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비텐베르크의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세기부터 흑사병이 유럽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불과 5년 만에 유럽인구 절반이 사라졌고, 그중 도시 지역은 감염상태가 더 심각해졌다. 이러한 역병은 이어지는 세기에도 반복적으로 발생했는데, 1527년 비텐베르크를 강타한 전염병도 거기에 포함됐다. 이에 수많은 자가 도망갔다. 그러나 루터와 당시 임신 중이던 그의 아내 카타리나는 남아서 아픈 자들을 돌보았다. 마태복음 25장 41-46절을 자신들의 지침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존중해야 한다. ‘내가 병들었을 때에 너희가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본문에 따르면, 우리는 서로에게 묶여 있어 누구도 고통 중에 있는 다른 사람을 버릴 수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 사람이 도움을 받고자 할 때 기꺼이 그를 돕고 거들어줘야 할 책임을 안고 있다.”
루터는 도망가는 일이 용인되던 당시의 상황을 언급한다. 그는 자기 의를 추구하는 우리 모두의 성향을 알고 있었기에 스스로와 다른 결정을 내린다고 타인을 판단해선 안 된다고 경고했다. 다만 자신의 신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남겼다.
“이제 우리만 몇몇 집사들과 더불어 남았으나, 그리스도 역시 함께 계시므로 우리만 남았다고 해선 안 되겠지요. 저 옛 뱀, 살인자, 죄악의 장본인인 사탄과의 싸움에서 그리스도는 반드시 승리하실 거요. 그분의 발꿈치를 저가 얼마나 상하게 하였든 말이요. 다만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기를 바라며”(1527년 8월19일자 편지).
여기서 우리는 루터의 사고 속에 사탄과 그리스도가 얼마나 뚜렷이 대조되고 있는지 주목해야 한다. 사탄은 처음부터 살인자며(여기서 루터는 창세기 3장 15절을 염두에 두고 있다), 전염병 배후에 있는 자로 인식되고 있다.
그와 달리 그리스도는 훨씬 더 강력한 분으로, 훨씬 더 현재 상황 속에 깊이 관여하는 분으로 인식된다. 그분은 아픈 자들을 돌보는 이들 가운데 계시면서, 또한 아픈 자들 가운데도 계신다(마 25장). 또한 사탄과의 싸움에서 교회가 이겨 마침내 거머쥘 승리 가운데도 계신다. 그 승리에는 전염병에서 회복되는 일처럼 작은 의미의 ‘구원’ 사건까지도 포함된다. 이처럼 루터와 카타리나는 살아남아 그 극심한 시련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본을 보여주었다.
4. 런던의 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
1850년대까지 런던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부유한 도시였으며 인구도 2백만 명을 넘었다. 그러다가 1854년에 콜레라가 발생하며 런던 시민들의 마음에 공포감이 조성됐다.
당시 스무 살밖에 되지 않던 찰스 스펄전은 뉴파크스트리트 교회(New Park Street Chapel)의 목사로 부름을 받아 영국의 수도로 가게 됐다. 훗날 그는 당시의 전염병이야말로 자기 자신과 런던이라는 도시를 알아갈 수 있는 중요한 모멘트가 됐다고 회고한다.
“우리의 마음이 민감하게 각성되는 때가 있다. 바로 죽음이 도처에 널려있을 때다. 내가 처음으로 런던에 왔을 때, 얼마나 깊은 절망 속에서 사람들이 복음에 귀를 기울였는지 떠오른다. 콜레라가 무서울 정도로 기승을 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에는 가볍게 조소하며 설교를 듣는 이가 거의 없었다.”
스펄전은 그 당시 죽음을 앞두고 있던 한 사람을 방문하게 된 이야기도 들려주는데, 그는 자신의 사역을 심히 반대하던 자였다고 한다.
“그 사람은 생전에 나를 늘 조롱하던 자였다. 더 격하게 표현하자면 나에 대해 위선자라고 하며 공공연히 비난하고 다닌 자였다. 그러던 그가 죽음의 화살을 맞게 되자, 곧바로 나를 찾으며 상담해주기를 요청해왔다. 그때 그의 마음속에는 내가 하나님의 일꾼이었다는 사실에 대한 일말의 의심도 자리하지 못했다. 비록 입술로는 그 사실을 고백하진 않았더라도 말이다.”
세상의 기반은 늘 흔들리고 위태롭다. 하지만 그러한 위기는 종종 인생의 진실을 드러내는 폭풍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스펄전은 당시 전염병이 수많은 이들을 휘몰아쳐 유일한 반석 되시는 그리스도를 찾아 도망치게 만드는 폭풍이라고 생각했다.
연약한 육신, 불확실한 세계시장, 죽음 피할 수 없는 인간
그리스도만이 폭풍 잠잠케...유일한 반석 의지해 복음전파
오늘 우리는 어떠한가
분명 이 시대는 이전과는 다르다. 그 차이가 있게 하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다. 가령 현대식 병원이 등장하기 전에는 전문적으로 특화된 의료 시스템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또 앞선 세대는 환자를 돌보며 그 병이 어떻게 전염되는지에 관한 지식도 거의 갖추지 못했다. 환자를 돌보는 사람이, 심지어 아무 증상이 나타나지 않더라도 병을 옮기는 사람이 될 수도 있는데도 말이다.
이러한 경우에는 우리가 사랑하려는 대상에게 병을 옮기기보다 차라리 자가 격리하는 편이 사랑을 실천하는 최선의 방법일 수도 있다. 이처럼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은 시대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사랑 자체가 여전히 우리가 추구할 최고의 목표임에는 틀림이 없다. 자기중심적인 육신의 소욕이 아닌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행하는 사랑이라면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세상의 기반이 흔들리고 있음을 사람들에게 일깨워 줘야 한다. 우리의 육신은 연약하고, 세계 시장은 불확실하며, 우리는 모두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워 줘야 한다.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만이 폭풍을 잠잠케 하실 수 있으며, 반드시 그렇게 하시리라는 믿음 가운데 유일한 반석 되시는 그분을 세상에 전파하며 영화롭게 해야 한다. 나아가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다가가며 진정한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아무쪼록 하나님이 이 시련의 때, 다시금 그리스도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시고 그 나라를 넓혀 가시기 위해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길 기도한다.
04.11.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