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부족한 독서가 초래하는 실패, 특히 오래된 작품의 경우에 관해
책을 너무 읽지 않는 것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성경의 권위를 방해하는 경향으로 흘러가는 데 일조한다…. 너무 적은 양의 독서, 특히 오래된 고전을 멀리하게 되면 현재 유행하는 의제에만 열광하게 되고, 그 결과 단순한 유행을 과도하게 흡수할 뿐 아니라 거기에 도취하기 쉽다.
물론 정반대가 초래하는 실패도 있다. 적지 않은 목회자가 청교도 작품에는 심취하면서 현대 작품을 읽는 데는 소홀히 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이 쓰는 언어, 사고체계, 예화 또는 주제를 들으면 거의 4세기 전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처럼 느낄 때도 있다. 그러나 이건 여기서 언급할 문제가 아니다. 대부분은 고전, 특히 주석과 탁월한 신학 작품을 읽지 않는 게 훨씬 더 흔한 일이기 때문이다.
동시대 작품만 읽을 때 생기는 문제는 누구나 다 비슷한 소리를 하기에 우리가 하는 모든 말이나 설교가 저속한 수준(kitsch)으로 떨어지기 쉽다는 점이다. 우리는 아주 유창하게 자기 정체성, 환경문제, 관용의 중요성,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그러나 기독교인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음) 그리고 성경이 우리의 고통에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 등에 관해서 이야기할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재정 관리와 이혼 후 회복에 관한 세미나도 진행한다.
나는 성경이 이런 주제를 다루지 않는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이런 주제는 결코 성경의 핵심이 아니다. 예를 들어, 굳이 세 명의 요한(존)만을 선택해서 요한 크리소스토모(John Chrysostom), 존 칼빈(John Calvin), 존 플라벨(John Flavel), 이 세 사람의 작품을 더 많이 읽는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다음 주제에 관해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더 자주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됐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죄의 무서움, 복음의 본질, 복되신 삼위일체, 진리, 제자도, 기독교인들이 고난당할 것이라는 성경의 주장, 잘 죽는 법, 새 하늘과 새 왕국에 대한 소망, 새 언약의 영광, 순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 주권자이시며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확신, 회개와 타협의 여지가 없는 믿음의 의미, 인내와 오래 참음의 중요성, 거룩한 아름다움과 지역 교회의 중요성 등등, 다른 세대를 살았던 그리스도인이 성경에서 발견했던 이런 중요한 주제를 무시하면서 과연 우리가 성경이 우리 삶과 사역에서 가장 권위 있는 기준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잃어버린,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느껴야 할 경외감에 관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떨어야 하는 인간의 능력을 약화하는 요소는 수도 없이 많다. 그 모두에게서 발견하는 공통점은 오만(arrogance)이다. 오만은 우리가 진정으로 그분을 따르는, 하나님에 관한 생각을 멈추지 말아야 할 자녀라면 당연히 가져야 할 태도, 계속해서 성경을 읽고 또 읽고 다시 읽고 묵상해야 할 필요성을 깨닫지 못하게 한다.
대신 이 세상에 차고 넘치는 데이터는 우리의 생각과 마음 그리고 상상까지도 늪에 빠뜨린다. 이런 도덕적 타락은 우리를 성경에서 멀어지게 한다. 음란물에 빠져 있거나 성행위를 조장하는 사람들, 또는 심한 경쟁을 조장하는 사람들이 말씀 앞에서 경외감에 떠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성경을 읽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는 모습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더욱이 우리의 무자비한 행동은 우리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성경의 실제적인 권위를 약화시킬 수 있다. 때때로 우리를 괴롭히는 지적인 의심을 만족스럽게 해결할 때까지 공부를 계속하지 않으면 우리 안에 있는 주님에 대한 두려움도 함께 줄어들 것이다. 물론 주님을 향한 두려움의 한 부분은 말씀 앞에서 떠는 경외감이다.
‘오만한 무지의 기술’에 관해
“오만한 무지”는 이런저런 주제와 관련한 성경구절이 주석적으로 혼란스럽고 불분명하기에 우리 인간은 결코 해당 주제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기에 그들은 오만하다…. 이 오만한 무지의 기술이 오늘날 알려지지 않았거나 실행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데이비드 거쉬(David Gushee)는 최근에 낸 책과 기사에서 동성애 결혼은 우리가 적절한 선에서 타협하는 수준으로(agree to disagree), 그러니까 예전에 아디아포라(adiaphora)라고 불렀던 ‘무관심한 주제’의 하나가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보수”와 “진보”가 동성애 문제를 비롯한 몇 가지 다른 문제와 관련해서 불행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고 예측한다. 그건 그들이 적절한 선에서 타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옳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공평하게 말해서, 성적 취향이 과연 영원한 생명에 관한 결과를 초래하는가 하는 질문에 덧붙여, 동성애에 대한 성경과 전통의 통일된 목소리는 결코 진보주의 기독교인의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점을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말해야 한다. 특히 도널드 포트슨(S. Donald Fortson III)과 롤린 그람스(Rollin G. Grams)가 쓴 ‘변하지 않는 증인: 성경과 전통 속에 드러난 동성애에 관한 기독교의 일관된 가르침(Unchanged Witness: The Consistent Christian Teaching on Homosexuality in Bible and Tradition)’을 참고하라.
트레빈 왁스(Trevin Wax)가 지적했듯이 이 주제에 대해 성경의 가르침과 행동 자체를 혁신해 분열을 시작하는 “진보주의자”가 도리어 “보수주의자”를 향해서 타협하지 않고 분명하게 선을 그어 분열을 조장한다며 비난하고 있는 형국이다.
우리 시대에 이 섹슈얼리티 문제보다 “오만한 무지의 기술”이 더 강력하게 호소하는 곳을 도무지 찾을 길이 없다. 같은 이유로 오늘날 성도들이 삶에서 전심으로 성경에 복종하려고 할 때 이 섹슈얼리티 문제만큼 그들을 성경의 권위에서 떨어져 나가도록 유혹하는 주제도 없을 것이다.
11.06.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