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황무한 세상 곳곳에서 ‘거름’의 삶 살라!

CT, 뉴욕 킹스칼리지 종교학 앤서니 B. 브래들리 교수의 ‘예수님의 소금비유’ 소개

뉴욕 킹스칼리지 종교학교수인 앤서니 B. 브래들리(ANTHONY B. BRADLEY)는 누가복음 14장 34-35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소금 비유가 바로 자신을 다시 태어나게 한 말씀이라고 고백한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소금 비유는 거름에 관한 것이라고 말한다(You Are the Manure of the Earth: Jesus' metaphor about salt was actually about fertilizer).

클렘슨대학교를 졸업하고 내가 처음 잡은 직업은 애틀랜타에 있는 작은 제약회사에서 품질 관리 약제사로 일하는 것이었다. 괜찮은 직업이었지만, 사람 사귀기를 좋아하는 내가 실험실에 갇혀서 경력을 쌓아가는 것을 즐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처음에 나는 의사가 되겠다는 계획을 갖고서 대학에 입학했지만, 졸업반 때 영적 깨달음이 있은 뒤에 의학전문대학원 대신에 신학대학원에 가기로 결심했다. 이런 연유로 나는 머릿속에 과학을 넣어둔 채 성경을 배웠고, 이것은 내가 성경을 읽을 때 통찰력을 얻는 지속적인 원천이 됐다.

예를 들어, 최근에 나는 누가복음 14장 34-35절을 강의하기 위해 조사를 하고 있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것을 짜게 하겠느냐?)을 읽으면서, 이 말씀을 직접 들었던 청중은 소금에 관해서 어떻게 이해했을지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소금이 팔레스타인에서 거름으로 사용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으며, 이것은 내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에 대한 나의 관점을 영구히 바꾸었다. 전에는 다소 이상한 부담이었던 “소금이 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제 크리스천의 삶과 사명에 대한 영감의 원천이 됐다.

환경 과학과 토양화학 분야의 전문가들은 소금이 수 세기 동안 토양을 비옥하게 만드는 중요한 수단이었다고 말한다. ‘성서고고학’ 저널에서 오래 전에 “소금, 토양, 구원”이라는 논문을 읽었는데, 이것은 지금도 여전히 훌륭한 논문이다. 

웨스트버지니아대학교 토양학과장이었던 유진 P. 디트릭 교수는 마태복음 5장 13절과 마가복음 9장 50절, 누가복음 14장 34-35절에서 예수님은 가정에서 사용되는 소금에 관해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농업용 소금에 관해서 말씀하셨다고 주장했다. 

디트릭 교수는 팔레스타인에는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그런 종류의 소금과는 다른 소금이 몇 가지 있다고 말했다. 암염도 그 가운데 하나인데, 이것은 사해의 물에서 농축된 소금이다. 소금 구덩이도 있고(스바냐 2:9), 그밖에 다른 것들도 있다. 덧붙여서, 디트릭 교수는 “거름으로 사용된 소금에 관한 농업 관련 문서들이 매우 많다”고 이 논문에 적고 있다. 

다른 자료를 인용하면서 디트릭 교수는 “소량의 소금이 지닌 가치가 고대에 잘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카토나 베르길리우스, 그리고 다른 여러 사람들이 목초지의 풀을 잘 기르는 데 소금이 큰 힘을 발휘한다고 기록했다”고 말했다.

디트릭 교수가 말했듯이 농업전문가들은 거름으로서의 소금의 가치를 오래전부터 알아보았다. 디트릭과 같은 시기에 나온 또 한 편의 논문이 있다. 농업에 가치 있는 소금의 속성에 관한 로버트 노포크의 논문이 그것이다. 학술상을 받은 이 논문은 소금이 농사에 사용된 연원이 매우 오래됐다고 말한다. 그는 “고대 히브리인들은 이미 2000년 전에 팔레스타인에서 소금을 활용했다”고 말하면서 열왕기하 2장 21절과 누가복음 14장 34절을 인용한다. 농업용 소금에 관한 이 논문은 특히 누가복음 14장 34절을 사례로 들어 예수님은 조리용 소금이 아니라 농업용 소금에 관해 말씀하신다고 주장하고 있어 매우 흥미롭다.

마태복음 5장 13절과 마가복음 9장 50절, 누가복음 14장 34-35절에서 소금에 관해 말씀하실 때 예수님은 1세기에 사용된 몇 종류의 소금을 가리키고 계셨다. 이 소금들은 현대인의 주방 식탁에 놓여있는 소금(식염)과는 달랐다. 예수님 시대의 소금들은 매우 적은 양의 황산칼슘(석고)을 함유하고 있는 염화나트륨과 마그네슘과 칼륨의 화합물이었다. 이것들 가운데 어떤 것은 다른 것보다 더 빨리 용해됐지만, 어떤 것은 성분을 더 잘 유지할 수 있었다. 농사를 짓는 데는 보통 더 딱딱하고 “더 짠” 소금이 더 가치가 있었다. 더 딱딱하고 더 짜다는 것은 곧 이로운 효과가 더 오래 지속된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짠맛”을 잃은 소금에 관해 말씀하실 때, 여기에는 시간이 지나면서 소금의 성분들이 자연적으로 분해되는 과정이 내포돼있다.

분해된 소금은 소량의 석고를 상실하는데, 이때 “짠맛”이 사라진다. 이 짠맛의 변화가 일어나면 땅을 비옥하게 하는 효과가 떨어진다. 그래서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소금이 짠맛을 잃어버리는 것에 관해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은 땅을 비옥하게 하는 소금의 속성들, 곧 생명과 성장을 가져오는 능력을 잃어버리는 것에 관해 말씀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이 식용 소금이 아니라 거름용 소금에 관해 말씀하고 계셨다면, 이것은 마태복음 5장 13절의 “이 세상의 소금”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영혼을 위한 소금”으로 더 쉽게 번역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혼을 위한 소금”으로 번역하면, 누가복음 14장 34-35절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것을 짜게 하겠느냐? 

소금으로의 부르심은 망가진 사람들에게로의 부르심

식탁용뿐 아니라 토양 성장 촉진하는 소금 사명완수

그것은 땅에도 거름에도 쓸 데가 없어서 밖에 내버린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 말씀에 등장하는 “거름”에 우리가 혼란을 느끼는 것은, 우리는 소금을 조미료로 생각하는 데 익숙하기 때문이다. 소금이 거름의 토양을 비옥하게 하는 속성을 함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게 되면 예수님의 말씀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음식을 보존하기 위해서 소금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오늘날 상식이지만, 소금은 또한 수세기 동안 토양을 비옥하게 보존하는 농사용 비료로도 사용됐다. 19세기 한 농업 참고도서는 “발효된 퇴비를 땅에 한 번 밖에 뿌릴 수 없을 때도 소금은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다…퇴비더미에 소금을 뿌리면 퇴비가 얼마나 발효됐는지 확인할 수 있는 값싸고 효과적인 방법임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소금은 퇴비가 썩지 않게 해 거름으로서 쓸모없게 되는 것을 막는 동시에 퇴비의 거름성분을 더욱 강화한다. 수세기에 걸쳐서 검증된 농업용 소금에 대해 이해하게 되면 소금을 식용으로 해석할 때보다 예수님의 소금 비유와 고대 세계에 관해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조사를 더 하면서 나는 고대 히브리인들만 소금을 농업용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중국인들과 고대 로마인들도 그렇게 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소금은 건조한 곳에서 토양이 수분을 보유하고 잡초를 말라죽이고 딱딱한 땅을 갈기 좋게 만들고, 산성이 강한 풀을 가축이 좋아하는 풀로 바꾸는 데 이용됐다. 

어떤 곳에서는 소금이 밀에 녹병이 생기는 것을 막아주고, 감자가 마름병에 걸리지 않게 해 준다. 적절하게 사용하면, 소금은 이끼를 없애고 식물들이 뿌리를 더 깊이 내려 더 잘 자랄 수 있게 해준다. 빗물이나 관계용수를 통해 토양에 스며든 소금은 화학적으로 중요한 무기질과 영양분을 그 땅에 내놓아 식물이 무럭무럭 잘 자라게 해준다.

이것은 도시화된 사회에 사는 우리에게는 낯선 개념이지만, 세상의 다른 지역에서는 매우 잘 알려져 있는 개념이다. 필리핀 코코넛진흥청은 최근 “소금(염화나트륨): 코코넛 생산성 제고를 위한 효과적이고 저렴한 비료”라는 표제의 지침서를 배포했다. 이 지침서에는 소금이 작물 성장과 발육을 촉진하고, 곡물 생산량을 증가시키고, 작물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그리고 환경 지속가능성을 향상시킨다고 적혀 있다. 1991년부터 1997년 사이에 코코넛 재배에 소금을 비료로 사용한 농부들은 그렇지 않은 농부들보다 125% 더 많은 수확량을 기록했다고 이 지침서는 말한다.

소금을 음식 맛을 내는 데나 사용하는 현대인이 아니라, 필리핀 코코넛 농부들(또는 고대 팔레스타인 사람들)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인다면 어떻게 될까? 분명하게 농업적인 관점에서 소금을 이해하게 되면 예수님의 이 가르침에서 새로운 것을 보게 될까?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디트릭 교수의 응용은 이와 같은 이해가 예수님의 메시지를 얼마나 더 힘 있게 만드는지를 잘 보여준다. “너희는 토양을 기름지게 하는 소금, 성장을 위한 촉진제이다. 너희가 맛을 잃은 소금과 같이 된다면, 어떤 것에도 더 이상 이롭지 않다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온 세상에 어찌 두루 퍼질 수 있겠는가?”

크리스천은 단지 조미료로, 부패방지용으로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는 황무한 세상 곳곳으로 보내져 성장을 촉진해야 하는 사명을 받은 이들이다. 거름이 돼 세상에 섞여 하나님께서 세상을 새롭게 하고 생명의 땅으로 바꾸라고 부름 받은 이들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 급진적인 대항문화적 메시지에 헌신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세상에 생명과 성장을 가져다 줄 복음의 능력을 증언하는 “짠맛”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짠맛”을 잃어버리면, 우리는 “더 이상 어떤 것에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예수님이 당신의 제자들에게 기대하신 변화의 주체가 될 수도 없다(마5:13).

농업용 소금이 황폐한 땅을 갈기 쉽게 만들고, 식물이 중요한 영양소를 잘 흡수할 수 있게 하고, 거름이 땅을 더욱 비옥하게 만들게 한다면, 예수님은 이 땅의 소금인 우리를 비상하고 대항문화적인 무엇이 되라고 부르시고 계시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농업용 소금으로 여긴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지저분해지는 것을 각오해야 하며 어떤 생명도 자라지 않는 곳으로 마땅히 가야한다. 밝고 새롭고 흥미진진한 곳으로 가는 대신에, 우리는 “정상적인” 사람들의 눈에는 이해가 안 될 수도 있는 기회들을 찾아 나서야 한다. 우리는 그렇게 부름 받았다.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할지도 모른다. “그녀는 하버드 역사학 학위를 갖고 있어. 그런데 왜 웨스트버지니아 시골에서 중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거지?” “그는 앞으로 프로선수가 될 수 있는 재능을 갖고 있는 대학운동선수야. 그런데 왜 집에서 이혼한 어머니와 동생들을 부양하고 있는 거지?” “그들은 모두 전망이 밝은 경력을 갖고 있어. 그런데 왜 지역사회에서 장애를 갖고 있는 성인들과 함께 저렇게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거지? 그 시간에 기업에서 중요한 일을 할 수 있을 텐데 말이야.”

이러한 질문과 비판 앞에서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이웃을 마음껏 사랑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러면서도 시간을 허비한다거나 “잠재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 자신이 거름이라는 것을 알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행복이나 직업적인 성장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성장으로 우리의 가치를 측정한다. 

더 나아가 우리는 거름을 가장 많이 필요로 하는 곳으로 우리가 흩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복음을 모르거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그들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지금은 메마른 땅일 뿐인 그곳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이 자라나는 땅으로 바꿔야 한다.

“이 땅의 소금”이 되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우리가 농업적 관점에서 이해하면 오늘날 크리스천들이 직면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문제들을 밝은 빛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복음전도, 정의, 사회참여, 그리고 사회적 책임에 관한 질문들을 다른 사람들의 생명과 번영을 촉진한다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놀랍도록 분명하게 이해된다. “이 땅의 소금”이라는 이 관점을 갖게 되면, 우리의 재능과 관심이 세상의 메마른 땅과 퇴비더미와 어떻게 만나게 될 것인지 숙고하게 되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디로 이끄시는지 분별하게 된다.

퇴비더미는 우리 주변 어디에나 있다. 이것은 황폐한 인생들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작은 마을, 대도시, 부자 동네에도, 그 어디를 가든 생명이 없는 곳이 존재한다. 재난 당한 사람들처럼 살아가는 친구와 가족들이 있다. 돈 문제, 중독, 억압, 불의, 잘못된 결정, 무시, 또는 복음에 대한 노골적인 거부도 역시 어디에나 존재한다. 이 모든 복잡한 문제들이 우리가 돌봐야 할 사람들의 삶을 괴롭히고 있다.

소금으로의 부르심은 이 망가진 사람들에게로의 부르심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원하시는 그런 사람이 되도록 그들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소금으로서 우리에게는 썩어가는 퇴비더미와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메마른 땅-크리스천들이 없기 때문에 죽음과 황폐와 부패가 있는 사회의 모든 영역들-에서 생명이 자라나게 해야 하는 목적이 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선하심으로 계획하신 세상 어느 곳으로 나아가고 계시듯이, 바로 그곳으로 크리스천들도 서로를 격려하고 훈련하며 나아가야 한다.

좋은 소식이 있다. 소금이 되기 위한 기회를 찾기 위해서 그리 멀리 가지 않아도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흩으시는 곳이 어디든, 우리는 그곳에서 자비를 수단으로 삼고 사랑을 동기로 삼아 예수님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소금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하여 그곳의 사람들을 이롭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09/28/2019

Leave Comments