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으로서 환경을 중요하게 여기고 지키고 돌봐야 할 이유가 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만물을 완성하실 것을 믿기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자체에 현재 우리가 일상의 삶에서 접하고 있고 접하게 될 환경까지 포함시켜 이웃사랑의 하나로 가꾸고 보살피는 것이 포함돼있기 때문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고린도후서 5장 17-19절에서는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백성들에게 다시 세상을 화목하게 하는 직책과 말씀을 주셨다고 기록돼 있다. 환경에 대해 이보다 더 적극적이고 근본적인 시각이 세상에 존재하는가?
크리스처니티투데이는 지구 온난화 현상, 아마존 대형 화재, 이상 기온 등 환경 문제들이 쟁점으로 등장하고 있는 시점에서, 3명의 전문가에게 크리스천이 환경 문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가를 물었다(Green Plus Christian Isn't New Math: How concerned Christians should be about environmental care).
하나님만큼
(조너선 메리트는”환경친화적 하나님: 지구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 발견”의 저자)
복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크리스천이라면, 환경도 중요시해야 한다. 두 가지 영역이 직접적 연관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불가분의 관계다.
창조세계 보전은 복음의 출발점이다. 전 세계 선교사들은 미국 기독교인이 전개하고 있는 “창조세계 보전” 움직임에 지지를 표한다. 해외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들은 대부분의 국가에서 복음을 증거할 때, 현지인들이 잘 모르는 예수님 이야기를 먼저 꺼내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이에게 분명히 드러나는 창조와 창조자(롬 1장)에 대해 이야기한다.
창조세계 보전은 복음 증거를 강화한다. 환경문제가 민감한 이슈로 점차 대두하는 서구 국가에서는 환경보호 정신을 ‘선한 사람’의 특징으로 여긴다. 자기희생적으로 환경을 돌보고, 자연이 제공하는 천연자원에 의존해 살아가는 이들을 위해 나서는 그리스도인을 비기독교인이 목격할 때, 복음이 설득력을 갖는다. 이것이 바로 미국의 개척교회들이 환경보호 실천을 교인들에게 강조하는 이유다.
비서구인들은 역사적으로 기독교 국가였던 서방을 면밀히 관찰하면서, 서구적 생활방식과 행동양식을 바탕으로 해석한 기독교 믿음에 대한 의견을 내놓는다. 예를 들어, 세계인구의 5%밖에 안 되는 미국인이 전 세계 종이의 1/3을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이 삼림파괴로 고통과 불의에 시달리는 니카라과, 온두라스, 에콰도르와 같은 나라에서의 복음전파에 어떤 영향을 미치겠는가?
복음을 실천하는 삶은 창조세계 보전을 포함한다. 창조세계 보전이나 다른 어떤 사회이슈가 복음의 기초를 형성한다는 것은 부적절한 주장이다. 그러나 복음은 철저히 자기희생적이고 온정적인 삶을 가르친다. 예수님은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18:19-20)고 명령하신다. 이 말씀은 전 세계 이웃들을 사랑하고, 약자를 돌보고, 성경 전체에서 말씀하시는 창조세계 보전의 의무를 지키라는 명령을 포함한다.
환경문제를 외면하는 것은 복음을 부끄럽게 하는 것이다. 사명을 다하는 삶이란 진리를 말하는 삶이다. 이는 세계에서 벌어지는 문제에 대해 정직해야 한다는 뜻이다. 세계에서 자행되는 불의를 외면하는 기독교 로비단체와 소위 기독교연합이라 일컫는 단체를 그저 맹목적으로 따른다면, 복음전파는 요원하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창세기 축자해석”(The Literal Meaning of Genesis)에서 이를 두고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만약 비그리스도인이 잘 아는 성경의 어떤 분야에 대해 그리스도인이 어리석은 의견을 피력한다면, 어떻게 비그리스도인이 성경을 믿을 수 있겠는가?”
크리스천이 창조세계를 돌봐야 하는 데에는 더 많은 이유가 있다. “땅은 여호와의 것”(시24편)이기 때문이다. 창조세계는 하나님이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기(시19편, 롬1장)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지키라고 명령하셨기(창2:15) 때문이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시작된 우주적인 구원에 참예하도록 부르셨기(고전1장, 롬8장, 계21장)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가 창조세계를 돌봐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을 다스리고 예수님의 복음이 모든 사람 가운데 뿌리내리기 원하기 때문이다.
청지기 이상은 아니다
(앨버트 몰러, 남침례신학대학교 총장)
환경문제는 오늘날 크리스천이 직면한 문제 가운데 가장 논란이 되는 이슈다. 한편으로 크리스천들은 종종 자연주의 세계관에 깊이 뿌리를 둔 환경보호주의에 맞닥뜨리기도 하는데, 때로 이러한 범재신론 영성과 얽혀있기도 하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복음주의자들이 환경문제에 침묵, 무관심, 무심으로 일관했던 안타까운 과거가 있다.
보다 광범위한 문화적 대화는 종종 정치적, 이념적 양극화로 치닫는다. 복음주의자들도 정치적 논의와 공공정책이 끼치는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크리스천으로서 가져야 할 환경에 대한 우려는 정치보다 우선하며 정책보다 깊은 것이다.
환경에 대한 적절한 복음주의적 태도는 우리가 어렸을 적 배운 “참 아름다워라”(This is our Father’s world)라는 찬송가에 잘 나타나 있다. 하나님의 통치와 청지기에 관한 성경적 주제는 창세기의 창조에서부터 요한계시록의 새로운 창조에 이르기까지 성경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신다. 하나님은 이 창조물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1:28)라고 통치권 위임에 대해 분명히 말씀하신다.
나는 이 성경구절과 창조질서의 청지기로서 인간의 통치에 대한 분명한 선언 사이에 조화로운 균형을 전달하기 위해 오랫동안 가르치고 글을 썼다. 그러나 내가 이른 결론은 이 두 가지가 결국 하나고 같다는 것이다. 통치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청지기적 의무를 포함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대로 빚으신 유일한 창조물에게 통치권을 부여하셨다. 이에 대해서는 오해의 여지가 없다. 인간은 창조세계를 엉망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널리 알려진 칼뱅의 말처럼, 사실 창조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작품이다. 이 땅에 대한 인간의 통치목표는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내재한 하나님의 영광을 분명히 드러내는 것이다. 창조주가 우주에 쏟은 사랑과 보살핌을 마땅히 우리 통치방식의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
크리스천들은 수많은 환경보호론자들이 알게 모르게 암시하는 범신론이나 신뢰할 수 없는 과학을 믿어서는 안 된다. 환경적 종말론을 받아들여서도 안 된다. 너무나도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이러한 사상은 받아들이면서, 기독교에 바탕을 둔 올바른 환경보호는 무시한다.
동시에 환경을 귀히 여기고, 그 상처를 치료하며, 창조세계를 존중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자원을 소중히 여겨야 하는 창조세계에 대한 책임 또한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창조세계의 청지기 역할을 어떻게 이행했는지에 대한 심판이 있음을 알고 있다. 이는 우리의 우선순위를 어디에 둬야 하는지 말해준다. 첫째는 복음전파다. 그러나 우리 모두 알고 있듯이, 복음에는 복음이 미치는 영향력이 따르기 마련이다.
올바른 환경보호론은 그 영향력의 하나다. 그러나 종국에는 세상을 지키는 자는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받은 은사에 따라
(칼 베이스너, 창조세계 청지기를 위한 콘월동맹 대변인)
나는 알츠하이머병을 앓는 이모와 지적장애가 있는 조카딸을 돌본다. 항상 이들을 마음에 두고 신경을 쓴다. 이모의 주치의는 이모를 잘 모르지만, 외면상으로 객관적 측면에서는 나보다 이모를 더 많이 돌본다. 반면 이모와 조카와 같이 살며 집안일을 돌봐주는 내 딸은 의사나 나보다 이모 가족을 개인적으로도 객관적으로도 훨씬 가깝게 돌본다.
크리스천은 환경 돌보기에 얼마나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이에 대한 답은 ‘환경돌보기’에 대한 정의에 따라 일부 달라질 수도 있다. 주관적이고 정서적인 차원의 돌봄을 말하는가, 아니면 객관적으로 행동으로 나서는 돌봄을 지칭하는가?
아마 우리 모두 환경의 가치에 대해 상당한 애정을 갖고 있을 것이며, 환경을 돌보기 원하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의 노력은 강바닥 쓰레기 제거, 화학공장의 독성 폐기물 방출 반대, 연료 효율성이 높고 공기오염 물질 배출이 적은 엔진개발 등과 같이, 보다 객관적이고 외적인 돌봄에 제한돼 있다. HIV/에이즈 치료와 예방, 기아 대책, 전도, 인신매매 퇴치, 아이들에게 성경이야기 읽어주기 등에 시간과 재원, 노력을 동시에 투자할 수가 없다.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사도 바울이 교회 내의 은사에 대해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고전12:20-21)라고 한 말을 적용해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줄리는 환경보호 청지기 운동에 모든 시간을 쏟기 때문에 불우이웃을 위한 옷가지를 모으는 교회활동에 참가할 시간이 없다. 론은 그 반대다. 제인 엄마는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집에서 가르치는 한편, 여신도 성경공부 소모임의 리더로 섬길 뿐만 아니라, 교회를 처음 방문한 이들에게 주중에 연락을 취하는 데까지 시간을 쪼개 쓰고 있다. 또 공공정책에 대해 주정부 의원과 연방정부 의원에게 의문을 제기하는 일도 한다. 이들 중 시간을 잘못 사용하는 이가 있는가?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롬14:4).
크리스천은 환경문제에 얼마나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이는 일반화해서 말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각 크리스천이 받은 은사에 따라 다르다고 해야겠다. 그러나 ‘종교와민주주의연구소’(Institute on Religion and Democracy)에서 내가 발표한 논문 “미국 그리스도인이 오늘날 직면한 가장 중요한 환경보호 임무는 무엇인가”에서 밝힌 몇 가지 원칙은 있다.
지금 환경보호 이슈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환경악화에 대해 아직 증명되지 않은 주장을 어떻게 바로잡을 것인지에 관한 고민과 더불어, 환경문제 및 해결방법의 경제효과 분석이다. 또한 빈곤이 환경에 가하는 위협을 주지하고 극빈층을 위한 경제발전을 추진하는 것이다. 정부도 환경지킴이 역할을 담당하므로, 정부조직 내의 투명성과 책임감, 정직성을 높이는 것 또한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허다한 공중의 새보다 사람이 소중함을 명심하고, 이 지식을 바탕으로 우선순위를 정해야겠다.
10/05/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