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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소서 성령님, 저희를 더욱 하나님과 가깝게 하소서!”

‘성령강림절기’, 올바른 성령 이해로 하나님과의 거리를 좁히는 성령강림

‘교회력’은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죽음, 부활, 그리고 재림 안에서 완성되어진 우리의 구원역사를 매년 재현하는 것"이다.

교회가 이렇게 그리스도의 구속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교회력을 따라 설교한다면, 교회의 설교는 교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바 은혜를 계속적으로 기억하도록 하게 한다. 왜냐하면 교회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사역, 수난, 죽으심, 부활, 영으로 임하심, 그리고 재림 안에서 완성된 우리의 구원역사를 매해 되새김으로, 우리에게 구원사의 모든 과정을 계속해서 체험케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력은 우리가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도록 하는 '항구적인 은총의 수단'들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그래서 피우스 파쉬(Pius Parsch)는 교회력을 가리켜 '은총의 교회력'이라고 불렀다. 

부활 시기의 마지막 날이자 오순절인 날, 교회는 성령강림 주일을 지낸다. 이 날은 두려움에 떨며 다락방에 숨어있던 사도들이 성령을 받아 주님의 증거자로 힘차게 복음을 선포했던 성령강림 사건을 기념하며 또한 교회의 시작을 알리는 날이기도 하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를 묶는 사랑의 끈이다. 또한 성령은 하나님과 우리를 묶는 사랑의 끈이다. 하지만 성령은 이해하기 어려워 왜곡되거나 체험에만 집착하는 모습이 교회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코로나19 광풍이 어느 정도 사그라져 사회적 거리 두기가 주춤한 이때, 올바른 성령 이해로 하나님과의 거리를 좁히는 성령강림 주일을 맞이할 수 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바이러스 입자 하나가 세상의 많은 것을 바꿔 놓았다. 뜻하지 않은 불청객으로 찾아온 코로나19는 함께 사는 세상에서 ‘함께함’을 이용해 자신의 세력을 과시했다. 바이러스의 증식을 막기 위한 우리의 노력은 ‘거리두기’였다. 함께함이 문제였으니 사람과 사람 사이에 거리를 둬야 했다. 마스크 쓰기는 이제 행정명령이라는 사회적 규칙으로까지 정해졌고,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자유롭게 바라볼 수 없게 됐다. 마스크로 가린 얼굴로 우리는 서로 간에 간격까지 둬야 했다.

바이러스가 바꿔 놓은 곳은 비단 세상만이 아니었다. 주님께로 ‘불러 모인’ 공동체인 교회의 ‘모임’은 바이러스 확산의 최전선이 될 수 있다는 우려로, 유래 없이 공동체 예배를 중단해야만 했다. 하지만 현장 예배 중단이라는 엄청난 상황에서도 교인들은 저마다 하나님과 맺은 관계를 이어 나가고자 노력했다. 그 노력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목회자들과 사역자들도 애를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활발하게 공동체 예배가 진행되고 있는 시점에서, 코로나19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잃어버린 교우들이 다시 공동체로 돌아올 수 있도록 각고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시기에 성령강림 주일을 맞이한다. 성부와 성자를 사랑으로 묶으시고, 나아가 우리 서로가 사랑으로 일치할 수 있도록 묶어 주시는 일치와 사랑의 끈인 성령께서 우리에게 내리심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바이러스가 만들어 놓은 사회적 거리두기가 하나님과의 거리두기가 될 위기에 처한 지금, 우리를 당신과의 끈끈한 관계로 초대하시는 성령은 어떤 분이신지 알아 가며,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더욱 가까운 사랑을 나누는 기회를 마련해야 한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도 서로 사랑하기를 바라신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께서는, 삼위(三位) 사이에 이룬 사랑의 관계를 우리에게 먼저 드러내 보여 주셨다. 사랑의 원천으로서 성부는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며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성부와 사랑을 나누신 하나님이시다. 아버지에 대한 순종으로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바치셨던 사랑에서, 우리는 성부와 성자의 사랑의 관계를 확인한다. 그리고 성부와 성자를 결합하게 하는 사랑의 끈, 성부와 성자가 일치를 이루는 그 자리에 바로 성령이 계시다. 성부와 성자의 상호 사랑이고 공통의 사랑인 성령은 세 위격을 한데 묶는 끈이며, 성령으로 결합된 사랑의 관계는 완전한 일치를 이룬 사랑의 관계다.

삼위의 사랑은 삼위 안에만 가둬져 있지 않다. 그 사랑은 성령 안에서 우리를 향해 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영광을 받으실 때가 되자, 그전까지는 충분히 드러내지 않으신 성령께서 오실 것을 약속하신다. 성령의 호칭인 ‘곁으로 불려 온 분’(ad-vocatus)이라는 뜻을 지닌 ‘파라클리토’는 보호자, 변호자라는 뜻이다. 

성령을 표현하는 ‘영’이라는 용어는 히브리 말 ‘루아’(Ruah)의 번역으로, 본래 숨결, 공기, 바람 등을 의미한다. 성령, 곧 하나님의 숨결이며 하나님의 영인 새롭고도 초월적인 존재인 그분은, 우리로서는 삼위의 하나님 가운데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위격이다. 창조로부터 성령 강림 이전까지 성령은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기에 성령은 성령의 ‘활동’을 통해서만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성령을 물, 불, 손가락, 비둘기 등의 상징으로 표현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교회 역사 안에서는 성령에 대한 오해들이 싹트기도 했고, 지금까지도 성령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이들이 종종 우리 주변에 있다.

완전한 사랑의 끈으로 결합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가 단절될 수 없듯, 우리를 초대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그 사랑에 응답한 우리의 신앙이 이루는 사랑의 관계는 단절될 수 없다. 또한 당신의 몸을 모시고 ‘파견’된 그 자리에서도 이웃 사랑의 관계는 단절될 수 없다. 작은 바이러스 하나가 많은 것을 바꿔 놓은 지금, 사랑으로 결합된 관계를 이룬 성령 강림으로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키워가며, 그 사랑으로 주님과의 거리도, 이웃과의 마음의 거리도 좁혀 나가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도 두려움과 의심 때문에 다락방에 숨어 지내던 사도들은 오순절에 성령을 가득히 받고서 기쁘고 담대하게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고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도들의 증언(행 2, 14~36)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감화를 받아 세례를 받고 서로 도와주며 빵을 나누어 먹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는 생활을 하게 되는데 이들의 모임이야 말로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의 공동체인 교회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강림일을 교회의 창립일로 기념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이러한 성령의 빛 안에서 구원의 도구이자 표지로서의 사명에 충실하며 시대의 변화 속에서도 언제나 활기찬 생명력을 간직하고 복음의 진리를 새롭게 선포해야 한다.

 

05.2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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