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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지지”는 않지만 신실한 교회가 오래 유지된다!

TGC, 브레트 맥크레켄, 마르스힐, 힐송 교회 몰락에서 배우는 회개와

“한때 잘나가는 기독교의 상징 같았던 힐송, 미국에서 발판을 잃다.”

위 글은 ‘뉴욕 타임스(NYT)’ 종교 전문 기자인 루스 그레이엄(Ruth Graham)이 최근 헤드라인으로 기고한 글이다(Hillsong, once a leader of Christian cool, loses footing in America).

‘복음연합(TGC)’ 편집장 브레트 맥크레켄은 슬프게도 이 기사를 예측하는 게 그리 어렵지 않은 세상이 되었다고 말한다. 문신을 한 유명인 목사든 젊은이가 붐비는 나이트클럽 같은 교회든, 거의 모든 “잘나가는(cool) 기독교 지도자”의 열기는 지금 매우 빠른 속도로 사그라지고 있는 것 같다.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본질적으로 멋진 것은 일시적이다. 인기가 있다는 말, 그러니까 패션이라는 것은 패션이라는 말이 가진 의미에 걸맞게 무척 빨리 구식으로 바뀌기 마련이다.

이것이 맥크레켄이 쓴 책 Hipster Christianity: When Church and Cool Collide(유행에 앞서가는 기독교: 교회와 멋짐이 충돌할 때)에서 주장한 것처럼, 멋짐을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교회와 목회자에게 어리석은 일이 되는 많은 이유 중 하나이다. 단기적인 유행을 우선시한다면, 당신의 사역 또한 단기적으로 끝날 것이다. 특정 세대나 문화적 맥락의 변덕스러운 취향에 “맞추고” 싶어 하고, 또한 매력적으로 보이는 데에 너무 신경 쓴다면, 기독교의 초월성과 복음의 예언적 능력은 축소되고, 결국 복음은 시류(zeitgeist)의 윤곽에 맞게 왜곡될 것이다. 현실 적합성에 초점을 맞춘 기독교는 그 자체로 쇠퇴의 씨앗을 뿌린다. 그것은 나쁜 생각이다. 이런 기독교가 잘 끝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결국 맥크레켄은 아무리 예측 가능하고 무분별할 정도로까지 “멋진 교회”라는 방주가 행여 있을 수 있다 하더라도, 마르스힐(Mars Hills)에서 힐송(그 외 수많은 다른 것들)에 이르기까지, 실패하는 교회를 보는 것은 비극이다. 우리는 이런 현실을 보며 기뻐하지 않는다. 대신 통곡하고 그 실패에서 배워야 한다고 단언한다(In Praise of the Boring, Uncool Church).

 

“최신 유행하는 드레스 대신 아웃렛에서 산 드레스를 입더라도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것이 아름다운 가치가 있다”

 

우선, 이러한 헤드라인을 통해 우리는 현실 적합성(relevance)이 존경(reverence)을 대신할 수 없으며 오히려 존경을 손상시킬 수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호감 얻는 것에 초점을 두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언제나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에 중심을 두어야 한다. 최신 유행을 따라 사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신실하게 사는 것이다. 시대의 수준에 맞춰 다른 사람을 따라가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변함없는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두는 것이다.

고백과 회개, 성경말씀의 온전한 권고에 매일 순종, 영적 훈련에 대한 조용한 헌신과 같은 것은 결코 최첨단이 아니며 “최신 유행 목사”(hypepriests)가 등장하는 잡지(GQ)의 모델이 되기에도 적절하지 않은 항목이다. 그러나 이것은 건강하고 지속 가능하며 “같은 방향을 지향하는 장기적인 순종”의 믿음을 구성하는 항목이다. 그리고 오늘날 하루가 다르게 문을 닫는 유행 지향의 교회와 파멸하는 유명 목사를 목격하는 그리스도인이 더 깊이 깨달아야 하는 사실이다.

지루하고, 멋지진 않지만 부끄럽지 않은 교회가 실제로 가장 좋은 교회일 수 있다. 소비자 취향에 무심하고 트위터가 주는 아이디어에 무덤덤한 기독교가 바로 내가 원하는 종류의 믿음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교회가 바로 와 닿지는 않는다. 게다가 유명 목사의 설교를 갈망하며 아레나에서 벌이는 록 예배의 열광적 찬양에 빠진 이십대로 붐비는 큰 교회는 난공불락의 승리처럼 보이기도 한다. 미국 교회에서 성공을 위한 지표로 우리는 워낙 오랫동안 시장주도 자본주의의 지표(큰 것이 항상 더 좋고 청중은 언제나 왕이다)를 반영해 왔기 때문에, 우리는 “멋진 교회”는 언제나 멋진 아이들로 교회 천장까지 가득 차 있다고 가정한다. 그런 교회야말로 통하는(working) 교회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말로 그런 교회가 통하는 교회라면, 이 “멋진 아이들” 중 많은 이들이 왜 고작 십 년을 채우지 못하고 해체를 겪을까? 왜 결국 신앙을 버리고 교회를 떠날까? 나는 그런 사람을 너무 많이 봤다. 힙스터 교회 운동의 장기적 결과는 참담하다. 밀레니엄 세대 그리스도인 사이에서 해체주의가 급증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나는 이들을 양육한 교회, 그러니까 세상과의 “현실 적합성을 중시하는” 교회가 그들에게 애초에 연약한 믿음의 기초를 심었기 때문이라고 확신한다. 그들이 다닌 교회는 변하지 않는 오래된 이야기에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는 대신, 새로움이라는 관점에서 믿음의 틀을 잡았다. 그들의 교회는 거룩함으로 부름 받는 대신에 세상과 적합성을 갖도록 부름 받았다. 교리, 확고한 교회론, 그리고 신학적 정통주의에 뿌리를 내리는 대신 그들은 도덕주의에 뿌리를 둔 치료적 이신론에 푹 빠져 있었다.

그런 교회가 보여주는 장기 결과를 보면 그들의 정체가 여실히 드러난다.

 

신실함 > 멋짐

 

이런 교회에 속해 있었다면, 지치는 건 당연하다. 당신이 해체 과정을 겪는다는 것도 놀랍지 않다. 그러나 더 좋은 길이 있다.

모델 같아 보이는 사람들로 가득 찬 멋진 교회가 아니라, 예수님을 닮아 가는 사람으로 가득 찬 신실한 교회를 찾으라.

모든 사람이 스타일과 음악에서 같은 취향을 공유하는 교회 대신, 모든 사람이 예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한 열정을 공유하고 거룩함을 추구하는 교회를 찾으라.

(당신이 절대 만나지 못할 것 같은) 가장 카리스마 있는 유명 목사가 있는 교회 대신에 예수님이 가장 큰 스타인 교회, 그리고 겸손하고 친근하며 크게 두드러지지 않지만 삶과 사역에서 모범을 보이는 목사가 있는 교회를 찾으라.

과거와의 불연속성이 미덕인 “재창조” 또는 “신선한” 기독교를 추구하는 교회(“우리는 당신 할머니가 다니던 그런 구닥다리 교회가 아닙니다!”)대신, 기독교의 역사와 전통을 중시하고 또 기념하는 교회, 또한 과거와의 연속성을 중시하는 교회를 찾으라.

편안함을 충족시켜 주고 항상 긍정하기만 하고 결코 당신을 도전하지 않는 교회 대신, 당신을 성장하도록 밀어붙이기에 불편할 수 있는 교회, 곧 “구도자를 향한 민감성”보다 거룩함이 더 중요한 교회를 찾으라.

이 마지막 부분은 특히 나 자신의 믿음에 변화를 가져왔다. 내가 쓴 책 Uncomfortable(불편한)에서 나는 여기에 관해서 썼다. 그리스도인 제자라면 결코 피할 수 없는 어색함과 불편함과 대가를 기꺼이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교회에서 겪는 어려움에 놀라지 않을 것이다. 힘들더라도 지역 교회 생활에 충실하면, 우리에게는 더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길 것이다. 비록 멋지지 않지만 아름다운 지역 교회의 현실을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믿음은 더 강해지고 지속 가능해질 것이다.

이것은 내가 “멋진 교회”에 관한 글을 썼을 때 독자들(종종 이전에 그런 교회를 다녔던 힙스터들)로부터 받은 피드백과 일치한다. 그들은 멋지지 않고 과대광고를 남발하지 않는 교회에서 그들의 믿음이 어떻게 더 깊어졌는지를 들려주었다. 지난주에 나는 이런 메시지를 받았다.

슬프게도 “멋진 기독교”의 일부가 되려 했던 대부분의 내 친구들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 나는 여태 다녔던 교회 중에서 지금 가장 “지루한” 교회를 다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가족의 일원으로서 지금보다 더 사랑받고 있다고 느낀 적은 없었습니다. 게다가 확고한 가르침을 통해 믿음이 가장 많이 성장했습니다.

또 다른 독자는 이렇게 썼다. “‘멋진 교회’에 대한 나의 열망은 복음에 무언가를 첨가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으로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교회 내 사교 생활을 통해서라도 나 자신이 근사하다고 느껴야만 했습니다.”

용기를 북돋아 주는 간증이다. “멋진 교회”를 다니던 일부 베테랑들은 해체 과정을 겪거나 또는 교회를 완전히 떠나지만, 한편에서는 비록 최신 유행하는 드레스 대신 아웃렛에서 산 후진 옷을 입더라도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것이 아름답고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어지러울 정도로 쉽게 사라지는 트렌드의 세계에서 브랜드, 유명인사, 사회 운동, 제도, 사상 등 너무도 많은 것이 도착하자마자 바로 사그라드는 것 같다. 믿음을 소비주의 세상 속 수많은 유행 중 하나로 오해하는 순간, 기독교는 틱톡에서 퍼져나가는 최신 유행어처럼 깨지기 쉽고 변덕스러운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

기독교 신앙의 삶은 좋을 때나 나쁠 때나 공동체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충실하게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변하지 않는 순종, 천천히 불타오름, 조용한 근면 등 세상의 삶과 완전히 달라야 한다. 이런 형태의 구식 기독교가 인스타그램에서 입소문을 타거나 유명 트렌드 잡지에 소개될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러나 오로지 그 길만이 그리스도인을 성숙하게 성장시킨다. 오로지 그 길만이 지난 2천년 동안 수많은 성도에게 그랬던 것처럼 길고 꾸준하고 또한 유익한 믿음의 경주를 하도록 도울 것이다. 나와 여러분이 그 길을 가는 성도 가운데 포함되기를 기도한다.

 

06.0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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