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총해 박사 (문학인)
진태는 병원복도에서 간호사를 만나 물어보았다. “현수 엄마가 언제 왔지요?” “점심시간에 다녀가셨습니다.” “현수가 얼마나 좋아하던가요?” 간호사는 진태의 질문이 좀 이상하게 들렸는지 주춤하고 잠깐 진태를 의아스럽게 쳐다보더니 소상하게 이야기했다.
“엄마는 현수를 보자 부둥켜안고 울었어요. 현수도 좋아서 엄마를 껴안고 큰소리로 울더군요. 모자가 얼마나 감격했으면 그렇게 포옹하면서 울지요? 나는 그들 모자가 반가워서 우는지, 슬퍼서 우는 지 영문을 몰라 그저 어리둥절했답니다.” “얼마나 오래 현수 옆에 있다 갔나요?” “병원 점심을 먹고 있는 도중에 왔는데, 엄마가 먹을 것을 또 잔뜩 가져왔어요. 아들이 점심을 다 먹어치울 때까지 식탁 옆에 바싹 붙어 앉아 가져온 음식을 일일이 다 챙겨 먹이더군요. 다 큰 아들을 마치 아기처럼요. 모자가 한참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엄마는 나더러 자기 딸 아이가 곧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이라면서 자리를 떴습니다.”
진태가 예상한 대로 현수는 자기 엄마의 문병을 받은 후 정신상태가 급속히 호전되어 이틀 뒤에 감금되어 있던 정신병동에서 풀려나와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진태는 현수가 앓고 있는 정신병에 관한한, 그 원인이 무엇인지는 누구보다도 자기가 제일 잘 알았다. 이혼 후 엄마가 데리고 간 딸은 아무 일이 없는데, 아버지가 돌보는 아들은 마음에 큰 상처를 받고 그때부터 기가 죽어 밖에 나가 놀지도 않고 마냥 집안에서만 서성거렸다.
진태가 이혼을 하고 또 하나 뼈저리게 느끼게 된 것은, 성인 자식들은 몰라도 어린 자녀들은 부정보다도 피부를 맞대고 가슴에 품고 길러준 모정에 더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동안 엄마와 떨어져 마음이 깨져 있다가 그토록 아쉬워하던 엄마가 병원에 찾아와 얼싸안아주니까 아들의 가슴앓이가 잠정적이나마 치유가 되었다는 사실을 진태는 알았다. 현수는 아버지 슬하에서 자라면서 무엇인가 채워지지 않는 불만, 즉 어머니의 사랑에 굶주려 있었다. 그 때문에 우울증에 빠져 거동이 늘 무기력하고 얼굴에는 언제나 수심이 가득할 수밖에 없었다.
진태는 현수의 우울증을 처음 목격했을 때는 아이의 선천적 성격의 결함으로만 알고, 그의 우울증 치유를 전적으로 약물에만 의존하려 했다. 진태는 이제야 아들의 정신적 상처는 화학반응에만 의존하는 약물치료만으로는 근본적 치료가 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현수에게 부모가 갈라지기 이전의 그런 평화로운 가정환경을 되돌려 주지 못하면 아들의 건강회복은 전혀 가망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진태는 이혼한 아내와 재결합한다는 것은 이미 강 건너간 문제처럼 도저히 불가능한 현실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럼,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을 한탄한들 무슨 소용이랴! 그렇다고 이제 와서 이민생활을 거두고 고국으로 돌아간다? 전당포나 은행에 잡혀 있는 저당물은 돈을 지불하면 되돌려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벌써 다른 남자의 품에 넘어간 아내를 무엇을 주고 다시 찾아오랴? 망가진 내 인생을 제발 좀 물려달라고 호소하고 싶지만, 도대체 누구에게 가서 그런 호소를 한담? 진태의 심정은 그저 착잡하고 암담할 뿐이었다. 현수가 병원에서 퇴원하고 집에 돌아온 날 밤이었다. 아들은 일찌감치 침실에 전깃불을 끄고 벌써 잠이 든 모양이었다. 진태는 간신히 소강상태를 되찾은 아들이 또 우울증에 시달리면 어떡할 까 염려가 되어 자정이 넘도록 잠이 오질 않았다.
진태는 침대 위에서 잠을 이뤄보려고 이리저기 몸을 뒤척거려 보았으나, 아버지가 자식에게 피해를 주었다는 죄책감이 더 날카로워질 뿐이었다. 꺼 버린 전등불을 다시 켜고 현수의 질환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기 위해 며칠 전에 구입한 우울증에 관한 책을 다시 읽으려고 책장을 펴 보았다. 그러나 책장의 한 줄을 읽기도 전에 자꾸 이런 일 저런 일이 생각나 도저히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었다.
책을 접어 등잔 밑에 놓고 진태는 멀거니 뜬눈으로 멀뚱멀뚱 천정을 쳐다보았다. 문득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떠올랐다. 언제나 자기 일신보다도 아들의 건강을 더 염려하고 아들에게 무엇을 먹이지 못해 늘 안절부절못하던 어머니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고 자식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탄식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진태 어머니는 팔자 사납게도 평생을 과부로 살았다. 그러니까 외동아들인 진태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 없이 자랐다. 진태가 나이 들어 들은 이야기지만 어머니는 젊을 때 어느 돈깨나 있는 남자와 사귄 적이 있었는데, 남자의 끈덕진 구애에 못이겨 결혼하기도 전에 그만 임신을 하고 말았다. 다급하게 된 어머니가 남자에게 결혼을 서둘자고 다그치니까, 그때야 남자는 이미 아내가 있는 몸이라고 고백을 하고는 그만 자취를 감춰 버렸다.
어머니는 처녀로서 불의에 임신한 아기 진태를 해산하고 처음에는 자기 부모님이 미리 계획해 놓은 대로 어느 이웃 가정에 입양을 시키려 했으나 벌써 태어난 자식에 대한 애착이 너무 강해 앞으로 아이 때문에 결혼길이 막히더라도 살길이 어려워 아이를 데리고 문전걸식을 나서는 한이 있더라도 자기가 낳은 아이는 반드시 자기 손으로 기르겠다고 결심을 했다. 진태의 머리 속에는 아직도 어릴 적 기억이 초롱초롱했다. 자기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어머니가 어느 남자와 결혼도 하지 않고 한집에서 같이 살다가 몇 년 후에는 그와도 그만 헤어지고 말았다. 그때부터 어머니는 독신으로 살았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