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채플 때 J 여고 합창단이 왔었다. 그들은 짧고 노란 유니폼을 입고 율동을 곁들은 노래를 불렀다. 벌써 얼마 전인가, 그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의상과 밝은 미소와 현란한 안무가 있어 눈이 호강했던-아, 채플시간에 주님만 바라봐야 했는데-기억이 있다. 그런데 사실 지금까지 강하게 남아 있는 것은 그 노래의 이런 가사다. “하늘 문이 열리면 노래할 이유 있네/ 놀라운 일 그곳에 있으리 노래할 이유 있네/ 그의 곁에 있으면 노래할 이유 있네/ 밤낮으로 노래 부르리 온종일 즐거운 노래를/ 노래할 이유 있네 내 죄를 주가 씻었네/ 노래할 이유 있네 새 생명 내게 주셨네 노래할 이유 있네” 그들은 그렇게 확신하며 노래할 이유가 있다고 했지만 적어도 내게는 그렇지 않았다. 노래할 이유보다 탄식할 이유가 더 많았다. 건강도, 성적도, 도시락 반찬도 시원치 않았으니 흥겹게 노래할 이유가 그 무엇이었겠는가. 그 후 언젠가부터 나는 노래하며 산다. 고난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성경에 보니 믿음의 사람들은 고난 속에서도 노래하지 않았던가. 그들은 고난에도 불구하고 더 중요하고 더 본질적인 것을 알고 있고 또 보고 있기에 노래할 수 있었다. 믿음을 가진 자의 노래를 나도 불러야 하지 않겠는가.
하버드대학의 개혁을 주도했던 내이턴 M. 푸쉬 총장은 청년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다섯 가지 요소를 이렇게 말했다. 흔들 수 있는 깃발, 변하지 않는 신념, 따를 수 있는 지도자, 평생을 함께 할 수 있는 친구, 그리고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래. 며칠 후 교회 청년들의 수련회에 강사로 간다. 청년들이 수련회에서 전할 말씀의 본문과 제목을 부탁하면서 함께 부르고 싶은 찬양이 있으시냐고도 물었다. 두 곡을 같이 부르자고 했다. 그 제목은 “광야를 지나며”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였다. “...주님만 내 도움이 되시고/ 주님만 내 빛이 되시는/ 주님만 내 친구 되시는 광야/ 주님 손 놓고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곳/ 광야 광야에 서 있네....” “...하나님의 꿈이 나의 비전이 되고/ 예수님의 성품이 나의 인격이 되고/ 성령님의 권능이 나의 능력이 되길/ 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 청년들과 함께 부를 것이다. 그들이 부르자고 할 찬양도 같이 부를 것이다. 펜데믹의 광야 길이 계속되고 있지만 청년들과 함께 현실에 탄식하지 않고 불러야 할 이유가 있는 노래들을 함께 부를 것이다.
지난 주간 샌프란시스코에서 필자가 속한 교단의 한 모임이 있었다. 전국에 흩어져 있던 작년과 올해 총회 임원들과 노회장들이 함께 모여 연석회의를 가졌던 자리이다. 찬양을 인도하신 목사님이 동부에서부터 개인의 신디사이저를 가지고 오셔서 본인이 직접 연주도 하시고 찬양도 뜨겁게 이끄셨다.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내가 지나왔던 모든 시간이/ 내가 걸어왔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힘든 이민 목회 현장에서 오신 목사님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찬양으로 고백했다. 그렇다.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없는 은혜였음을 함께 노래했다. 버스를 타고 함께 이동할 때 한 사람씩 나와서 자기가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는 시간도 가졌다. 한 사람이 시작한 노래였는데 모두가 나지막이 따라 불렀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귈 차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이민 목회자들이 깊은 상념에 쌓여 함께 노래를 부른 이유가 있었다. 이 가을 더더욱 모두에게 떠나온 고향의 그리움이 사무쳤기 때문이다.
11.06.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