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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방화중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 전신인 미슌에서 6년간 조사로 시무

방화중은 1876년경 황해도 안악에서 방기창의 아들로 태어났다. 때는 1851년 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난 아버지 방기창이 황해도 어로면 유사, 천도교 황해도 접주 및 오읍 도령장이었을 때다. 아버지가 1893년 기독교인이 되면서 온 가족이 사무엘 마펫의 평양 널다리골 교회에 출석했다. 방화중이 17세 때의 일이다.

아버지가 1898년 장로로 선임되고 1901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는 모습을 보면서 방화중이 자랐음으로 그가 한국에서 교회를 인도한 경험이 있다는 소문이 사실 같다. 그는 1902년 12월 하와이 최초 이민선에 몸을 실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가주 사역

하와이 농장의 한인들 중 몇몇은 1905년 이후 대북 철도회사와 북태평양 철도회사에 힘입어 미국 본토로 이주했다. 이로써 가주의 상항과 나성에 한인들이 거주하게 된다. 방화중도 이 중의 한 사람이었다. 1904년 9월 도산 안창호 등 9명의 한인 동포가 친목회를 조직한 후 이중 몇몇 기독교 신자들이 따로 예배를 드렸을 때 방화중도 동참했다.

그는 문경호와 함께 전도회를 조직하여 예배를 인도하고 전도도 하였다. 이듬해 6월 상항에 도착한 차의석은 방화중이 설교하는 예배에 참석했다. 주일 오후 한인 황 씨의 여관 거실에서 몇몇 인삼 상인과 미국인 집에서 일하며 공부하는 유학생들이 출석했다. 그런데 모두 일어나 폐회 찬송을 부를 때 주먹만한 돌이 폭탄처럼 날아와 혼비백산했다고 차의석은 회고한다.

미국 감리교 존슨 목사가 1905년 7월 상항에서 한인 미슌 홈을 설치할 때 내한 선교사 존스 목사의 추천으로 방화중이 미션 홈을 담임하였다. 그 후 미슌 홈이 미국 남감리교단에 가입하고 양주삼 전도사가 1906년 11월부터 시무하게 된다.

평양 신학교 교장 마펫 목사는 1906년 안식년을 맞아 나성을 찾았는데 인근 한인들을 심방하고 권면할 사람이 없음을 안타까워하던 중 방화중을 만나게 된다. 마펫 선교사는 미국 북장로교 나성 노회와 교섭하여 나성 한인장로교 미슌(기도처)을 설립하였다.

본 창립예배가 그 해 5월 10일 벙커힐 2층 사가 건물에서 A.B. 프리차드 목사의 사회로 18명이 모여 방화중 전도사의 설교로 진행되었다. 그는 나성 인근의 한인 거주지마다 방문하고 전도하였고, 1907년 3월에는 마펫 선교사와 함께 남가주 각처에 있는 한인 노동자를 심방하였다. 그런데 그 해 6월 미국 장로교회가 한인을 위한 미슌을 새로 설립하였는데 이때 방화중은 조사로 임명되어 약 6년간 시무했다. 본 교회는 2016년 현재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가 되었다.

나성 인근 엎랜드에서 김종혁, 장문섭, 김종길, 장문호 등이 예배당을 마련하고 엎랜드 한인 장로교 미슌이 조직되던 1907년 3월 5일, 방화중은 전도사로 청함을 받았다. 본 미슌은 한인들의 노동의 형편에 따라 이주하는 까닭에 1918년 1월에 폐지되었다.

방화중은 1907년 7월 13일에 양주삼, 이교담, 장라득 그리고 오대영 등 각 교단 대표자들과 함께 한인연합교보를 발간하였는데 한인 교우의 연합 상통과 신덕 배양을 목적하고 상항한인감리교 미슌 홈에 임시사무실을 두었다. 방화중은 황사용과 함께 1909년 5월 12일에 300명 교인을 묶어 감리교회를 세웠는데 상항한인교회 청년회가 헌금한 65달러가 큰 역할을 하였다.

방화중은 사회 사역에도 관심이 컸다. 1903년 상항 친목회가 조직되었을 때 회장 도산 안창호를 돕는 회계 및 학무를 겸임하였다. 1905년 4월 본 친목회가 공립협회로 변신하면서 방화중은 그 해 11월에 상항에서 공립신보가 발간될 때 임치성 등과 함께 편집인이자 식자인으로 3년 2개월간 활동했다.

1907년 방화중은 도덕심 배양에 유익한 도서를 본국서 구입하여 필요한대로 전파하였고, 익년 방화중은 양주삼 등과 함께 국내의 좋지 않은 상황에 따라 각 지역에 한인자치제를 결성토록 주선하였다. 그 해 3월 나성에서 한인 동포가 외국인에게 토지를 파는 악폐를 금하고저 방화중이 주동이 되어 권업주식회사를 발기하였다.

1908년 8월 나성 인근 클래몬트에 설립된 클래몬트 학생양성소는 방화중의 노력이 크다. 그는 학교장이었다. 인근 소학, 중학, 대학 등 공립학교에서 공부한 후 저녁에는 국어, 한문, 체육, 음악 등을 가르쳤고, 주당 3일 저녁에 군사훈련을 하여 상무주의 정신을 길렀으며 상호 토론과 문답을 통해 덕성을 기르고 지식을 습득하였다. 1914년에는 기숙학생 17명과 등교학생 22명 등 총 39명의 한인학생이 등록했다.

미국 상항의 대한인국민회는 1천여 명의 멕시코 유카탄의 한인 노동자들 권익 보호와 구호활동을 목적으로 견묵위원으로 방화중과 함께 황사용을 파견했다. 그들은 1909년 5월 9일에 313명의 창립회원으로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를 설립하였다. 1909년부터 미주 한인사회 통합에 뜻을 둔 방화중은 국민회에서 임원을 맡아 활동했고, 그 해 2월 신한민보가 창간될 때 노력을 많이 했으며, 1911년에는 평북 선천 대동고아원의 외교주무원으로 선정되어 서양인 교회의 후원을 추진했다.

하와이 사역

1912년 2월 초 방화중은 부친 방기창 목사의 서거 소식에 귀국하였다가 1년 후 다시 도미하여 나성에서 평신도로서 교회에 출석하였다. 1918년 3월 방화중은 하와이감리교회 목사로 부임한다. 이듬해 그는 미주 한인학생원동선교회 하와이 지방위원을 역임하였다. 본 회는 만주에 본국 장감연합회가 선교사를 파송케 하고 그해 2월에 1백 달러를 우송했다. 방화중은 하와이에 부임하던 그해 중앙학원 교장을 역임했다. 그해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한국독립 쟁취를 위해 파리평화회의 대표 파견 문제를 협의할 때 방화중도 머리를 맞댔다.

나성 사역

방화중은 나성으로 재 이주한다. 1924년 10월 나성한인장로교 미슌의 몇몇 교인들이 자유교회를 설립할 때 방화중은 홍치범과 조성환 등과 함께 장로교 미슌의 재건을 꾀했다. 1928년 7월 11일부터 18일까지 나성에서 개최한 만국주일학교 대회에 참석한 한국 대표를 위한 환영회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나성의 남녀 동포 3백 명이 1925년 조국 동포의 기근 참상을 듣고 임시 조국 동포구제회를 조직할 때 방화중은 서기로 활동했다. 본 구제회는 그 해 2월 17일에 경성 조선 기근구제회 회장 이상재에게 미화 500달러를 우송했다. 1925년 6월 28일 나성 한인 졸업생 축하회에서 방화중은 “신진에게 대한 감상”이라는 간단한 축사를 담당했다. 1927년 나성에서 흥업저금회가 조직되었는데 방화중 등 12인이 장차 흥업에 종사하려는 목적을 두었다.

잡화상, 광고 사업, ‘새서울’ 여관 등을 경영하던 방화중은 1940년 12월 11일 카운티팜 병원에서 노환으로 소천했다. 향년 64세였다. 2014년 11월 17일 순국선열의 날에 방화중은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damien.soh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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