년 현 순을 상동교회 부목사로 임명했다. 그 해에 강리취집을 출간한다. 정동교회의 최병헌이 인천지방 감리사로 임명되던 1914년, 현 순은 본 교회 제5대 목사로 부임했다. 지력으로 섬겼지만 감동을 받지 않자 영력을 받기 위해 그는 매일 새벽 남산에 올라가 소나무 사이에서 기도하고 저녁에는 예배당에서 기도하기를 3개월이나 계속했고, 그해 11월 1일부터 효천기도회를 시작하면서 정동교회의 오순절 시대를 열었다.
1911년 재한 복음주의선교회공의회 안에 주일학교 위원회가 구성될 때 미국 북감리교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면서 주일학교운동에 관여했다. 이런 인연으로 그는 1915년 미국감리교 조선연회 전국주일학교 총무로 취임한다. 그가 1919년 상해로 망명하기까지 5년간 주일학교운동에 몸을 담으면서, 1916년 안경록 목사의 강릉교회에 주일학교를 조직하면서 불신자 어린이를 위한 주일학교 조직에 힘썼다. 1918년에는 현 순은 장감연합공의회에 미국 북감리교 대표로 참여했다.
현 순은 1919년 초 “칼바위”라는 설교에서 경기도 여주의 칼바위를 견주어 논한 성경의 네 가지 특징은 “성경의 기세는 탁월하여 모든 서적 위에 우뚝 솟아 있고, 성경은 사조의 연마를 받아 그 기세가 더욱 예리하며, 성경이 사조의 급격한 이단을 격퇴하고, 성경은 시대사조에 매이지 않고 인류의 생명을 구원한다”고 한 것이다.
일본의 고문으로 전덕기 목사가 세상을 떠나는데 현 순은 자주독립운동에 눈을 뜬다. 1919년 2월 세브란스 병원 구내의 이갑성의 방에서 그는 감리교 대표 중 한 사람으로 장감 대표 7명과 함께 만세운동을 계획하는 데 참여했다. 이날 유창한 영어실력을 갖춘 그가 각국과의 연락사무를 위해 상해주재원에 임명되는데 이후 송원상으로 통했을 것이다.
상해
현 순은 강원도 전도여행을 떠난다며 1919년 3월 1일 상해로 가서 이광수와 함께 3.1운동 독립선언문을 상해와 미국 언론에 기고하여 외국에 알렸다. 3.1운동 직후 그는 독립임시사무소 총무, 임시의정원 외무차장, 임시정부 외무위원, 임시의정원 외무부위원, 임시정부 내무차장 등을 역임하며 상해 임시정부의 외교 분야를 맡았다. 그리고 이동휘가 이끄는 블라디보스톡의 대한인국민회의를 상해 임시정부로 규합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이라는 그의 혁혁한 공에 비하면 "대한적십자회" 창설은 견줄 바가 아니다.
1920년 미국에서 구미위원부 부장서리였던 그는 임시정부, 미국정부 그리고 한인사회 간의 연락을 담당했다. 1922년 7월 그는 안창호 등의 "시사책진회"에 가담하여 독립운동 세력 규합을 노력했다.
미국
1920년 현 순은 김규식에 이어 구미위원부의 임시위원장이 되었다. 1921년 4월 그가 워싱턴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주미대사관을 설치하면서 정치적 타격을 받은 후 목회로 돌아선다. 1924년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한 그는 이듬해까지 약 2년간 사역했다. 그는 포트 스트리트의 새 예배당에 남학생 기숙사와 취사장, 인쇄실 등 3개의 부속건물을 완성했다. 1924년 교인 수는 130명이었고 주일학교 학생 수는 200명이었으며 교사 수는 12명이었다. 1926년에는 교인수가 164명으로 약간 성장했고, 주일학교 학생 수도 215명으로 약간 성장했는데 교사 수는 1명이 줄었다.
이승만파와 박용만파로 나뉘어 반목하는 와중에서 1926년 현 순은 카우아이섬의 리휘교회와 엘레엘레교회 등에서 오직 선교에 주력했다. 1934년 카우아이에서 목회하던 때의 “물질문명과 종교”라는 그의 설교가 남아있다. 하와이 한인 이민자 중에 정신병자가 많다면서 현대 문명의 비루한 기형적 생활에서 눈을 뜨고, 삶의 인도자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역설했다. 일찍이 관심을 표명한 만주선교에 신경을 쓰면서 1940년까지 15년간 본 교회를 섬겼다.
교회 목회에 전념하면서도 현 순은 1924년에 한인 신문 ‘코리안 크리스챤 애드보케이트’를 김이제 목사와 함께 담당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정 후원을 목적으로 그는 카우아이 섬의 동포들을 규합해 1931년에 "단합회"를 조직할 때 주동했다. 1934년 이후 그는 임시정부의 재원 조달을 위한 하와이 모금운동 책임자로, 1937년에는 하와이 선유위원으로 임명받아 임시정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현 순은 1940년에 목회를 은퇴한 후 1968년 7월 11일에 나성에서 소천했다. 이에 앞서 한국 정부는 1963년 그의 공적을 인정하여 현 순에게 건국공로훈장 국민장을 추서했다. 그의 유해는 1975년에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하여 그의 명예를 세워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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