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부활의 소망, 새로운 생명 그리고 교회의 시작!

2022년 부활절 부활하신 주님 만날 때 열리는 세상 경험한 여인들과 제

펜데믹 뚫고 온 부활의 새벽 맞는다!

초대교회의 시작은 암울하기 그지없었다. 구원자라 믿었던 예수님은 사형 판결을 받아 십자가형을 당하셨고,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두려워 숨기 바빴다(눅24:19-1, 요20:19). 그러나 얼마 뒤 그들은 180도 바뀌었다. 거침없이 예수님을 구원자로 증거하고, 살기등등하던 종교 지도자들을 오히려 질책했다. 담대한 그들의 행보는 하루에도 3천 명씩 입교하는 부흥의 역사로 이어졌다. 무엇이 그들을 바꿔 놓았을까?

바로 부활의 소망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초대교회 사도들에게 희망의 메시지와 자랑거리였다. 그래서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예수님의 부활을 전했다. 예수님의 살아나심을 통해 하나님을 믿는 모든 이들도 부활의 소망을 갖기를 바라며 담대하게 복음을 전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다음 날 새벽, 예수님을 잃은 여인들과 제자들에게도 어김없이 새벽이 찾아왔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금요일 정오에 온 땅을 덮은 어둠이(막15:33) 제자들의 마음까지 완전히 덮어버렸다. 그래서 3시간 후 세상이 다시 밝아지고, 또 그날 밤이 지난 후 여느 때처럼 토요일 새벽이 됐지만 그들은 여전히 두려움과 슬픔, 그리고 혼란과 절망의 어둠 속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렇게 밤과 같은 안식일이 지나고 난 후 다음 날 새벽 몇 명의 여인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눅24:1).

요한복음에 의하면 이 여인들은 “아직 어두울 때에”(요20:1), 곧 새벽이 채 오지 않은 밤에 자리에서 일어나 무덤으로 갔다. 그리고 그 죽음의 자리에서 그녀들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을 겪게 되었다. 그들이 찾고 기대한 것은 예수님의 시신, 곧 죽은 몸이었는데, 그들이 보게 된 것은 빈 무덤이었다. 또한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전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그곳에 있던 이상한 사람으로부터 들었다. 참으로 혼란스러웠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돌아간 후에도 무덤 곁에 남아 슬퍼하며 울던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님을 가장 먼저 뵙게 됐다.

하지만 마리아는 처음에 예수님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여전히 깊은 밤 속에 있던 그녀는 자신 앞에 나타난 주님이 그저 동산지기인 줄로 알았다. 그래서 그에게 “당신이 예수님의 시신을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알려주세요, 그러면 내가 가져가겠습니다”라고 애절하게 부탁했다. 그러나 그녀를 불쌍히 여기신 주님께서 “마리아야”라고 다정하게 그 이름을 부르시자, 마리아는 그제야 자신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자신이 그토록 사모하고 찾던 주님인 것을 깨닫게 됐다. 그녀는 벅차오르는 마음으로 “랍오니(선생님)”라고 주님을 불렀다(요20:14-16). 마침내 그녀를 감싸고 있던 어둠이 깨어지고, 새벽이 힘차게 동텄다.

새벽은 말 그대로 낮이 밤을 부수고 갑자기 출현하는 때다. 밤이 깊고 깊어져서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때에 갑자기 동쪽에서 태양빛이 나타나 어둠을 뚫고 솟아오르면 밤은 깨져버린다. 굳게 닫힌 밤의 철문을 깨부수고 새벽이 갑자기 출현한다. 밤과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가 도래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활은 새벽이다. 단지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발견한 때가 새벽이기 때문이 아니라 부활을 경험한 이에게는 죽음의 밤이 끝나고 낮과 같이 전혀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점에서 부활은 새벽이다. 안식일이 지나기를 기다렸다가 아직 어두울 때에 무덤으로 달려간 막달라 마리아가 보고자했던 것은 ‘죽은 예수의 몸’이었다. 그런데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주님은 놀랍게도 시체가 아니라 살아있는 분이었다. 깊은 밤 속에 있던 마리아에게 드디어 부활의 새벽이 밝아오는 순간이었다. 사고의 기존 틀이 깨어지고 새로운 지평이 열렸다. 그녀는 더 이상 죽음과 슬픔의 밤이 아니라 생명과 기쁨으로 가득 찬 환한 낮에 속해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여인들로부터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고 무덤까지 달려갔던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은 이미 살아나셨지만, 그들은 여전히 밤 속에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직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자들은 자신들이 숨은 곳의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두려움과 죽음의 밤 속에서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날 저녁 주님께서 그곳으로 직접 찾아가셔서 그들에게 당신의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보여주셨을 때에야 그들도 부활의 새벽을 맞게 되었다(요20:19-21). 이처럼 부활의 새벽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때에야 열린다.

동일한 맥락에서 프랑스 화가 고갱(Paul Gauguin)는 '황색의 그리스도'(The Yellow Christ, 1889)라는 작품을 통해서 죽음의 상징인 십자가가 새롭게 보이는 이유를 그려준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러나 고요히 잠든 것 같은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한적한 가을 농촌을 배경으로 따뜻한 느낌의 노란색과 붉은색 계통의 색상이 그림을 보는 이에게로 조용히 몰려온다. 십자가 주변에 앉아 잠잠히 기도하는 여인들의 모습에서 또 다른 경건함이 전해진다.

원래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곳은 황량한 바위언덕의 골고다였다. 극악무도한 죄인을 처형하는 공포가 느껴지는 거친 십자가와 거기에 못 박힌 피 흘린 흔적이 선명한 예수님의 몸이 주된 그림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조롱하며 비웃는 군중들과 비탄에 빠진 여인들이 주변에 있었다. 하지만 이 그림은 그것과 정반대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특별한 그림이다.

마을 곳곳에 붉은 색으로 칠해진 나무는 예수님이 흘리신 피, 보혈을 상징하듯 곳곳에 뿌려져 있다. 오래 전 있었던 역사적인 한 사건으로만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의미를 주며 삶을 변화시키는 십자가의 현재성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인류의 죄를 대속함으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시고 그리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사명의 이유가 그대로 전해진다. 그 결과가 여인들의 모습에서 발견하는 평안함과 경건함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와 무관한 것이 아닌 우리와 함께 하는 죽음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부활로 얻은 생명은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선물한다. 그리고 이것이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논설이나 주장이 아닌, 우리의 일상의 일이다!

사진설명: 고갱(Paul Gauguin)의 '황색의 그리스도'(The Yellow Christ, 1889).

 

[알림] 본지 4월 16일자는 정기휴간에 따라 발행하지 않습니다. 독자여러분의 양해를 바랍니다.

 

04.16.2022

Leave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