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팍스뉴스‘(Fox News)는 보수주의 진영의 대변인으로, 진보주의 비판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반면에 뉴욕타임스(The New York Times)는 진보주의 성향으로 오피니언 리더로서의 역할을 감당한다.
그런데 뉴욕타임스가 이례적으로 선데이 리뷰 ‘스토리 펀딩’에 니콜라스 크리스토프(Nicholas Kristof)의 칼럼을 실어, 독자들로부터 큰 반향을 일으켰다. 뉴욕타임스는 주로 ‘보수주의자들이 원래 생각이 틀려먹어서 그런 것’이라는 식의 반대가 대부분이었는데, 크리스토프는 이에 두 번의 칼럼들을 통해 진보주의자들이 자신의 오만함과 편협함부터 먼저 돌아봐야 한다고 꼬집었기 때문이다.
크리스토프는 2001년부터 뉴욕타임스에서 글을 써왔고, 지금까지 2번이나 언론인에게 최고의 영예인 퓰리처상을 받았다. 따라서 경쟁 신문사인 워싱턴포스트에서 인권 남용이나 사회적 부정의에 관해서는 “정론”을 쓸 수 있는 기자라는 칭찬까지 받을 정도로, 뉴욕타임스의 얼굴이나 다름없는 언론인이다. 그래서 그는 진보주의자이기에, 감히 진보주의자들의 편협함과 동시에 보지 못하는 사각지대가 있다고, 미 학계, 정치계 그리고 언론계에 팽배한 진보주의자들의 아킬레스건을 통렬하게 지적한다(The Liberal Blind Spot). 크리스토프의 글을 정리 게재한다.
몇 주 전 쓴 칼럼에서 나는 “진보의 편협함을 자백”했다(A Confession of Liberal Intolerance). 대학이란 곳은 모든 종류의 의견, 다양성이 존중받아야 하는 곳이라고 말하면서 정작 이념적인 문제에서만큼은 보수주의 가치를 절대 용납하지 않으려는 나의 동료 진보주의자들을 비판했다. 나는 대학이라는 공간이 진보적인 의견만 메아리치는 닫힌 공간이자 보수주의자, 특히 복음주의 기독교도에게 적대적인 닫힌 공간으로 굳어질 위험에 처했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우리와 다르게 생긴 사람도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러나 단, 그 사람의 생각이 우리와 같다는 전제 아래서만 그렇다. 내가 보기에는 정말 위선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칼럼에 대한 반응이 한결같기도 참 쉽지 않은 일인데, 이번 칼럼에 대한 대부분 진보주의자의 반응은 거의 일치했다. 내가 완전히 헛 다리를 짚었다는 것이었다.
“다양성이 좋다고 멍청한 사람들 의견까지 받아들일 건 없잖아요.”
뉴욕타임스 웹사이트에서 가장 많은 독자의 추천을 받은 댓글이다. 또 다른 인기 댓글을 보면 “편협한 생각에 사로잡혀 늘 자기가 정답을 알고 있다고 믿는 건 (오히려) 보수주의자”라는 내용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보수주의자들이 특히 사회과학 분야에서 증오와 편견을 설파하고 다니는 게 문제가 아니라, 반대로 진보주의자들이 각 학문 분과를 장악해 이념적으로 균일한 학문 공동체를 구축하고 있는 게 더 큰 문제다.
보수주의적 도그마에 빠진 멍청이는 어디든 있을 수 있다. 반대로 자유주의, 진보적 가치를 맹신해서 대화를 나누기조차 어려울 만큼 꽉 막힌 사람도 찾으려면 얼마든지 있다. 정치적인 혹은 신앙의 잣대로 판단하기 전에 그런 독단적인 멍청이들은 여기서는 논외로 하겠다.
자, 그럼 대학의 진보주의를 이끄는 진보주의자들을 살펴보자. 졸업식 등 대학교 행사에 초청할 연사를 고를 때마다 조금이라도 보수적인 인사가 선정되면 즉각 반대 시위가 열리곤 한다. 이제는 반대하는 범위가 점점 확장돼, 미국 역사상 첫 여성 국무부 장관을 지낸 민주당원 매들린 올브라이트마저 반대 시위의 대상이 됐다.
보수주의자들 앞에 놓인 난관은 당연히 수 세기 전부터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차별에 맞서야 하는 흑인들의 어려움과 절대 같을 수 없다. 나는 종종 무의식중에 내재한 우리의 편견을 지적한 뒤 그것이 편견이라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는 백인들의 문제를 지적하곤 했다. 하지만 진보주의자들은 스스로 포용과 통합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긴다고 늘 말한다. 그런데 왜 이런 진보적인 가치가 대세를 이루는 대학교와 학계는 진정한 포용의 장이 되지 못하는 것일까? 다른 분야의 편견은 그렇게 날카롭게 지적하면서 우리 진보주의자들이 보지 못하는 사각지대에 대해서는 왜 말이 없는 것일까?
솔직히 말해서 보수주의자들의 편협함에 대한 경멸조의 지적이 쏟아지는 것을 보고, 나는 다시 한 번 우리 진보주의자들 또한 심각한 편협함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생각을 굳혔다.
대학이 왜 여성이나 흑인을 포용하는 것처럼 보수주의자들도 끌어안아야 할까? 그 이유는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우선 고정관념과 차별은 그 자체로 잘못된 것이다. 동성애자든 무슬림이든 보수주의자든 복음주의 기독교도든 그건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다. 어떤 차별은 극심한 편견이라 비난받아 마땅하고, 다른 차별은 반대로 진실을 모르는 이들을 깨우쳐주는 시대적 소명이자 계몽이라고 포장할 수 없는 일이다.
학계에 몸담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절반 이상이 어떤 구직자가 복음주의 기독교도라는 사실을 알면, 그 사람을 가능하면 뽑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내 생각에는 이런 태도야말로 극심한 편견 같다.
둘째, 다양성이 가져오는 혜택이 수없이 많다는 건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소수 집단 출신의 누군가로 조직을 꾸리는 것은 그 사람이 불쌍해서 벌이는 자선 활동이 아니다. 다양성이 확보된 조직이 훨씬 건강하고 유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학은 어느덧 지나치게 균일한 집단이 됐다. 네 가지 다른 연구 결과를 종합해보면, 특히 인문과학과 사회과학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교수 가운데 공화당원은 10%도 되지 않는다.
나는 무슬림이나 난민들에 대한 근거 없는 두려움을 조장하고 다니는 보수주의자들을 여러 차례 맹렬히 비난했다. 그런데 복음주의 기독교도에 대한 진보주의자들의 적대감도 그 논리적 뿌리가 비슷한 것 같다. 무슬림 중에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미국인들 사이에서 특히 무슬림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두드러진다는 조사 결과가 있다. 복음주의 기독교도를 바라보는 진보주의자들의 시각도 비슷할지 모른다. 주변에 복음주의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으니 자연스레 이를 두려워하고 무시하게 된 것 아닐까?
다양성을 강화하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결국 다양성은 조직을 튼튼하게 하고 의사결정 절차도 개선된다. 이념의 다양성도 인종의 다양성만큼이나 우리가 목표로 삼아야 할 가치다.
마지막으로, 학자들의 이념 성향이 왼쪽 끝자락에 지나치게 편중되면 학자들은 스스로 목소리를 잘 내지 않으려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지금 미국 사회에는 빈곤과 관련한 공공 정책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회학자나 인류학자가 절실히 필요하다. 그런데 현실 세계와 소통하고 교류해야 할 상아탑이 급진적인 생각으로 가득하면 결국 학문적인 통찰력은 정책에 반영되기 어렵다.
반대로 경제학자들은 꾸준히 공공 정책이나 사회 전반에 영향력을 미친다. 나는 공화당을 지지하는 보수 성향의 경제학자들이 학계에서 활약하며, 민주당을 지지하는 진보 성향의 경제학자들과 필요하면 치열한 논쟁을 벌이고, 전체적으로 균형을 잡아준 덕분에 경제학이 미국 사회과학의 주류 학문으로 남을 수 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문제와 관련해 많은 학자와 진솔한 대화를 나눴다. 보수적인 사회과학자를 뽑고 싶어도 뽑을 만한 사람이 없다는 말을 여러 차례 들었다. 맞는 말이다. 일종의 자기 선택이 일어났을 수도 있다. 내 성향이 보수적이라면, 학계에서는 살아남기 힘들다는 것을 미리 알았을 테니 아예 학계에 보수주의자들이 드물어진 것이다.
다양성을 늘리고자 대학들은 소수 인종이나 소수 집단 출신의 학자를 길러내는 데 힘을 기울였다. 다양한 인종에 열려있는 공간이라는 메시지를 꾸준히 던지기도 했다. 이념적 다양성을 확보하는 첫걸음도 비슷한 메시지를 보내는 데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보수주의자라고 대학교 안에서 2등 시민 취급을 받지 않는다는 걸 적극적으로 알리는 것이다.
대학교의 이념이 하나로 수렴해버린 문제를 하루아침에 고칠 수는 없다. 하지만 최소한 하나의 가치만 살아남은 지금 대학의 모습을 자축하기 전에, 오히려 다양성이 배제된 대학교가 문제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할 때 아닐까?
보수주의자들은 거만하고 편협해서 고등 교육을 받을 자격도 없는 놈들이라고 깔보기 전에 우리 자신을 먼저 돌아보는 건 어떨까?
거만하다고? 편협하다고? 먼저 거울 속에 비친 우리 자신의 모습부터 찬찬히 살펴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