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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 중에 발견하는 하나님의 풍요로우심!

Her.meneutics, 카린 리바데네이라의 재정적 어려움에서 찾은 하

카린 리바데네이라(Caryn Rivadeneira)는 CT 블로그(Her.meneutics)의 고정 기고가이며, “파산에서 발견한 하나님의 풍요(Broke: What Financial Desperation Revealed about God’ Abundance)”로, 무일푼이 절망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복으로 이끄는 길이라는 역설적인 진리를 담담하게 전해준다(Blessed Are the Broke...and rich are the financially desperate. Just ask my family). 

풍요할 때인가 주릴 때인가 

 

‘여호와 이레’란 하나님이 우리 분수에 넘칠 정도로 쏟아 부으시는 것이 아니다. 나는 결코 이러한 풍요를 원하지 않았다.

지난날을 돌아보면 고정적인 수입이 끊어지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고, 우리의 믿음과 드림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이라고 믿던 때가 내게도 있었다. 

어느 날 남편이 부엌으로 들어와 탁자에 봉투를 올려놓으면서 말했다. “열어 봐.” 봉투 안에는 일사분기 수입이 들어있었다. 액수를 보니 전년도의 일 년치 수입보다 많았다. 나는 남편을 끌어안았다. 생각지도 못한 복을 받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남편은 나름 괜찮은 사람이고 일도 열심히 한다. 착하고 성실한 사람들을 축복하시는 하나님께 우리는 사업체를 드리기로 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한동안은 우리를 축복하셨다. 그러나 잘나가던 사업이 경제위기로 된서리를 맞고 끔찍한 재정위기에 봉착했다. 그런 상황에서 보험적용이 안 되는 출산을 하고, 여러 가지 치료비 부담에 힘겨워하면서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그동안 우리 능력보다 더 많은 돈을 벌고, 호화로운 휴가를 보내고, 식료품이나 난방비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수업료가 비싸기로 소문난 학교에 아이들을 입학시키던 풍요로운 삶이 결코 복이 아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축복의 의미를 제대로 깨달았다고 할 수 있다. 사실 풍요롭던 시절엔 내 삶 속에서 하나님이 쉽게 보이지 않았다. 물론 하나님은 늘 그곳에 계셨다. 그러나 손에 수표를 들고 부엌을 돌며 춤을 추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반대로 ‘굶주림’의 시기, 즉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할지 전혀 대책이 없을 때, 집을 잃게 되지는 않을까 걱정을 하던 때엔 하나님을 잘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남편이 우리는 이제 빈털터리가 됐고, 돈이 한 푼도 없고, 신용불량자가 됐다고 말하던 가장 절망적인 날, 나는 비로소 예수님의 말씀을 곰곰이 생각하게 됐다.

일용할 양식이란 무엇일까? 구하는 대로 받을 것이라는 말씀이 사실일까? 생선 대신 뱀을 주는 아버지가 어디 있겠느냐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 내 믿음이 바닥을 치고, 내가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졌던 그 시절, 바로 그때 하나님의 임재와 선하심이 반짝이고 있었음을 기억한다.

 

가장 복된 일

 

내가 굶주림의 시기를 겪기 전에는 가난한 자-영적으로 그리고 달리-는 복이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다. 또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왜 그토록 어려운지도 알지 못했다. 또 초록이 무성한 도시 근교에서 자라고 살면서 가난한 사람들은 동정을 받고 부자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교회를 다닐 때에도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에 대해 알지 못했다.

“복 받은” 사람들이란 주로 건강하거나 승진을 한 사람들이라고 나는 들었다. 나 역시 그 말에 수긍했다. 구약성경의 하나님은 사람들을 물질적으로 축복하신다(아브라함, 솔로몬, 욥을 보라). 내게 이렇게 말했던 친구가 생각난다. “우리는 퍼스트클레스로 업그레이드되는 축복을 받았어. 하와이까지는 긴 비행이잖아.”

물론 전혀 기대하지 않았거나 가장 절실할 때 수입이 생겼다면 하나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 주셨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름별장과 승진과 팔팔한 몸 등 모든 것이 승승장구일 때엔 하나님께 간구할 것도 없고 하나님을 의지할 필요도 없기 때문에 하나님과 멀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삶이 여유롭고 편하면 하나님의 능력과 자비를 구하거나 제발 살려달라며 애원할 이유가 없다. 그뿐 아니라 두 손 들고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경이로움을 찬양하지도 않는다.

어려움에 처하거나 무일푼이 되는 등 인생의 기근을 경험한 사람들이 기도하고 찬양한다(아니 그들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

절망은 우리를 무너뜨리려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극도의 영적 고갈 상태에 있을지라도 소망되신 그분의 손을 의지한다면 복 있는 사람이다.

이러한 사실은 시편과 바울의 고백에 잘 담겨 있다(새내기 크리스천이라면 시편 142, 143편을 보라). 옥에 갇혔던 때를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다.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1:8-9). 

“메시지”성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그 일은 무엇보다도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렇다! 절망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다 토로하고, 부르짖고, 진술하게 함으로써 오직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우리를 인도한다.

하나님을 의존해야만 하는 것, 우리 시선을 그분에게만 고정시켜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 그분의 임재와 공급하심을 경험하는 것, 힘든 상황 속에서 그분의 선하심을 발견하는 것, 이것이 복이다.

그러나 이러한 복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번영복음에 옥죄여 옴짝달싹 못하고 있다는 것을 고백해야 한다. 우리는 번영복음을 다른 복음, 고난의 복음으로 대체해야 한다. 이것은 다윗이 수렁에서 발견했던, 또 바울이 감옥 안에서 찾아냈던, 내가 밀린 청구서와 채권자들의 독촉전화의 무게로 무너져 내렸다고 생각하던 시절 밤에 깨달았던 복음이다.

너무도 일찍 사랑하는 사람을 잃거나 꿈과 기회를 잃고 슬퍼하는 사람들, 영혼의 어두운 밤을 통과하면서 힘들어 하는 사람들, 그들이 그 어두운 밤을 지나 새로운 자비의 아침에 선하신 하나님의 신비로운 임재와 공급을 통해 발견한 복음이다!

 

02.22.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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