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타고라스는 이렇게 말했다. “침묵하라. 그렇지 않으면 침묵보다 나은 말을 하라” 그렇다. 침묵보다 나은 언어가 있고 오히려 침묵이 백번 나은 언어가 있다. 성경적으로 분명히 말하자면 영의 언어가 있고 육의 언어가 있다는 것이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6:63) 살리는 언어가 있고 죽이는 언어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영에 속한 사람은 영의 언어를 육에 속한 사람은 육의 언어를 사용하게 된다. 복음은 유일하게 생명을 살리는 언어이다. 복음을 전하는데 침묵한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되겠는가. 복음을 전하는 데는 머뭇거릴 일이 아니다. 바울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복음을 전하여 많은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였다.
희망을 노래하는 것은 침묵보다 나은 언어이고 절망을 말하려면 차라리 침묵하는 것이 낫다. 알렉산더 대왕은 전쟁에서 승리한 후 땅과 전리품을 하나도 남겨두지 않고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적잖이 걱정하던 신하가 물었다. “대왕이시여, 이렇게 다 나누어 주시니 대왕 것은 아무 것도 없나이다.” 알렉산더 대왕은 당당히 말했다. “내게 아무 것도 없다고? 그렇지 않다. 나에게는 아직 남아 있는 것이 있다. 내게 남아 있는 것은 바로 희망이다.” 꺼지지 않는 희망의 언어는 그를 역사의 인물로 남게 하였다. 마틴 루터 킹도 인종차별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 “내겐 꿈이 있다”고 말함으로써 역사의 방향을 새롭게 하였다. 이사야 선지자는 절망의 세대에 분연(奮然)히 희망을 외친 선지자이다. 세상에 절망을 말하는 사람은 많다. 희망을 망하는 사람은 적다. 적은 그 희망의 사람들이 역사를 이끈다. 희망의 언어는 어둠을 확실히 깨뜨리고 낙심의 사람들을 다시 일으키는 기적의 언어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글귀를 잘 알고 있다. “노래를 부르기 전에는 노래가 아니고/ 종은 울리기 전에는 종이 아니고/ 사랑은 표현하기 전에는 사랑이 아니고/ 축복은 감사하기 전에는 축복이 아니다” 감사할 일이 있는데 침묵하면 안 된다. 감사는 그 사람의 영적인 상태를 여실(如實)히 보여준다. 이렇게 감사하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날 구원하신 주 감사/ 모든 것 주심 감사..../ 향기로운 봄철도 감사/ 외로운 가을날 감사..../ 길가의 장미 꽃 감사/ 장미 꽃 가시 감사..../ 아픔과 기쁨도 감사/ 절망 중 위로 감사/ 측량 못할 은혜 감사/ 크신 사랑 감사해” 가을타는 남자가 있는가. 가을앓이 여자가 있는가. 그래서 이 가을, 침묵이 답인가. 계절이 힘들고 환경이 괴로워도 침묵보다 나은 언어가 있다. 감사다. 감사는 꽁꽁 잠겨있던 풍요의 창고를 활짝 여는 열쇠이다. 오래전 박창윤 목사님을 뵌 적이 있다. 목사님은 어릴 적 불발된 폭탄을 만지다가 그것이 터져 양눈과 양팔을 잃으신 분이다. 왜 아픔과 설움이 없으셨겠는가. 죽으려하신 때도 있었다고 하셨다. 삶을 은혜의 관점으로 보시면서 낙담을 감사로 바꾸셨다. 목사님 곁에는 사람들의 모진 편견을 감사로 넉넉히 이겨내시던 사모님이 계셨다. 여기 침묵보다 나은 언어, 아니 침묵하면 결코 안되는 언어가 있다. 무엇인가? 복음, 희망 그리고 감사이다.
10.04.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