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인생에는 커다란 염려거리가 두 가지 있다. 우리는 과거를 바꿀 수 없다는 사실에 염려한다. 우리는 개인의 과거사를 다시 쓰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지만, 거기서 빠져나올 도리가 없다. 우리는 또한 미래가 예측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염려한다. 우리는 운명을 좌지우지하고 싶어 하지만, 미래를 우리 마음대로 통제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소유한 이 두 가지 기본적인 바람은 좌절되기 마련이다. 우리는 고통스러운 과거를 고칠 수 없고, 무시무시한 미래도 통제할 수 없다.
하나님은 인간의 깊은 염려에 두 가지 해답을 주신다. 하나님은 우리 죄를 용서하심으로 과거를 재창조하시는 용서의 하나님이시다. 또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지키심으로 미래를 통제하시는 약속의 하나님이시다. 우리를 용서하셔서 과거를 변화시키시고, 우리에게 약속을 주셔서 미래를 보장하신다.
그분의 은혜로 우리는 과거를 변화시키고 미래를 통제하는 그분의 능력에 동참할 수 있다. 우리도 용서할 수 있고, 또 용서해야만 한다. 우리도 약속하고, 그 약속을 지킬 수 있다. 실제로, 하나님께 속한 이 두 가지 능력을 받을 때 우리는 가장 인간답고, 자유로울 수 있다.
이에 크리스차니티투데이(CT)는 스미디스(Lewis B. Smedes)의 ‘과거를 바꾸는 용서의 힘’을 게재했다 (Forgiveness-The Power to Change the Past: To forgive is to set a prisoner free and discover that the prisoner was you).
유대인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인간의 조건(The Human Condition)”의 뒷부분에서 사람들이 간과하는 인간 영혼의 이 두 가지 능력에 관심을 집중하며, 성경의 예수님처럼 행동할 때만이 우리의 음울한 예감을 극복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한나 아렌트는 역사의 환원 불가능성에 대한 유일한 치료제는 바로 용서라고 말한다. 또 그 다음 장에서는, 미래의 불확실성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가 약속을 하고 그 약속을 지키는 것이라고 한다.
아렌트는 역사의 환원 불가능성에 대한 유일한 치료제로 용서를 꼽는다. 사물의 자연적인 과정에서 우리는 과거와 그 영향력에 얽매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역사에서 배울 수 있지만 그 역사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역사를 잊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역사를 되돌릴 수는 없다. 역사를 반복하는 불운을 타고 났을 수는 있어도 역사를 바꿀 수는 없다. 역사는 인간 존재의 불가피한 구성 요소다. 우리를 역사의 굴레에서 해방해 줄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밖에 없는데, 그것이 바로 용서다.
아렌트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용서라는 이 인간 잠재력을 재조명해볼 합당한 이유가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일찍이 예수님은 우리가 용서에 대해 단순히 생각만할 게 아니라 용서의 능력을 간구해야 할 강력한 이유를 제시하셨다. 내 안의 원망하는 마음은 애써 무시하고 싶겠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신다(막11:25).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용서에 관한 상투적인 표현들로부터 진정한 용서의 의미를 구별해내야 한다.
모든 용서 행위에는 고통, 영적 수술, 새출발 이렇게 세 단계가 있다. 첫 번째 단계인 고통은 용서가 필요한 조건을 만든다. 두 번째 단계에서 실제적인 용서가 이루어진다. 용서하는 사람이 기억 속에서 영적 수술을 집도하는 것이다. 이 행위를 완료하고 나서 세 번째 단계에서 절정에 이르는데, 용서하는 사람은 자신이 용서한 사람과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게 된다.
용서 행위에는 고통, 영적 수술, 새출발 3단계 있어
용서는 가장 강력한 사랑의 파도 꼭대기에 올라타는 것
포로 풀어주고 보니 그 포로가 바로 나 자신 깨닫는 것
고통
본인이 상처를 받지 않는 한에는 진정한 용서가 있을 수 없다. 우리에게 상처 준적도 없는 사람을 그저 용서하는 체한다면, 용서의 기적을 값싼 사면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당신에게 상처를 준 악인만 용서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도 당신에게 고통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어느 경우든 간에, 당신이 상처를 받지 않았다면 용서가 아니라 다른 적절한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모든 상처에 용서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복잡한 세상에서 연약한 인간으로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감내하고 무시하고 감수해야 할 상처들도 있다. 이런 일은 굳이 용서하려 애쓸 필요가 없고 약간의 영적 아량을 베풀면 될 일이다. 다음의 예들을 한번 생각해보자.
불쾌감: 약속에 늦는 사람, 저녁식사 자리에서 지루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사람, 계산대에 줄 서 있는데 새치기하는 사람은 우리를 짜증나게 만든다.
패배감: 우리가 망할 때 반대로 성공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승진에서 탈락했는데 승진한 사람, 우리는 빈손인데 큰 상을 받은 사람, 늘 우리보다 한 발 앞서 가는 듯한 사람. 설상가상, 이렇게 우리를 물 먹이는 사람들이 우리 친구들이라니.
모욕감: 우리를 좀 알아 봐줬으면 하는 사람들이 우리를 무시한다.
우리가 존경해 마지않은 교수님은 졸업하고 2년이면 우리 이름을 잊어버린다. 우리가 사랑하는 목사님은 친목 모임에 우리를 초대하는 법이 없다. 그런가 하면 우리 회사 상사는 따님 결혼식인데도 청첩장을 건네지 않는다.
이런 사건들은 모두 상처가 되지만, 굳이 용서가 필요한 일은 아니다. 조금 더 참고, 아량을 베풀고, 겸손하고 너그럽게 생각하면 될 일이지, 용서할 일은 아닌 것이다!
용서가 필요한 상처는 깊고 도덕적인 상처인 경우다. 깊은 상처는 사람들을 묶어주는 관계라는 끈을 잘라 버린다. 도덕적인 상처란 잘못된 행위, 불공정한 행위, 견딜 수 없는 행위를 가리킨다. 이런 상처들은 적당히 봐주거나 넘어가기가 힘들다. 그냥 없었던 일로 하자고 무시할 수가 없다.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치부할 수 없다. 용서가 필요할 정도의 상처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과 상처받은 사람 사이에 벽을 세운다.
용서라는 기적이 필요한 상처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불성실과 배신이다. 용서가 필요한 상처 중에서 이 두 부류에 들어맞지 않는 행동이 있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여기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불성실한 행위는 어떤 행위를 가리키는가? 친구 혹은 가족인 누군가가 당신을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대하는 것이 불성실한 행위다. 모든 인간은 자신에게 특별한 사람들과 보이지 않는 신실함으로 묶여 있다. 이런 연대감이야말로 우리가 누구인지 잘 말해준다. 인간은 자신과 관계를 맺는 사람들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형성한다. 그렇기 때문에 불성실의 문제가 심각한 것이다. 우리와 밀접한 사람이 우리를 낯선 이로 대할 때, 그는 두 사람 사이에 도랑을 파고 벽을 쌓는 셈이다. 그렇게 그는 우리의 정체성에 폭력을 가한다. “포기하다”, “버리다”, “실망시키다” 같은 단어들이 떠오른다.
영적 수술
용서의 두 번째 단계는 상처 입은 자가 상처를 준 자에게 보이는 내면의 반응과 관계가 있다. 용서하는 당사자의 머리와 가슴에서 일어나는 이 일을, 용서받는 상대방은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적어도, 지금 당장은 말이다. 용서하는 사람은 자기 기억 속에서 영적 수술을 감행한다.
누군가를 용서하는 것은 잘못을 저지른 사람과 잘못한 행위를 따로 떼어 생각하는 것이다. 상대방이 저지른 가슴 아픈 행동으로부터 상대방을 분리해서 그 사람을 재창조한다. 지금까지는 상대방이 당신에게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었지만 이후로는 그 사람의 정체성을 바꾸는 것이다. 그는 당신의 기억 속에서 다시 태어난다.
이제 그 사람은 더 이상 당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 아니라 당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다. 그 사람은 당신과 멀찍이 떨어진 사람이 아니라 당신에게 속한 사람이 된다. 한때는 그 사람을 악한 일에 능한 사람으로 생각했지만 이제는 당신을 필요로 하는 연약한 사람으로 본다. 당신에게 잘못을 저질러 고통스러운 과거를 안겨준 사람을 재창조함으로 당신은 자신의 과거를 재창조한다.
당신이 그 사람의 됨됨이를 바꿀 수는 없다. 그가 저지른 행동은 그의 존재와 떼려야 뗄 수 없다. 그의 잘못은 그에게 속해 있다. 하지만 당신의 기억 속에서 그를 재창조하면 마음에서 행한 영적 수술로 그는 변화될 수 있다.
하나님도 이렇게 일하신다. 어머니가 아이의 더러운 얼굴을 씻기듯이, 당신의 어깨에서 짐을 풀어 염소 등에 지워서 광야로 몰아내듯이, 하나님은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신다. 성경의 비유들은 하나님이 기억 속에서 우리가 한 일에 대해 수술을 행하셨음을 보여준다.
때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인 경우가 있다. 이미 죽은 사람, 우리의 용서를 바라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기억 속에서 영적 수술을 하는 것으로 용서의 과정이 끝난다.
새출발
서로 멀어졌던 두 사람이 완전히 새로운 관계를 시작할 때 비로소 용서의 기적이 완성된다. 딸과 소원했던 아버지가 딸의 손을 붙잡고 “이제 다시 애비 노릇 제대로 하고 싶구나”라고 말한다. 남편의 손을 잡은 아내는 “이제 다시 아내 노릇 제대로 하고 싶어요”라고 말한다. 친구의 손을 잡은 사람은 “이제 다시 친구 노릇, 동료 노릇 제대로 하고 싶네. 화해하고 다시 잘 지내보세”라고 말한다.
화해는, 원래 좋은 사이였지만 멀어졌던 두 사람이 재결합하는 것이다. 화해는 함께하는 새로운 여정의 출발점이다. 우리는 멀찍이 떨어진 이상적인 장소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있는 곳에서부터 재결합을 시작해야 한다.
과거의 일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일의 마무리가 깔끔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해결하지 못한 질문들도 있다. 미래도 불투명하다. 우리 앞에는 더 많은 상처와 용서가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대로의 모습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우리가 용서의 경이로움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다면, 이와 같은 용서의 기적과 우리가 이른바 용서라고 말하는 사소한 행위를 혼동하지 않을 것이다. 겉으로는 용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용서의 기적과는 아주 동떨어진 그런 행위들이 몇 가지 있다.
용서는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다. 마음속에 담아두기에는 너무 사소한 일들이라서 쉽게 잊고 사는 상처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너무 끔찍해서 잊고 싶어 하는 상처도 있다. 좋지 않은 기억력과 억누르려는 충동만 있으면 잊기는 식은 죽 먹기다. 하지만 기억하고 용서할 때 진정한 기적이 일어난다.
용서는 봐주는 것이 아니다: 잘못한 사람에게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 때 그들을 면제해준다. 남자와 여자가 날 때부터 다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면, 당신은 나의 잘못을 지적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괴팍한 어머니 때문에 노이로제에 걸려 그렇게 행동했다는 사실을 안다면, 당신이 나에게 책임을 묻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람이 잘못하긴 했지만, 그 사람 탓이 아니에요’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이것은 용서가 아니다. 용서란 봐주고 싶지 않을 때 가능하다. 먼저 책임을 묻고 난 다음에야 용서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사태를 얼버무리는 것은 용서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태를 무마해서 출세하기도 한다. 어머니들은 우리 입을 막고 갈등을 은폐한다. 우리 고통을 숨겨서 처음부터 용서를 원천봉쇄한다. 매니저들은 사태를 무마해서 큰돈을 챙기기도 한다. 서로 미워하는 사람들이 함께 일하도록 조정한다. 어머니와 매니저들은 사태를 수습하는 데는 고수들이다. 그들은 상처를 억제해 용서를 사전에 방지한다. 그러나 우리가 상처를 인정하고 원한을 표출할 때만 용서가 가능하다.
사랑이라는 창조적 폭력을 통해, 당신은 뒤바꿀 수 없는 과거에 다가가 당신에게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서 잘못된 행동만을 떼어낸 다음, 마음에서 그 상처를 지워버린다. 당신이 이것을 해낸다면 돌이킬 수 없는 고통스러운 과거를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을 한 것이다. 이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은혜는 하나님이 주시지만 이 일을 하겠다는 결정은 우리 각자의 몫이다.
결국 용서란 20킬로그램짜리 짐을 지고 15킬로미터 넘게 산을 오른 다음 그 짐을 내려놓는 것이다. 용서란 하프 마라톤을 한 다음, 푹신한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 것이다. 용서란 포로를 풀어주고 보니, 그 포로가 바로 나 자신이었음을 깨닫는 것이다. 용서란 나에게 상처를 주는 과거로 돌아가 기억 속에서 그 과거를 재창조함으로써 새출발을 하는 것이다. 용서란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심장박동에 맞추어 춤을 추는 것이다. 용서란 가장 강력한 사랑의 파도 꼭대기에 올라타는 것이다.
잔인하게 불공평한 역사에서 유일한 피난처는, 미래의 창조적인 가능성으로 향하는 유일한 길은 용서의 기적뿐이다.
10/26/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