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 부모들이 자녀들을 키우면서 겪게 되는 스트레스와 감동을 담백하게 서로 나누는 블로그가 있다. 바로 에미 쥴리아 베커가 ‘크리스처니티투데이’(CT)에서 운영하는 블로그(THIN PLACES)이다. 그녀는 이 공간을 통해 신앙, 가정 그리고 장애를 겪는 자녀를 둔 크리스천 엄마, 아빠들의 진솔한 고백들을 나눈다.
한인 크리스천 가정들 역시 아이들과 함께 신앙 안에서 건강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중요한 것을 배운다”는 주제로 2편의 글을 골라 소개해, 과연 우리 가정에서는 어떠한 감정들이 오고가고 있으며 아이들과 얼마만큼이나 하나님을 알려주고 있는 지를 점검해본다.
아이들과 악의 문제에 대해 대화할 때
(Talking with Kids about the Problem of Evil, A Small Talk guest post by Jennifer Grant)
첫째 아들은 항상 내 말을 잘 따랐다. 아이가 아장아장 걸을 무렵 내가 아들에게 “우린” 다른 친구를 밀거나, 공을 잡으러 차도에 뛰어들거나, 뜨거운 레인지 위를 만지면 안 된다고 설명할 때, 아이는 큰 녹갈색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부터 아이는 이러한 작은 죄들을 멀리했다.
세 살 어린 동생은 다른 아이를 밀치거나, 뜨거운 전구나 버너를 만져서 손을 데이거나, 식료품점에 세워놓은 진열품들을 쓰러뜨리면 안 된다는 내 훈계를 큰 아이보다 더 마음에 새기는 것 같았다. 이 아이는 믿음과 순종의 자세를 타고난 아이다.
네 아이 모두 어렸을 때, 아이들은 기독교와 관련해서 “개와 고양이도 노아의 방주에 들어갔어요?”부터 시작해서 “아담과 하와의 아들은 누구랑 결혼했어요?”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망라하는 질문을 자주 했다. 이런 질문들과 다른 궁금증들에 대해 대답해주면서 관련된 성경 본문을 읽어주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동생들이 이구동성으로 “왜요?” “어떻게요?” “말도 안돼요!” 라고 쏟아낼 때, 큰 아이는 자주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했다.
물론 수 년 동안 아이들의 질문은 하나님은 밤에 잠을 주무시는지 안 주무시는지, 천국은 정확하게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같은 엉뚱한 질문들에서 “왜 전쟁이 일어나요?”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신다는 걸 어떻게 알아요?” “어떻게 하나님은 한꺼번에 모든 곳에 계실 수 있어요?”같은, 점점 더 복잡한 질문들로 옮아갔다.
나는 이런 질문들이 아이에게나 어른에게나 얼마나 까다로운 질문인지를 절감하면서 최선을 다해 대답했다. 나는 신앙이란 눈에 보이지 않고 잘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믿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나는 아이들에게 삶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때, 하나님이 아이들 각자를 어떻게 돌보셨고 또 아이들 각자에게 어떻게 행해 오셨는지를 설명했다.
아이들은 여러 번 내가 마카로니 앤 치즈를 만들기 위해 물을 끓이고, 서류를 구겨지지 않게 가방에 넣고, 개가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문을 열어주고, 한 아이의 신발 끈을 묶어주면서 다른 아이들이 손을 씻는 것을 확인하는 등, 대여섯 가지의 일을 한꺼번에 하고 있을 때 영적인 질문들을 쏟아냈다.
아이들의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이 불완전하거나 성급하거나 산만할 수밖에 없을 때, 나는 아이들의 신앙의 여정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나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과 하나님 사이에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나는 ‘아이들을 양육하는 데’ 내가 해야 할 최선을 다했고 아이들이 교회의 다른 믿는 가족들과 영적인 교제를 지속하도록 했다. 하지만 결국, 아이들 각자는 하나님과 일대일의 관계를 맺고 하나님과 씨름할 수밖에 없었다.
큰 아들이 대학 입학으로 집을 떠나기 몇 주 전 큰 아들과 나는 뉴욕시에 있는 ‘킹 트럼펫 버섯’과 ‘설탕에 졸인 회향 잎을 곁들인 아귀 요리’ 메뉴 같은, 거창한 풍미를 자랑하는 식당에서 외식을 했다.
나는 향수에 휩싸였다. 유치원을 다닐 동안 내내 구운 치즈 샌드위치와 마카로니 앤 치즈를 즐겨 먹었던 아들은 지금 숯불에 태운 방울 양배추와 밀알을 아주 행복하게 먹고 있었다. 아들은 지금 법적으로 성인이이고, 대학생활을 막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즉각적으로든 영속적으로든 아들은 어떻게 변화될까? 또 어떻게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할까? 우리 관계는 어떻게 변할까? 아들이 믿음을 계속 지킬까? 아니면 내가 내 인생에서 몇 차례 그랬듯이 신앙을 잠시 한쪽에 밀어둘까?
엄마로서 아들이 다치거나 잘못된 길로 가지 못하도록 막는 역할을 하는 위치에 있었던 이후로 여러 해가 지났다. 사춘기의 아들은 더 이상 영적이거나 지적인 질문들에 대한 답을 얻으려고 엄마를 의지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들은 지금까지 함께 집에 있었고, 언제나 자기에게 감동을 주거나 자기를 힘들게 하는 일에 대해 얘기할 준비가 돼있다. 아들은 곧 집을 떠날 것이고 그의 삶의 많은 부분은 내 시야를 벗어날 것이다. 아들의 믿음이 온전히 아들만의 믿음이 돼야하는 하는 시간이 왔다.
우리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기도 하고 앞으로의 일들에 대해 이야기도 하면서 식당 야외 테이블에 몇 시간이고 앉아있었다. 그 시간은 내 마음속에서 “집중해. 지금, 지금 이 순간은 네가 영원히 기억하고 싶어 할 시간이야”라고 말하는 아주 즐거운 시간이었다. 나는 집중했다. 그날 저녁, 우리의 대화는 아들의 믿음과 그를 힘들게 하는 질문들로 이어져 갔다.
그 중에서도 우리는 악의 문제에 대해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어떻게 우리가 이렇게 불의하고 고통이 가득한 세상 속에 살아가면서 선하신 하나님을 믿을 수 있을까? 왜 수많은 사람들이 극빈자로 태어나는데 반해 어떤 사람들은 안락하게 태어날까? 아들이 의구심을 갖고 있고 그를 믿음에서 넘어지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동안,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내가 어떻게 그와 비슷한 이슈로 씨름했었는지를 나눌 수 있었다.
결국, 나는 아들이 얼마나 나를 신뢰하느냐에 상관없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일을 할지 더 이상 아들에게 말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들이 어렸을 때처럼 내 역할은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과 하나님이 함께하셨던 나의 경험을 들려주는 것이고, 아들이 아들만의 믿음의 여정을 계속할 수 있도록 지켜보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들을 결코 놓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다.
아들의 두려움을 잠재울 수 없을 때
(When I Can't Calm My Son's Fears, A Small Talk guest post about fear and peace by Micha Boyett)
이번 여름 ‘The Highly Sensitive Person(매우 민감한 사람)’이라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나 자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며 친구가 추천한 책이다. 나는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깊이 느끼는 사람이라, 느낌은 나의 영적 은사라고 자주 농담하곤 한다.
어쩔 땐 느낌이 사람을 울게 할 수 있다. 내게 민감함은 저주와 축복 양쪽 모두에 해당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나의 예민한 성향은 나를 작가로 만든 보배가 되기도 하고, 동시에 내 마음을 폭풍 같은 불안으로 폭발하게 하는 다이너마이트가 되기도 하다. 이 둘 사이를 언제나 오락가락하게 한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나 자신에 대해 안다는 것이 내 아이에 대해 얼마나 많은 것을 깊이 있게 설명해주는지 알지 못했다. 첫째 아들은 민감한 아이에 대해 내가 읽은 모든 묘사에 해당될 만큼 아주 민감한 아이다. 이 아이의 마음은 풍부한 언어능력과 통찰력으로 가득해서 매사를 아주 깊이 느끼고, 자주 울고, 화가 나서 어쩔 줄 몰라 하고, 끔찍한 악몽을 꾸고, 걱정한다. 이 아이는 늘 걱정이 많다.
아이가 성장하는 모든 시기마다 강박증과 염려가 있었다. 아이가 화산의 매력에 푹 빠져 있었던 3살 때는 화산의 폭발로 한순간에 멸망한 폼페이에 대해 어른의 축소판처럼 막힘없는 설명을 늘어놓았다. 이 시기에는 아들의 두려움이 지식에 대한 사랑과 함께 적절하게 발달됐다.
지난 가을 유치원 수업으로 지진 대비훈련을 받은 후, 아들은 화산을 지진으로 대체했다. 한 달 동안 아이는 지진에 대한 두려움이 계속 커져서 야간공포증에 시달렸고 밤마다 우리를 깨웠다. 앞으로 지진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매일 밤 새벽 3시에 일어나 울면서 지진 이야기를 했다. 남편과 나는 냉정을 유지하려고 애를 썼다. 우리는 이렇게 속삭여줬다. 그리고 지금도.
‘하나님은 지금 이곳에 계셔. 엄마와 아빠도 여기 있단다. 우리는 항상 너를 돌보고 있고, 네 곁에서 자고 있어. 지진이 일어나도 너를 지켜줄 거야. 하나님은 너를 사랑하시고 네가 안전하기를 바라신단다. 우리는 샌프란시스코에 살아. 우리는 지진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현실을 피할 수 없어. 지진이 일어난다면 그건 아주 큰 사건이 될 거야. 그런 일이 일어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약속을 하실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함께하셔.’
나는 이 말 외에 다른 어떤 말이 필요한지 모르겠다.
지난달에는 소방훈련이 있었다. 지금 1학년이 된 아들은 학교강당에서 행동을 멈추고 바닥에 몸을 낮추어 구르기를 하는 법을 배웠다. 또 아이는 바닥을 배로 기어가는 법을 배웠다. 연기가 위로 올라가기 때문이다. 아들은 집에 와서 자기가 올라탔던 소방차와 고학년 학생들이 공연했던 우스꽝스러운 촌극과, 제대로 작동되는 화재경보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나에게 설명해주었다.
이틀 후에 악몽이 시작됐다. 아들은 어두움 속에서 나에게 두려움을 호소했다. “엄마, 화재경보기가 꺼져있으면 어떡해요? 엄마랑 아빠가 우리한테 올 수 없을 땐 어떡해요? 엄마, 화재경보기가 꺼져있는데 저는 엄마가 요리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진짜 화재면 어떡해요?”
어떤 설명을 해주어도 통하지 않았다. 우리의 대화는 뱅글뱅글 돌았다. 아들은 점점 더 불안해했다. 때때로 자식을 키우다보면 책에서 답을 찾을 수 없는, 대화는 뱅글뱅글 돌아서 어떤 결론도 이끌어 낼 수 없는 이런 순간들을 맞닥뜨리게 된다.
나 역시 아주 예민한 아이였다. 나 역시 두려움이 많았다. 나의 두려움은 아무도 모르는 환영과 환청 속에서 나타났다. 밤에 내 침대는 가시가 자라나 따가웠고 그것이 현실이 아니지만 여전히 따갑게 느껴진다는 것을 알고 나는 소리 없이 울었다. 그리고 내 귀에 드럼소리가 더 커지고 박자가 더 빨라지더니 외로운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결코 내 침대에서 안식을 찾을 수 없었던, 두려움에 몸서리치던 그 무서운 밤에 내게 필요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내 아들에게 논리적으로 설명하려는 충동을 느끼지만, 그러한 순간들을 말로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나는 지진이 일어나지 않는다거나 화재가 발생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없다. 나는 아들에게 가족이 항상 안전할 거라고 장담할 수 없다. 나는 세상의 진실을 안다. 이곳은 위험한 장소다. 이곳은 두려움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나는 내가 아는 진리를 말해줄 수 있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고통 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 고통의 한 가운데서도 이 세상은 여전히 아름답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선하시다.
나는 한 밤중에 아들의 침대에 몸을 구부리고 속삭인다. “네 마음속에 전쟁이 일어나고 있구나. 전쟁의 반대가 뭔지 아니? 평안이란다.” 그리고 시편 4편의 말씀으로 기도한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하게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나는 내 안에서 내 마음을 더 차지하려고 ‘감사하는 나’와 ‘두려워하는 나’가 싸우는 모든 전쟁을 알고 있는 엄마다. 나는 내 어린 아이에게 모든 답을 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전쟁의 반대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다. 평안, 평안, 또 평안이다.
때때로 우리 아이들과 나누는 가장 중요한 대화는 우리에게 할 말이 남아있지 않을 때다. 아이들이 우리의 완벽한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할 때다. 아이들이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가 함께 있어주는 것이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는 내가 하나님의 임재 외에 어떤 말도 필요치 않다고 느낄 때 주셨던 이 말씀을 되뇐다.
나는 할 말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아이의 머리에 폭풍우가 일어나는 침대 옆에 조용히 서 있다. 이 세상은 힘들고, 아이를 기르는 일도 힘들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어두운 방에서 내가 아는 모든 것은 내 어린 아들이 안전하다는 것이다.
10/29/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