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인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질문의 폭이 너무 넓고 분명하지 않은 듯하지만, 신앙의 길에 서 있는 자신을 향해 자주 던지는 질문일 것이다. 성경은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방법과 함께, 그 신분을 지닌 후에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들을 가르치고 있다.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말씀을 삶에 적용하면서 자신을 죽이고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을 선택해야 한다. 물론 하나님의 명령과 뜻을 배우고 적용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성경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있지 않은 일에 대하여는 어떤 자세를 취하여야 할까? 성경 전체에 드러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야 한다는 것이 답일 것이다. 문제는, 성경의 진리에 대한 주관적 해석에 따라 실천하는 모습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질문: 각 성도가 자신을 죽이고 십자가를 지고 가는 한계선이 어느 정도일까?
1) 교회 역사를 보면...
■ 갑작스런 변화
313년에 교회가 자유를 얻은 후 한 가지 구체적인 고민거리가 생겼다. 이전에는 핍박과 환란 속에서 숨어 지내고 쫒기며 신앙을 지켰다. 기독교인이라는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 위협적이었던 것은, 그들이 신앙의 절개와 생명의 소중함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환경 속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순교였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무시무시한 일이다. 특정한 종교를 가졌다는 이유로 무참히 살해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순교의 의미란 무엇일까? 종교가 지닌 가치가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하다는 항변의 의미를 담고 있다. 순교자의 피는 초대교회를 살리는 역할을 했다. 세상의 가치와 영적 가치를 적당히 혼합할 수 없는 상황이 도리어 기독교의 순수성을 지켜냈다. 가장 어렵고 험한 환경 속에서도 십자가의 복음을 절대적인 진리로 믿어야 신앙을 지속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대가 되었다. 더 이상 기독교 신앙을 가졌다는 사실을 숨길 필요가 없었다. 기독교인이라는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 사회인의 신분으로 더욱 유리하기도 하였다. 이런 갑작스런 변화는 단순히 정치적인 것만이 아니었다. 기독교 신앙의 자유를 허용한 로마의 콘스탄틴 대제의 의도가 어떤 것이었는가를 추적하고 캐낸 결론이 어떤 것이어도 상관없다. 분명한 것은, 로마의 실권을 장악한 정치인의 결정이 모든 교회들과 성도들에게 엄청난 파장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예상할 수 없었던 갑작스런 변화의 과정 속에서, 신앙의 자유를 얻은 성도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특히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짊어져야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러한 명령에 순종하려면 구체적으로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십자가”를 지고가야 할지에 대해 분명하지 않았다. 이러한 환경이 십자가의 삶에 대한 주관적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 변화된 순교의 색
313년 이후, 초대교회에서 순교할 이유가 사라졌다. 순교는 단순히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증거’를 의미한다. 순교자들은 기독교가 가르치는 복음의 진리가 자신의 생명보다 더욱 귀하다는 사실을 주위 사람들에게 증거 하는 자들로 쓰임을 받았다. 후회 없이 당당하게 죽음을 선택하는 모습은 파워풀한 설교와 버금가는 강력한 힘을 지녔다. 사실 초대교회의 성도들 중에 성도의 순교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아 신앙을 갖게 된 성도들이 적지 않았다.
새로운 시대가 도래된 이후, 순교의 붉은 피를 통한 ‘증거’가 중단되었다. 교부 터툴리안은 “순교자의 피가 교회의 거름”이라고 언급하였다. 그렇다면 자유가 선언된 후에는 무엇이 교회를 기름지게 하여 복음의 씨앗이 잘 자라도록 할 수 있었을까?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발걸음이 더욱 빨라져야 했다. 복음 전도자의 입술과 발을 재촉하였다.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내적 외적 어려움을 이겨가는 것을 곧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의 한 부분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자유로운 환경 속에서 스스로 편안한 삶을 포기하고 금식과 고행 등으로 극심한 방법으로 자신을 절제하는 삶의 모습을 동경하고 추구하는 성도들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교부 제롬은 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순교를 ‘흰색 순교’라고 칭하였다. 죽음의 피를 상징하는 ‘붉은 색 순교’와 대조되는 개념으로,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뜻에 자아를 철저히 죽임으로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신앙의 ‘증거’를 지니게 된다는 것을 가리킨다.
나아가서 ‘흰색 순교’와 유사하지만 특정한 내용을 지시하는 ‘녹색 순교’의 개념을 중시하기도 하였다. ‘녹색 순교’는 자신의 모든 소유를 버리고 들판과 산과 같이 낯설고 힘든 환경에서 거주하는 형태를 말한다. 이는 세속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상태에서 내면의 세계의 영적 유혹을 이기고 하나님과 영적 교제를 꾀하려는 자들이 선택한 신앙의 길이다. 종교의 자유가 주어진 후 신앙의 형태가 변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비록 소수이지만 ‘흰색 순교’와 ‘녹색 순교’를 추구하던 자들은 자신들의 새로운 형태의 경건이 ‘붉은 순교’를 대신하는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교회와 신앙인은 ‘세상 안에서 세상을 위해 존재’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성경적 가르침의 기준에서 이들을 평가해 보자. 분명 그들은 성도들이 반드시 추구해야하는 ‘거룩한 삶’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하였다.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삶을 몸소 실천한 것이다. 그들의 눈에는 교회에게 주어진 ‘신앙의 자유’에 대해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았다.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환경에서 ‘자유로운 신앙’을 추구하는 모습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흰색 순교’와 ‘녹색 순교’의 형태는 개인의 경건에 큰 유익을 주었음에 틀림이 없지만, 동시에 사회 또는 신앙 공동체로부터 자신을 결별시킴으로서 ‘세상 안에서 세상을 위해 존재’한다는 교회와 신앙인의 기본적인 존재 목적으로부터 멀어지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 청년 안토니
‘백색 순교’ 또는 ‘녹색 순교’의 대표적인 인물을 소개하자. 애굽의 안토니(Anthony, 251-356)라는 청년이다. 그는 엄청난 부를 지녔던 부모 슬하에서 태어나 귀하게 성장하였는데, 그가 20세가 된 해에 모두 사망하였다. 평생 남다른 안락한 삶을 살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던 그였지만, 그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중대한 신앙적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소유를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로 하였다. 그의 마음을 떠나지 않았던 말씀에 진적으로 순종한 것이다. 어떤 내용이었을까? 네가 이 세상에서 완전하기를 원한다면 현재 지니고 있는 모든 것을 없애고 그 어느 것도 소유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과거나 현재나 상관없이 스스로 무소유를 결정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결단한대로 실천에 옮겼다. 그는 소유와 함께 세상을 등졌다. 자신이 살던 고향을 떠나 정처 없는 삶을 시작하였다. 각 마을의 근처의 황량한 곳을 찾았는데, 심지어 무덤을 주거지로 삼기도 하였다.
시기적으로 보았을 때, 안토니는 313년 종교의 자유가 주어지기 전부터 경건을 위해 노력하는 삶을 시작하였다. 청년 안토니는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삶을 실천하는 방편으로, 편안한 삶을 거부하고 힘들고 어려운 삶을 찾아 나선 것이다. 놀라운 것은, 그 당시 그와 유사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깨달은 경건한 삶과 하나님에 대한 경험을 서로 나누었다.
종교의 자유가 주어진 이후, 안토니의 관심과 영향력이 달라지지 시작했다. 그는 동부 사막의 한 산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아주 작은 규모이지만, 수도원이 시작된 것이다. 이곳에서 그는 이곳을 방문하는 진지한 신앙인들에게 자신이 경험한 다양한 영적 체험을 나누기 시작하였다. 청년 안토니의 삶을 비교적 자세히 기록한 책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안토니의 생애”는 교부 아타나시우스의 저작으로 알려졌다. 청년 안토니는 100세를 넘게 살았다. 자기 부인과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주관적인 해석은 향후 교회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긍정적이며 부정적인-을 주었다.
2) 성경이 보인다 - 마태복음 16:24; 마가복음 8:24; 누가복음 9:23
예수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그의 제자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를 따르는 자이다. 예수가 걸어가신 길이 곧 나의 길이 되는 것이다.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가신 것으로 그의 삶을 요약할 수 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그렇기에 나를 부인하는 일과 십자가를 지는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바로 이해하여야 한다. 성도는 자신을 부정한기 위하여 나의 영광을 추구하려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을 버려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감동을 따라야한다. 자신의 생각과 평안한 삶을 포기하여야 한다. 이 명령을 실천하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주께서 힘주시기를 원한다. 십자가를 지는 일도 마찬가지다.
예수는 말씀에 순종하고 자신을 부인하는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결국 그는 죽음의 길을 선택하였다. 우리도 주님의 길을 선택하고 따라가려면, 죽음 또는 생명의 위협을 감수해야 한다. 교회의 영적 거름이 되었던 순교자들의 피와, 순교자의 각오로 십자가를 지고 믿음의 길을 걸었던 선배들의 모습을 기억하자. 단지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일이, 성도 자신의 경건은 물론 ‘세상 안에서 세상을 위해 존재’하는 사명에 이바지 하는 것인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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